그리고 그 다음 판
광명자는 높은 절벽 위에서 산허리를 휘감고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강은 멀리서보면 우직한 산만큼이나 변치 않는 풍광의 일부이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항시 변하고 있는, 신기한 놈이었다. 광명자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 그 기묘한 균형점을 강이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균형을 맞추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조금이라도 과하지 않고 동시에 부족하지 않아야 했다. 그래, 예를 들어 지금 자신의 뒤로 접근해오고 있는 한 사내의 발걸음처럼 내딛는 무게감이 있는 동시에 충분히 땅에서 언제든 뛰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가벼워야 했다. 광명자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뒤로 접근하는 건 무인의 자세는 아닐진대.”
“그렇다고 앞에서 절벽을 기어 올라올 순 없잖소.”
그것도 그렇군. 광명자는 사내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농지거리였고 사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모든 사연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원래 장생이라는 자의 기질이었다. 그런 것에서 그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광명자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게가 없던 것들의 무게가 생겨났다. 주변 사람들은 그 무게감을 주로 과묵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장생은 생각보다는 말이 많은 사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 것이 그 또한 기묘한 균형점 위에 있는 사내였다.
“요즘에는 파편이라는 게 유행인가 보오.”
“파편?”
광명자는 입에 물고 있던 풀잎을 들썩였다. 장생은 광명자가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자 기쁜 듯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파편이라는 걸 가지기만 해도 상당한 무공을 얻을 수 있다는데.”
“가지기만 해도?”
“그렇다더군.”
장생의 말에 광명자는 핏, 하고 풀잎을 물고 있는 입으로 비웃었다. 그 바람에 이파리 사이로 날카로운 휘파람이 들렸다.
“믿기 힘든 얘기로소이다. 자고로 무공이라 함은 아무리 사파의 수를 쓴다한들 정도 이상의 수고가 필요로 한 법이거늘.”
“나도 믿기는 힘드네만. 그래도 이리 떠들썩하니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기도 그렇소.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려 하는데-”
“예전에도 그런 비급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떠돌았소. 하지만 그 중 태반은 헛소문이었고 실제로 확인된 비급은 득보다 해가 많은 것들이었소. 강한 무공을 얻어도 사람이 미쳐버리면 무슨 소용이오? 중요한 건 무공을 쓰는 사람이외다.”
광명자는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장생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때 소림사에 봉인되어 있다가 세상에 풀려난 뒤로 중원에 수많은 비극을 몰고 왔던 비급, 구음진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구음진경은 그야말로 무공 수련의 총체적인 비법에 관해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책에 쓰인 내용대로 수련을 하면 다른 방식으로 수련을 할 때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무공을 연마할 수 있었다. 본래 무공이라는 것은 정파의 수련법에 따르면, 탑을 쌓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무엇보다 그 성난 기운이 잠잠해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강해져가는 것이 순리다. 그러지 않으면 무공이 역류해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 하지만 사람의 수명은 생각보다 짧았고 그 중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더욱 짧다. 정파식대로 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덧 무공의 정점에 오른 한 명의 노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단하게 여문 무공의 결실이 늙어버린 육체를 어느 정도 강하게 만들어주지만 글쎄. 만약 그 정도의 무공을 젊은 날에 습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비급을 가지고 도박에 성공한다면 젊은 혈기가 넘쳐날 때 무공의 정점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세월 간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무림인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 장생이 동감을 표했다.
“백번 옳은 말씀이오. 하지만 만진을 보면 도박이 성공했을 때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보이지 않소?”
“하기사, 만진도 구음진경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괴물 같은 무공을 연마할 순 없었을 터. 그 예로 예전에 만진은 강하긴 했지만 아예 이기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소. 그 때 많은 고수들이 어린 천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진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요. 다들 그 놈이 충분히 강해졌을 땐 자신은 더 강해져 있거나 이미 죽어서 영원히 그 놈을 이긴 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광명자는 풀잎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이파리에서 쓴 맛이 흘러나와 혀를 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운이 좋은 놈은 있기 마련이었고 가끔은 그것이 운인지 실력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놈도 있다. 중원이라는 곳은 그렇다. 강한 놈 위에는 항상 더 강한 놈이 있었고 만진도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자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천재의 출현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엉이 아이는 영 소식이 없나?”
광명자가 묻자 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뒤돌아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광명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이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쩌면 벌써 만진이 손을 썼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그의 손아귀 안에 있던 소년이었고, 구음진경 탓에 제정신도 아닌 상태였으니.”
“부엉이 아이랑 겨뤄본 적이 있소?”
이번에는 장생이 물어왔다. 광명자는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싸웠다기보다는, 먼발치에서 봤다는 게 더 알맞겠지. 모습도 어차피 알 수 없었고. 하지만 멀리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소. 살수 특유의 얼음장 같은 살기. 그리고 그 살기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
“만약 싸웠다면?”
광명자는 그걸 굳이 물어보는 장생에게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지금 내가 여기 없겠지. 나도 그 정돈 알고 있소. 이보시오, 부엉이 아이나 만진이 진정 무서운 점이 뭔지 아오?”
“강력한 무공?”
장생은 왠지 광명자가 바라는 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맨 처음 떠오른 답을 내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광명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싸운 자는 다음이 없다는 것이지.”
광명자는 가지고 있던 검의 머리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하게 손에 잡히는 감각이 마치 들러붙는 것처럼 친숙했다.
“나는 첫 판은 대부분 지지만 다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후일을 기약할 수 있소. 하지만 그 둘에겐 그게 통하지 않소. 첫판이 곧 마지막판. 처음 격돌했을 때 이기지 않으면 영원히 이길 수 없소.”
“그거 참, 무서운 이야기로군. 그리고 그럴 듯하다는 게 더 소름끼치고. 그런데 또 무서운 게 뭔지 아오?”
“그게 무엇이오?”
장생은 껄껄 웃으면서 광명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대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요. 어쩌면, 이미 다음을 기약할 방법이 있는 거 아니오?”
광명자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묵직한 손을 치웠다.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다음이 있느냐 없느냐지. 져도 후일이 있다면 이길 수 있고 이겨도 후일이 있다면 질 수 있소.”
“지당한 말씀이오. 어찌 매번 그리 옳은 말만 하는지. 그래서, 화산파 제일검께서는 비급이나 파편 같은 건 필요 없다 이건가?”
장생이 묻자 광명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제야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에는 나지막한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그랬소? 듣자하니 소문이 자자한 모양인데 긴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지.”
“기면?”
장생이 묻자 광명자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는 이미 흐늘흐늘해진 풀잎을 뱉어버리고는 장생을 바라보았다. 먼저 파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 사내는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광명자는 일단 여기서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건 어디 그 때 가서 봅시다. 만약 파편이라는 게 진짜라면 이거 참, 귀재들이 그리 넘쳐나서야 어디 살 수가 있겠나.”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각자가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건 중원의 세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장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평화롭게 이루고 있는 세력 간 균형이 언제 또 흔들릴지 몰랐다. 파편은 수많은 반란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또 힘은 자신의 균형점을 찾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광명자는 모든 판이 균형을 이룬 거기서 또 그 다음 판을 기약할 것이다.
“자고로, 최고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또 다음 판을 기약하는 사람이지.”
광명자는 낮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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