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에 관한 정의
데샹은 충격과 함께 자신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강한 힘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숨을 돌리는 차에 기다란 철제 막대가 벽에 푹 꽂혔다. 스펀지에 꽂는 것처럼 부드럽게 벽을 뚫은 막대는 자신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약해진 벽에서 떨어져 나온 건조한 부스러기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면서 시야를 가렸다.
“…죽여 버리겠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있어야 할 어둠이 없었다. 시선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이 비어있는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언뜻 마주하기도 어려운 소년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빛으로 증발해버릴 것 같아서 무언가가 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일어나기 시작한 변화를 데샹은 알아차렸다. 그는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막대를 곁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소년이 발산하는 강력한 염동력 때문에 공기가 요동치면서 바람이 만들어졌다. 그 바람은 속이 빈 막대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서늘한 휘파람을 불었다. 데샹은 다시 눈을 돌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주 어릴 적에 본 뒤로는 오랜만에 재회했다. 그 때에 비해 감정이 풍부해질 나이가 되었지만 소년의 표정은 텅 비어 있었고 단조로운 어조는 변하지 않았다.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데샹은 변하지 않은 소년의 모습에서 변한 것을 집어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경고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표정 없이 이쪽을 노려보는 시선을 가볍게 흘려보내며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피터 모나헌, 드디어 너도 알아버렸나 보군. 두려움이라는 걸.”
웃기지도 않은 허튼 소리. 피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까미유 데샹은 언제나 그랬다. 그는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의 언변에 휩쓸리기 시작하면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은 진실이 되었다. 깊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의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그와 짧게 대화를 나누면서 본능적으로 차린 피터였다. 그는 그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줬으면 해. 누나를 빼앗긴 것 같다는 그 상실감을 애꿎은 곳에 투사하지 마.”
하지만 그의 말은 교묘하게 사람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기어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죽이자. 지금 여기서. 피터는 그렇게 결심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 목을 조른다면 상대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른 걸. 너가 두려움을 깨닫게 된 건-”
피터는 데샹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고민했다. 목을 조르는 것 보다는 그냥 꺾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이왕이면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났으면 했다.
“역시 스티븐슨이 널 잘 길들인 탓일까?”
“닥쳐.”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지나치지 못했다. 피터는 데샹의 입에서 스티븐슨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마치 그가 처음부터 길들이는 것을 의도했던 것처럼 논리를 끌고 가는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유롭게 관전하는 것 같이 서 있는 그의 모습 역시 그랬다. 저 여유로움이 나오는 근원지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 예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소했다. 그렇지만 어느덧 그의 마음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미약했다. 피터는 그 흐름을 무시하고 데샹을 노려보았다.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그의 여유로움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피터!”
막 상대의 목에 힘을 주려던 찰나에 귀를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멈췄다. 피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데샹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토마스가 이쪽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데샹이 잃어버렸던 고삐를 다시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누가 너를 두려워할 줄 알아?”
피터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부정하자 데샹은 고개를 저었다.
“두려워하겠지. 날 죽이는 걸. 그의 앞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피터는 데샹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건 말건 데샹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스티븐슨은 아직 어린 네가 사람을 죽이는 건 그다지 원치 않아하는 것 같아. 그렇지? 사실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데. 원래 그런 녀석인데. 그는 아직 너에 관해 아무것도 몰라. 그가 만들고 싶은 너를 보고 있을 뿐이지.”
여전히 피터는 말이 없었다. 데샹은 웃으며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대로 걸어가 움직이지 않는 피터를 지나치며 그는 작게 속삭였다.
“그의 존재는 널 약하게 만들어 모나헌. 특별한 너를 평범하게 만든단 말이지. 그러니까-”
어느덧 발소리가 바로 모퉁이까지 다가왔다. 이제 몇 초 뒤 나타날 익숙한 모습이 피터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의 모습이 점차 완성되어갔다. 그리고 데샹이 어둠에 잠긴 샛길로 사라지면서 토마스가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피터! 여깄었구나. 보이질 않아서 걱정했어.”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토마스를 피터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너의 존재. 데샹은 그렇게 토마스를 정의했다. 그의 정의가 과연 맞는 것일까? 아니면 이번에도 사실을 왜곡한 채 거짓말을 내뱉은 것일까. 피터는 얼굴 앞에서 흩날리는 하얀색 목도리를 무감정한 눈으로 좇았다.
“무슨 일 있었어?”
어질러진 주변을 보고 토마스가 물어왔다. 사실대로 그에게 말해야 할까. 피터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다. 피터는 일단 그렇게 상황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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