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다음 판

 

 

광명자는 높은 절벽 위에서 산허리를 휘감고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강은 멀리서보면 우직한 산만큼이나 변치 않는 풍광의 일부이면서도 가까이 다가가 살피면 항시 변하고 있는, 신기한 놈이었다. 광명자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 그 기묘한 균형점을 강이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균형을 맞추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조금이라도 과하지 않고 동시에 부족하지 않아야 했다. 그래, 예를 들어 지금 자신의 뒤로 접근해오고 있는 한 사내의 발걸음처럼 내딛는 무게감이 있는 동시에 충분히 땅에서 언제든 뛰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가벼워야 했다. 광명자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뒤로 접근하는 건 무인의 자세는 아닐진대.”

그렇다고 앞에서 절벽을 기어 올라올 순 없잖소.”

그것도 그렇군. 광명자는 사내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어차피 농지거리였고 사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모든 사연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원래 장생이라는 자의 기질이었다. 그런 것에서 그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광명자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게가 없던 것들의 무게가 생겨났다. 주변 사람들은 그 무게감을 주로 과묵함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잘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 장생은 생각보다는 말이 많은 사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 것이 그 또한 기묘한 균형점 위에 있는 사내였다.

요즘에는 파편이라는 게 유행인가 보오.”

파편?”

광명자는 입에 물고 있던 풀잎을 들썩였다. 장생은 광명자가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자 기쁜 듯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파편이라는 걸 가지기만 해도 상당한 무공을 얻을 수 있다는데.”

가지기만 해도?”

그렇다더군.”

장생의 말에 광명자는 핏, 하고 풀잎을 물고 있는 입으로 비웃었다. 그 바람에 이파리 사이로 날카로운 휘파람이 들렸다.

믿기 힘든 얘기로소이다. 자고로 무공이라 함은 아무리 사파의 수를 쓴다한들 정도 이상의 수고가 필요로 한 법이거늘.”
나도 믿기는 힘드네만. 그래도 이리 떠들썩하니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기도 그렇소.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려 하는데-”

예전에도 그런 비급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떠돌았소. 하지만 그 중 태반은 헛소문이었고 실제로 확인된 비급은 득보다 해가 많은 것들이었소. 강한 무공을 얻어도 사람이 미쳐버리면 무슨 소용이오? 중요한 건 무공을 쓰는 사람이외다.”

광명자는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장생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때 소림사에 봉인되어 있다가 세상에 풀려난 뒤로 중원에 수많은 비극을 몰고 왔던 비급, 구음진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구음진경은 그야말로 무공 수련의 총체적인 비법에 관해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책에 쓰인 내용대로 수련을 하면 다른 방식으로 수련을 할 때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강력한 무공을 연마할 수 있었다. 본래 무공이라는 것은 정파의 수련법에 따르면, 탑을 쌓는 것처럼 순차적으로, 무엇보다 그 성난 기운이 잠잠해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강해져가는 것이 순리다. 그러지 않으면 무공이 역류해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 하지만 사람의 수명은 생각보다 짧았고 그 중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더욱 짧다. 정파식대로 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덧 무공의 정점에 오른 한 명의 노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단하게 여문 무공의 결실이 늙어버린 육체를 어느 정도 강하게 만들어주지만 글쎄. 만약 그 정도의 무공을 젊은 날에 습득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비급을 가지고 도박에 성공한다면 젊은 혈기가 넘쳐날 때 무공의 정점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세월 간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무림인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 장생이 동감을 표했다.

백번 옳은 말씀이오. 하지만 만진을 보면 도박이 성공했을 때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보이지 않소?”

하기사, 만진도 구음진경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괴물 같은 무공을 연마할 순 없었을 터. 그 예로 예전에 만진은 강하긴 했지만 아예 이기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소. 그 때 많은 고수들이 어린 천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진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요. 다들 그 놈이 충분히 강해졌을 땐 자신은 더 강해져 있거나 이미 죽어서 영원히 그 놈을 이긴 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광명자는 풀잎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이파리에서 쓴 맛이 흘러나와 혀를 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운이 좋은 놈은 있기 마련이었고 가끔은 그것이 운인지 실력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놈도 있다. 중원이라는 곳은 그렇다. 강한 놈 위에는 항상 더 강한 놈이 있었고 만진도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자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천재의 출현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부엉이 아이는 영 소식이 없나?”

광명자가 묻자 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뒤돌아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광명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이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쩌면 벌써 만진이 손을 썼는지도 모르지. 어차피 그의 손아귀 안에 있던 소년이었고, 구음진경 탓에 제정신도 아닌 상태였으니.”

부엉이 아이랑 겨뤄본 적이 있소?”

이번에는 장생이 물어왔다. 광명자는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싸웠다기보다는, 먼발치에서 봤다는 게 더 알맞겠지. 모습도 어차피 알 수 없었고. 하지만 멀리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소. 살수 특유의 얼음장 같은 살기. 그리고 그 살기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

만약 싸웠다면?”

광명자는 그걸 굳이 물어보는 장생에게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지금 내가 여기 없겠지. 나도 그 정돈 알고 있소. 이보시오, 부엉이 아이나 만진이 진정 무서운 점이 뭔지 아오?”

강력한 무공?”

장생은 왠지 광명자가 바라는 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맨 처음 떠오른 답을 내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광명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싸운 자는 다음이 없다는 것이지.”

광명자는 가지고 있던 검의 머리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익숙하게 손에 잡히는 감각이 마치 들러붙는 것처럼 친숙했다.

나는 첫 판은 대부분 지지만 다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후일을 기약할 수 있소. 하지만 그 둘에겐 그게 통하지 않소. 첫판이 곧 마지막판. 처음 격돌했을 때 이기지 않으면 영원히 이길 수 없소.”

그거 참, 무서운 이야기로군. 그리고 그럴 듯하다는 게 더 소름끼치고. 그런데 또 무서운 게 뭔지 아오?”

그게 무엇이오?”

장생은 껄껄 웃으면서 광명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대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요. 어쩌면, 이미 다음을 기약할 방법이 있는 거 아니오?”

광명자는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누르고 있는 묵직한 손을 치웠다.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다음이 있느냐 없느냐지. 져도 후일이 있다면 이길 수 있고 이겨도 후일이 있다면 질 수 있소.”

지당한 말씀이오. 어찌 매번 그리 옳은 말만 하는지. 그래서, 화산파 제일검께서는 비급이나 파편 같은 건 필요 없다 이건가?”

장생이 묻자 광명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제야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에는 나지막한 흥분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그랬소? 듣자하니 소문이 자자한 모양인데 긴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지.”

기면?”

장생이 묻자 광명자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는 이미 흐늘흐늘해진 풀잎을 뱉어버리고는 장생을 바라보았다. 먼저 파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 사내는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광명자는 일단 여기서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건 어디 그 때 가서 봅시다. 만약 파편이라는 게 진짜라면 이거 참, 귀재들이 그리 넘쳐나서야 어디 살 수가 있겠나.”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각자가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건 중원의 세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장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평화롭게 이루고 있는 세력 간 균형이 언제 또 흔들릴지 몰랐다. 파편은 수많은 반란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또 힘은 자신의 균형점을 찾을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광명자는 모든 판이 균형을 이룬 거기서 또 그 다음 판을 기약할 것이다.

자고로, 최고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또 다음 판을 기약하는 사람이지.”

광명자는 낮게 웃었다.

-가장 교묘한 거짓말은 언제나, 가장 믿고 있던 것에 관한 것이다-

 

 

이봐, 히카르도 일어나. 어서!”
, 무슨 일인가?”

큰일 났어.”

큰일?”

, 여자가 되어 버렸잖아?”

……?”

히카르도는 완벽하게 말이 되지만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의 어깨 위로 걸쳐있던 길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는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4월의 바보

 

히카르도는 아무 말 없이 어젯밤에 사다 놓았던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식탁에 앉지 않고 그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천천히, 평소보다 더욱 확실하게 샌드위치를 치아로 분쇄하던 히카르도는 결국 입을 열었다. 거실은 부엌과 불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여기서 말을 해도 거실에 있는 소파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뒤통수에 닿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까미유의 뒤통수가 아까부터 가볍게 도리질 치고 있었다.

그만좀 웃는 건 어떤가.”

하지만 설마, 진짜로 속을 줄은 몰랐지. 걱정 마 히카르도. 사람의 성별이 바뀌는 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하루 만에 일어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정확히 얘기하자면 바뀐다기 보다는-”

히카르도는 짧게 신음했다. 완전하게 믿고 있던 사실을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때 한순간 느꼈던 좌절감 비스무리한 느낌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그의 감정 한복판을 비집고 지나갔다.

요즘 꽤 한가한가보군. 고작 만우절 장난 한번 치려고 가발까지 준비한 걸 보니.”

, 맞아. 시간만 여유로운 게 아니라 내 지갑 사정도 상당히 여유로워졌지. 덕택에 좀 비싼 추억도 만들고 좋은걸?”

까미유는 그의 시간과 지갑 사정만큼 여유롭게 히카르도의 말을 받아쳤다. 조용히 숨을 삼키며 웃고 있는 까미유를 외면하고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씹는데 다시 열중했다. 자주 가던 빵집은 샌드위치에 쓰이는 바게트를 바삭하게 유지하는데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요즘처럼 습기가 사방에 가득한 날에는 몇 시간 정도 밖에 놔두면 설거지를 막 끝낸 스펀지만큼이나 눅눅해졌다.

근데 그거-상한 것 같은데.”

까미유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손가락으로 히카르도가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히카르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까미유는 모호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가락을 한번 빙글 돌렸다.

내 말 못 믿나본데, 요즘은 밖에 몇 시간 놔두면 바로 상한다고.”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말을 듣고 그제야 씹고 있던 샌드위치의 맛을 자각할 수 있었다. 평소에 먹던 것보다 맛이 시큼한 것 같아서 그 이유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조용히 그릇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입에서 씹고 있는 것도 뱉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고민스러웠다. 왠지 그 꼴이 상당히 웃길 것 같아서, 그리고 까미유가 여전히 웃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쓰였다. 하지만 괜히 체면처럼 같잖은 것에 신경 쓰다가 탈이라도 나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히카르도는 입에서 파슬리와 샐러리, 토마토, 베이컨과 함께 버무려지고 있던 빵조각을 뱉어내고 그릇 위에 올려놓았던 샌드위치도 조심스럽게 휴지로 싼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서 있는 식탁으로 다가와 손가락을 튕겼다. 샌드위치가 쓰레기통 모서리를 한번 툭, 치고 들어가는 동시에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고 히카르도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너는 속아 넘어간 거지.”

까미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빈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시큼한 향을 음미하다가 마지막에는 가벼운 입김으로 그릇 위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냄새를 몰아냈다. 아침에 뿌려놓은 머스터드소스가 좀 과했나본데. 까미유는 그렇게 말하며 선하게 웃었다. 히카르도는 이미 휴지로 둘둘 말려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손으로 이마 한쪽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어째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밖에 나와 있는 것인지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을 사실이었는데 떠올리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아마 까미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쳤던 장난 때문에 히카르도는 아침부터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속임수에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벌써 두 번이군.”

히카르도는 식탁에 올린 두 손에 무게를 싣고 이쪽을 보고 있는 까미유의 정면에서 그와 같은 자세로 식탁을 짚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같은 자세로 서 있는 게 재밌었는지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보고 웃었지만 상대는 표정에 웃음기 하나 없었다. 평소에도 잘 웃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히카르도를 향해 까미유가 물었다.

화났나?”

아니.”

그럼 좀 웃어.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비웃고 화도 내란 말이지.”

별로, 널 비웃고 싶진 않군. 화는 더더욱 내기 싫다.”

널 이렇게 가지고 놀았는데도?”

그다지. 어차피 샌드위치는 다시 사면되고.”

이건, 너의 방식으로 날 비웃는 건가. 까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식탁을 짚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다지, 비웃은 건 아니다. 히카르도의 대답에 까미유는 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알아. 그래도 니가 나한테 화내는 모습도 한 번 보고 싶긴 한데. 까미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넌 믿을만한 친구지만 놀리는 재미가 없어. 누군가 네게 장난을 쳤을 때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장난을 친 상대에 대해 갖춰야 할 예의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침에 그렇게 당했는데 이번에 또 당하면 이젠 정말 화를 낼 시기가 온 것 아닐까. 그렇긴 하지. 히카르도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까미유가 일부러 그에게 화를 내라고 독촉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통은 그 반대이지 않던가. 어째서 상대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인지, 그게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히카르도는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일까. 정말로 그는, 화내는 상대를 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정말로, 괜찮다. 친구 사이니까-”

사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 단지 필요해서 곁에 두고 있는 거지. 필요 없어지면 버릴 거야.”

히카르도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까미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도, 거짓말인가?”

어떤 것 같아?”

까미유는 대답해주는 대신 질문을 히카르도에게 되돌려 주었다.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진 그는 녹색 눈동자를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라고 강하게 직감했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진지해 보였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이 접속사 뒤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까미유가 슬며시 웃을 때쯤에야 히카르도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속았을 때처럼 작게 신음하는 그를 보며 까미유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거짓말이었어. 축하해 줘야 하나. 이번 만우절에도 4월의 바보가 되었군. 가장 빠른 기록인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아니다. 4월의 바보는 총 네 번 속아야 되니까. 아직 세 번이다.”

그래? 그거 어차피 우리끼리 정한 거잖아 근데. 히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 현관으로 향하는 까미유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럽지만 어딘지 묘하게 정중한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나가자. 아까 샌드위치 거짓말에 대해 사과하고 아침도 먹을 겸 샌드위치를 사지. , 이번에는 거짓말 아냐.”

까미유는 다시금 히카르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아침에 일어나 조용한 대숲을 거닐면서 그렇게 빽빽하게 들어선 마디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결을 느낄 때마다 나는 바람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조차 팔을 가볍게 휘두르면 어디엔가 스며들어 있던 바람이 나타나, 흐르는 옷자락을 장난스럽게 넘나든다.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묻자 옆에서 내 허튼 장난을 보고 있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겠죠.

하지만 너는 바람을 부리잖아?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붙잡지는 않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서서 원직과 제갈 공명의 대화 -

 

 

다시 돌아오는 바람

진삼국무쌍 촉 IF모드 기반

 

 

5년 뒤, 건안 208년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고 조조군을 조금씩 격파해나간다. 그 와중에 그는 알려지지 않은 경로를 통해 전달된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조조군과 유비군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서서의 어머니는 그가 조조군으로 넘어오길 바라고 있었다.

 

바람은 항상 스쳐지나가죠. 어디에 머무는 법 없이. 바람을 잡는다면 그건 더 이상 바람이 아닐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원직은 공명을 향해 물었다. 공명의 팔이 흔들리면서 소맷자락에서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원직은 공명이 익숙한 부챗살로 입가를 가리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가에 드러난 주름만으로 그의 표정을 짐작할 수밖에 없을 때 그는 이따금씩 중요한 말을 꺼냈다.

이미 무슨 말인지는 대충 짐작했을 것 같지만.”

공명의 말에 원직은 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표정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차분하게 시선을 내리고 발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제 막 갈아 신은 신발 덕분에 발이 가볍고 산뜻해서 어디로든지 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명의 시선도 원직을 따라 그의 발에 머물렀다. 이미 채비를 모두 끝낸 것 같은 원직의 의장은 사실 평소와 별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변함없는 그에 비해 상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서 어젯밤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응대 방식은 그대로 써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써먹지 않아도 될 만큼 상대를 설득하는 게 수월해져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 말라고 했잖아.”

.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원직은 물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여전히, 연기는 잘 안 되는 사람. 공명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와 달리 그의 생각은 표정으로 짐작할 수 없었다.

결정하는 건 당신이죠. 오늘 떠나지 않으면 제 때 당도하지 못할 겁니다. 우린 강을 건널 거고 그러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강을 건너는 기점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강은 거꾸로 흐르지 않으니 공명의 말이 맞을 것이다. 원직은 답답한 심정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대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원형으로 보이는 하늘이 있는 곳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저 하늘이 유일한 출구일 것만 같은 숲 속에서는 이 둘 외에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 자연의 방벽처럼 대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은 당분간 공명과 일행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다. 불만 붙이지 않는다면.

편지는-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미 어머니의 존재를 그 쪽이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 그렇죠.”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그 편지는 그에게 중요했다. 원직은 한숨을 뱉어냈다. 없던 바람이 가볍게 일면서 주변을 흐트러뜨렸다. 설마 그를 아는 사람이 조조의 휘하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 이상 겸손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편지를 받아들고 아직 읽어보기 전에 공명이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그 말에 서서도 애매하게 웃었다. 내용을 읽으면서 그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는 것은 그다지 다시 떠올리고 싶은 일화는 아니었다.

원직은 발을 붙이고 있던 곳에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한걸음 옮기기가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두 걸음, 세 걸음 걸어가자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대숲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공명이 서 있었다. 살짝 옆으로 비켜서 있는 그를 스쳐지나가기 전에 원직은 멈춰 섰다.

너는 자주 나를 바람에 비유하는 것 같아.”

어울리니까요. 특히나 전장에서는.”

원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걸리는 것이 많아. 사실 바람만큼 나랑 반대되는 것도 없을지도. 그다지 나랑 어울리는 비유는 아냐. 원직은 그렇게 말하며 무겁게 웃었다. 평소라면 재치 있게 대답을 돌려주었을 공명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공명의 앞에 서 있던 원직은 살짝 눈을 감았다.

어울리는 거랑 별개로 마음에 들어. 왜냐하면, 너는 바람을 부리니까.”

바람을 부리는 사람은, 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원직은 다시 눈을 뜨고는 길고 곧게 뻗은 대나무 숲에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우물 속에 있는 것 같아. 저 밖으로 뛰쳐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겠지. 아마 당장 내일이면 보지 못했던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우물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조금 다른 길을 가겠지만.

하지만 나는 너의 바람이 될게.”

바람은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공명을 보며 원직은 다시 한 번 무겁게 웃었다. 그는 날이 그다지 춥지 않은데도 서늘하게 식은 공명을 부둥켜안았다. 그 바람에 공명은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직은 공명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아. 그러니까 머물지 않고 네가 부르면 다시 돌아올게. 바람 길을 따라. 내 방식대로.”

어떻게, 라고 묻지는 않았다. 공명은 다시 멀어지는 온기를 뒤에서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오는 바람이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요. 이왕이면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공명은 들고 있던 부채를 들고 있던 손으로 뒷짐을 졌다. 어쩐지 좁았던 대숲의 하늘이 조금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개월 뒤 제갈량은 시상을 찾아가 손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는 동남풍을 이용해 적들의 배를 불태우자는 계책을 냈고 바람을 부르기 위해 제단을 마련한다. 하지만 때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은 제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따라 불어올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제단을 마련했고 그 위에서 바람을 부른다.

왔군요. 긴가민가했습니다만.”

네가, 불렀잖아.”

그렇군요.”

제갈량은 어디선가 홀연히 제단에 나타난 사람을 향해 우선을 들어올렸다. 애매하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은 역시 예전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공명은 웃으면서 우선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원직.”

조삼모사

 

 "좀 쉬면서 하는 건 어때?"

서서는 달이 남쪽 하늘을 지나 서산을 넘어가도록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공명을 걱정했다.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묻긴 했지만 돌아올 답이 뻔했기 때문에 실상은 쉬라고 조금 강경하게 권하고 싶었다.

"오늘 낮에 낮잠을 잤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읽어도 됩니다. 서형이야말로 지금껏 안자고 뭐하는 겁니까?"

"-불빛이 일렁거리면 잘 못 자."

"저번에 저희 집에서 머물렀을 땐 잘 잔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랬었나? 서서가 되묻자 공명이 낮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럼요. 서서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괜히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하긴, 저번에는 불 켜놓고 잘 잤던 사람이 밝아서 못 잔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이래서 언행일치가 중요한 건가 싶었지만 사람이 그걸 다 지키면 더 이상 사람같지 않을 것 같았다.

"잠은 밤에 자는 거지 낮에 자는 게 아닌데..."

"밤에도 잡니다. 좀 늦게 잘 뿐이죠."

"그러고 또 낮에 잔뜩 자버리고. 그럼 낮에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요즘 서형이 낮에 밭일을 도와줘서 참 다행입니다."

서서는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 공명을 보며 낮게 신음했다. 공명은 밤에도 마치 신난 강아지처럼 쌩쌩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서산으로 해가 지기 무섭게 잠자리에 들고 새벽녘에 일어나곤 했는데 요즘은 서책을 읽느라 취침 시간이 조금 늦춰지긴 했다. 하지만 옛날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실상 공명과 거의 겹치는 활동 시간대가 없었다. 서서는 그 점이 아쉬웠다.

"낮에 자고 밤에 책을 읽느니 낮에 책을 읽고 밤에 자는 게 어때?"

"조삼모사가 생각나는군요. 어차피 별반 다를 거 없잖습니까?"

서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점점 눈이 감기는 것을 애써 저지하고 있었다. 잠과 치르는 공성전같은 느낌이었다. 공명이 잔뜩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채 졸린 눈으로 제 쪽을 보고 있는 서서를 보고 말했다.

"서형,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애처로운 강아지 같아요. 안자고 보고 있는다고 제가 잠들진 않을 겁니다."

으음. 서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른거리던 초롱불을 훅 불어서 꺼뜨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 공명이 물었다. 이렇게 하려고. 서서는 공명을 냉큼 안아 올려 침상에 눕혔다. 어리둥절해하며 당황하고 있을 공명의 얼굴을 낮처럼 선명하게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웠다. 서서는 침상 안쪽으로 공명을 밀어 넣고 자신은 바깥쪽에 걸터 누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까 조삼모사라고 했지만 사실은 절대 조삼모사가 아니야. 다르다고. 낮에 너랑 대화를 더 할 수도 있고 그리고 밤에는 이렇게, 같이 누워서 달도 볼 수 있어."

서서는 점점 감기는 눈가에서 공명이 한숨을 쉬며 돌아눕는 것을 보았다. 역시 서형은 아무리 봐도 강아지 같아요. 몸집이 큰 강아지. 뭐 그럴 수도 있지. 서서는 공명의 등에다 대고 늦은 인사를 했다.

잘 자 공명.

 

* 퇴고 시 문장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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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질 삼분지계/지1a: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는가]

 

뭐든지 잘 찾아내는 소년은 숨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숨는 사람이기를 관두고 찾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떤가?

내가 자네의 수경水鏡이 되어줌세.

 

서복은 친구의 보복을 하다가 살인죄를 저질러 도망자 신세가 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방향 감각을 잃은 그는 친구가 주었던 검을 유일한 이정표로 삼아 앞으로의 생을 살아갈 결심을 한다. 다른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호송 중에 탈출한 서복은 쫓기던 도중 탈진하여 어떤 소년들의 도움을 받게 되고 목숨을 건진다. 소년들은 기절한 그를 주막에 뉘여주고 돈을 대신 지불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그의 검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복은 이에 검을 돌려받기 위해 소년들을 찾아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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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소설본/중철/26p/전연령가

가격: 3,000원

샘플 페이지: http://laniche.tistory.com/76

수량조사 페이지: http://me2.do/5ZfxgT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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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의 테두리 효과는 원본에서는 없습니다.

 

 

 

 

 

 

벨라 모르테[만4: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상황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시뇨리아 광장 집회 사건은 두 사람의 분기점이 되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법정에 선 히카르도는 광장에서 체포되었지만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억의 공백 속에서 히카르도는 자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정짓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까미유는 그런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너는 무죄야.

까미유의 자신있는 한 마디를 유일한 증거로 삼아 법정에 서게 된 히카르도는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가장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두 친구, 까미유와 피에르가 히카르도의 머릿속에서 사건의 새로운 용의자로 떠오르게 되고 히카르도는 친구들과 자신의 무죄를 교환해야 하는 상황에 괴로워한다.

 

히카르도, 피에르, 까미유

세 명 중 누가 사건의 진범인가?

유죄인 동시에 무죄일 수는 없다.

사람은 반드시 유죄 혹은 무죄.

 

히카르도는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의 한복판에서 유죄와 무죄, 친구와 자신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진실이 여러 개라면 사실 진실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걸지도 몰라."

-까미유 데샹-

"나는 지금,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다."

-히카르도 바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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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소설본/115p/떡제본/전연령가

가격: 10,000원

커플링 성향은 리버시블, 약하게 있습니다.

샘플 페이지: http://laniche.tistory.com/74

수량 조사 페이지: http://me2.do/x8zpmP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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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히카르도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이 시간에 집에 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히카르도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열 때와 달리 닫힐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해서 다시 열어보았지만 마치 쇠를 가르는 것 같던 그 자극적인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소릴 지르고 기절해버렸나. 그렇게 중얼거리고 경첩에게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껴 혼자 웃던 히카르도는 이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표정을 굳히고 다시 현관문을 닫았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뒤로하고 그는 익숙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봤던 가구들과 광경이었지만 이 시간에는 다른 면으로 햇살을 받아내니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시간대에 들어와도 변함이 없는 것은 풍경 속에 배어있는 냄새였다. 원래 그 속에 녹아들어있었을 것 같은 냄새는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아서 이제는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냄새가 어디론가 사라진다면 아쉽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집에 와 있었군.”

탁자에 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히카르도는 의자 뒤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다. 히카르도와 달리 조용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차가운 손이 잠시 히카르도의 눈앞을 가렸다가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까미유가 싱글거리며 서 있었다. 단정하게 떨어지는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는 여전히 그에게 잘 어울렸고 변함없이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까미유. 너도 일찍 끝난 건가?”

아니. 난 다시 가봐야 돼. 잠시 뭐 좀 가지러왔어.”

?”

말해도 알까? 까미유는 가볍게 대꾸하며 잠시 그의 서재로 사라졌다. 말해주면 알지도 모르지. 모를 수도 있지만.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사라진 쪽을 향해 대답했지만 상대방의 옷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소리에 묻힌 것 같았다. 잠시 뒤 까미유가 서재에서 찾던 것을 가지고 나왔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차이점은 없는 것으로 보아 부피가 작은 물건인 것 같았다.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시 물어볼만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서 히카르도는 그냥 기억 속에서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는 언제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냄새, 바뀌었군.”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스쳐지나갈 때 무심코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야. 까미유는 그렇게 물으며 다시 나갈 채비를 하며 신발을 신고 있었다. 히카르도는 남은 빵을 한 입에 삼키며 까미유를 마중하기 위해 현관에 섰다. 히카르도는 신발을 신느라 벽에 손을 짚고 수그리고 있는 그의 등을 살짝 누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친구와 달리 히카르도는 그다지 장난을 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대신 친구의 질문에 나머지 대답을 하기로 했다.

너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바뀐 것 같아서.”

, 향수 뿌렸어. 일부 환자들은 냄새에 민감해서.”

까미유가 나갈 때 향수를 뿌리곤 한다는 것은 히카르도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익숙한 체취를 감추고 새롭고 산뜻한 향기로 몸을 감쌌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다시 그가 알고 있던 냄새로 돌아오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익숙했던 그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히카르도는 그 점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향수 같은 걸 뿌리는 것보다 원래 그에게서 나던 냄새가 더 좋았다. 단지 익숙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히카르도는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는 까미유의 뒷모습을 안았다. 기습적인 그의 포옹에 까미유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아까 전에 장난친 걸 이렇게 복수하는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히카르도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렇게 그의 목 뒤에 고개를 파묻고 그의 체취를 맡았다. 가까이 그를 끌어안자 까미유를 감싸고 있던 향수의 장막이 걷히고 익숙한 냄새가 다시 흘러나왔다. 히카르도는 그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익숙한 그의 체취에 마음이 편해졌다.

나 나가봐야 돼. 이제 그만 놓아주지 않겠어?”

, 미안. 잘 다녀와.”

히카르도는 까미유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가 놓아주기 무섭게 다시 향기의 장막이 드리웠다. 그리고 이내 그 향기조차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결박

 

 

난 이제 너를 놔 줄 거야.”

태현은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로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는 그대로였지만 상대가 더 이상의 자유로움을 허락할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눈에 그런데 뭔가가 씌워져 있던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태현은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눈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아니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 그가 태현의 손목을 세게 부여잡았다. 아프다. 태현은 점점 강하게 손목을 짓눌러오는 악력에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점점 끊어지듯 아파오는 고통은 한계 없이 치솟는 것 같았다. 참다못해 터뜨린 비명이 귓가를 가득 매웠다. 목에서 가래가 끓었다. 머리는 뜨거운데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와중에 유일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태현의 귀에 날아들었다. 허강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널 잡을 거야.”

태현은 눈을 떴다. 막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뼈가 어긋날 것만 같은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태현은 심호흡을 하며 천장을 응시했다. 눈은 감으면 안 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피로감이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 시체처럼 누운 채로 수분이 지나자 호흡이 안정되고 몸이 유연성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이제는 움직여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태현은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부터 움직여보았다.

이제 널 놔 줄 거야.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다시 들려오면서 태현은 전극으로 손가락 끝을 자 극하는 것과 같은 날카로움을 느꼈다. 전기 자극처럼 따끔하면서 순간적으로 찾아든 느낌에 태현은 숨을 멈췄지만 붙잡기도 전에 느낌은 사라지고 고통이 뒤늦게 엄습했다. 묵직하기 보다는 뜨거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성가신 자극이 지속적으로 손가락 끝을 괴롭혔다. 그리고 태현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오른손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은 있었다. 절단된 진짜 오른손을 대신해 끼운 가짜 손이었다. 하지만 가짜 손과 함께 찾아온 것은 가짜 통증이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시 널 잡을 거야. 태현은 말소리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마치 혹 주머니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무게감을 떨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흔들리는 것의 무게감만 선명해질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태현은 의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진짜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짜가 더 이상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금 머리가 진정되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태현은 침대에 축 늘어진 채 멍한 눈길을 창가로 돌렸다. 두꺼운 커튼은 달빛조차 막아버렸다. 사실 창가쪽을 쳐다본다고 했지만 실제 창이 거기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태현은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내 손도, 이미 결박을 풀었다고 생각한 것도 다 가짜이지 않을까.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무뎌져 버린 가짜가 아닐까. 그리고 어둠이 걷히고 다시 빛으로 밝아진 시야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왠지 밧줄로 움직일 수 없게 결박된 자신의 손목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언젠가는 발목도, 팔도 모두 묶이게 될까. 종국에는 온 몸이 결박된 채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침대에 누운 채 정말 움직일 수 없게 될 때를 기다리게 될까.

태현은 문득 밀려오는 두려움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황급히 다가갔다. 달빛을 차단하고 있던 두꺼운 커튼을 거칠게 걷어내자 눈을 찌르듯 밝은 태양빛이 방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이미 날이 밝았었구나. 태현은 중얼거리며 내리쬐는 태양빛을 막기 위해 무심코 팔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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