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기 반 시진 전의 야유회

 

 

 

어디 걸터앉아 자기에 딱 좋은 날씨로군.”

어제도 똑같은 얘기 한 것 같아 사원.”

원직, 자넨 이런데서 유난히 날카로워.”

서서는 대답하는 대신 수더분하게 웃으며 방통이 누워있는 자리 옆에 앉았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느낌이, 그의 말마따나 한숨 자기에 딱 좋았다. 대충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편안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게 자주 이곳을 들린 사람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이런 곳은 매번 용케 찾아내는 방통이었다.

공부는 다 끝난 거야?”

아직 시작도 안했네.”

내일 질답이 있는 건 알지?”

알고 있네.”

서서는 방통의 대답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의 여유로움에 관해서는 이해가 썩 가지는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을 앞두었든지 여유로웠다. 서서는 그가 한 번도 어떤 사태 앞에서 당황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방통과 알고 지낸 기간 동안은 그랬다.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그의 그런 면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남들보다 적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그의 재능에 시기심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은 달랐고 그의 재능은 아마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것일 것이다. 마치 불같은 재능이었다. 단시간에 확 타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식어 있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확연히 식어있는 것 같았다.

서서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약간 습기를 머금었나 했는데 저 멀리서 몰려오는 비구름이 보였다. 아마 오늘 내로 비가 내릴 것이다.

공명의 말이 맞았구나.”

뭐가 말인가?”

서서가 무심결에 내뱉은 것 같은 탄성에 방통이 물었다. 서서는 아직 눈만 닿는 곳에서 서성이고 있는 비구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가오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딘 것으로 보아 이 곳에 비를 뿌리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으므로 좀 더 여유를 가져도 되겠다 싶었다. 서서는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하늘에 눈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요즘 공명이 새로운 것에 재미를 붙인 것 같더라고. 우천을 예측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는 것 같았어. 오늘 비가 올 거라고 나한테 말해줬는데 마침 저기 비구름이 몰려오는군.”

서서는 손을 들어 지평선을 가리켰다. 방통의 눈이 서서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지평선 너머에서 무리 짓고 있는 구름떼들을 한동안 지켜보던 방통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누워있는 바위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공명이 대충 시간도 말해줬나?”

시간?”

비가 내릴 시간 말일세.”

서서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가 올 것이라고 말은 해주었지만 언제 내릴 것이라고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방통은 서서의 말을 듣더니 무심하게 내뱉었다.

한 반 시진 뒤면 비가 오겠군.”

어떻게 알아, 그런 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서서에게 방통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아까 서서가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지평선을 가리켰다.

지평선에 낮게 깔린 구름이 마치 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그럴 것 같군. , 믿는 건 자네 맘일세.”

서서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만약 방통의 말이 맞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상황일 것이다. 공명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게 좀 아쉬웠다. 만약 셋이 모여 있었다면 아마 비가 언제 올 것인지를 놓고 적어도 반 시진 이상 이야기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열심히 떠드는 두 명과 경청하고 있는 한 명이 있을 것이다. 서서는 지평선 너머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비가 안 올 가능성도 여전히 생각 중이야.”

그렇군. 근거는 있는 건가?”

-”

서서는 한숨을 쉬며 방통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근거라고 해야 할까, 사실 머릿속으로 정리되어서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감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이론이라 이미 상대도 알고 있을 것 같긴 했다.

언제나 예외는 있으니까.”

그렇지. 방통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사실이니만큼 납득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단지 그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관해 숙고하는 것은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주전부리를 좀 가져왔거든.”

서서는 어깨를 둘러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갓 만들어서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가지무침과 귤이 들어있었다. 끼니 사이에 먹기에는 양이 좀 많아 보이기는 했다. 방통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그는 서서가 가져온 음식을 뒤적이며 물었다.

이건 뭔가?”

오는 길에 아주머니께서 주셨어. 왜 그-”

아 그 때 자네가 도와줬다던.”

맞아, 그 분.”

서서는 보따리에 한가득 들어있는 것들을 바위의 남은 자리에 펴놓았다. 양이 꽤 되어서 종류는 많지 않지만 푸짐한 음식상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통은 한 쪽에 덜어낸 것 같은 흔적을 보고 여기에 있지 않은 한사람의 몫은 이미 서서가 따로 챙겨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주전부리 정도는 아닌 것 같네만.”

그런가?”

방통은 벌써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고 있는 서서를 보며 입가를 살짝 들썩였다. 비록 복면 뒤로 가려져서 서서가 보진 못했겠지만.

그러니까, 자네 말은 적어도 이걸 다 먹을 반 시진 동안은 비가 오지 않길 바란다는 말이었군.”

방통의 말에 수더분하게 웃는 서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긍정했다. 그런 이유도 개인적으론 싫어하진 않네. 방통은 그렇게 얘기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옅어지고 회색 장막이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는 올 것이다. 그것은 소망 같은 것과는 별개로 정해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시진 동안이라면 흐린 하늘 아래에서 때 아닌 야유회 같은 나들이를 하는 기묘한 기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통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복면을 걷고 서서가 가져온 가지 무침을 한입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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