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다발

 

 

 

총각, 이거 마지막 꽃다발인데 하나 사가. 나도 집에 가야되니까 싸게 줄게.”

히카르도는 길을 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추운 날씨를 버티기 위해 몸을 겹겹이 둘러 싸맨 노파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노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꽃다발 주위를 맴돌았다. 희끄무레하게 시야를 흐려놓는 입김이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노파가 내민 꽃다발의 상태는 그런 연출로도 감춰지지 못할 만큼 심각하게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에게 준다면 오히려 실례가 될 그런 꽃다발이었다.

죄송한데, 지금 돈이 없습니다.”

총각 애인 없어?”

노파는 히카르도가 애인이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노파의 말에 히카르도는 또 다시 대답을 망설여야했다. 그냥 무시하고 갈 길을 가버릴까. 길을 가다보면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길거리 상인들을 요즘 꽤 자주 만났다. 가게를 차리기에는 돈이 없지만 물건을 팔아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딱한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이런 꽃다발을 사줄 만큼 호락호락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히카르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없어요.”

아직 없다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나보구먼.”

아니, 그렇다기보단-”

그 사람한테 이걸 주면 소원성취 할거야. 한번 속는 셈치고 믿어봐.”

그걸 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 같은데. 히카르도는 이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어딜 봐도 시들기 일보직전인 꽃다발. 조합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손 가는대로 묶어버린 것 같은 모양새.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는 꽃다발이 아닌가. 히카르도는 한숨을 쉬었다.

얼만데요?”

고마워 총각. 축복이 함께 할게야.”

아직 산다는 얘기는 안 했는데 벌써 고맙다고 하니 무를 수도 없었다. 이미 가격을 물어봤을 때부터 귀찮으니 대충 사고 떼어내겠다는 결정을 내린 히카르도이긴 했지만 뻔뻔하게 웃고 있는 노파를 보니 심각하게 얕보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가지고 있는 돈 중에 최소한만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오늘 따라 운이 따라주지 않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동안 지폐가 한 장 팔락거리며 땅에 떨어졌다. 노파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움켜쥐더니 히카르도에게 시들어가는 꽃다발을 억지로 쥐어주고는 연신 축복을 빌며 제 집으로 가버렸다.

이건 뭐…….”

그래도 명색의 카모라에 소속되어 있는 신분인데 너무 허망하게 당했다. 이건 어디 가서 얘기할 수도 없는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아마 말했다간 바로 솔다토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한 히카르도였다. 그는 괜히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발걸음으로 길을 걸으면서 손에 쥐고 있는 이 문제의 골칫덩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했다. 가는 길에 쓰레기통이 있으면 바로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 오늘따라 길에 그 흔했던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길바닥에 버리는 것도 고려해보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돈을 주고 산 꽃다발인데 너무한 처사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길가에 흩뿌리기에는 내키지 않는 무언가가 히카르도를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히카르도 아냐?”

, 까미유?”

평소라면 아직 병원에 있을 시간이어서 설마 퇴근길에 맞닥뜨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퇴근하는 길도 달랐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까미유는 그의 손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손에 든 건 뭐야?”

아차. 히카르도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황급히 뒤로 숨겼다. 하지만 이미 까미유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본 것 같았고 뒤로 숨기는 행동은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버렸다.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뒤에 숨긴 것을 보기 위해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하지만 키가 비슷해서 잘 보이지 않자 재빨리 히카르도의 뒤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히카르도가 빨랐다. 팔을 잡고 비틀어보기도 하고 했지만 몇 번 시도해서 실패하자 까미유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로군.”

사실 보여줘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기껏해야 조금 비웃음사고 말 것이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얕보이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자신을 비웃는 걸 딱히 마음에 담아 두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까미유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제일 편한 상대인데 제일 숨기고 싶은 상대이기도 하다는 게 히카르도에게는 좀 혼란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이 자신의 안에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 생각인 것일까? 까미유는 아무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번 호기심이 생긴 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직성이 풀렸다.

까미유지금 뭐하는…….”

갑자기 까미유가 허리를 굽히더니 돌멩이를 몇 개 주워들었다. 설마 그걸 지금 자기한테 던질 생각인건가? 히카르도는 자신의 앞에서 여유 만만하게 웃고 있는 까미유를 보았다. 던질 자세를 취하는 게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그가 자신보다 전체적으로 힘이 약하긴 했지만 팔 힘만은 비등비등할 정도로 셌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던진 돌을 맞는다면 아마 적어도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거나.

걱정 마. 상처 입으면 바로 치료해 줄 테니까. ..

어릴 적에 살갑게 부르곤 하던 애칭을 이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입에 담는 그를 보며 히카르도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설마 던질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공기를 가로지르며 무언가가 그의 얼굴 옆을 지나갔다. , 하고 뒤에 있던 벽에 돌멩이가 부딪히면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까미유가 던질 채비를 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진 못했지만 벽이 깨졌든 돌멩이가 깨졌든 둘 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는 아쉽게 빗나갔군. 두 번째는 실수하지 않을 테지만.”

틀림없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상대를 보며 히카르도는 괜히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버린 사태를 누구를 탓해야할까 고민했다. 자신에게 시든 꽃다발을 판 노파일까? 아니면 괜히 까미유에게 꽃다발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어리석게 고집하고 있는 자신일까? 그것도 아니면 상대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을 기어코 보겠다고 돌팔매질까지 하는 까미유일까? 까미유가 차라리 그냥 보여달라고 애원, 아니 부탁 비슷하게라도 했다면 히카르도는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히카르도는 두 번째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가까스로 피했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아슬아슬했지만 모두 피했다. 하지만 점점 돌멩이가 날아오는 간격이 짧아졌고 피하는 것도 벅차오기 시작했다. 돌멩이가 이상하게 빠르다고 생각한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던지는 돌멩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잘 보니 그가 들고 있는 돌멩이에서 반딧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 피하네-라고 웃으면서 다음에 던질 돌멩이를 장전하고 있는 상대는 악마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열 번째로 날아오는 돌멩이에서 비로소 히카르도는 한계를 체감했다. 이건 확실히 맞는다. 정확히 얼굴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보며 히카르도는 다가올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야 그 볼품없는 꽃다발은. 겨우 그거 숨기려고 그런 거였어?”

맥이 빠진 것 같은 까미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카르도는 세게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분명히 돌멩이가 날아와서 맞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히카르도가 자신을 쳐다보자 까미유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바보야. 처음에 던진 것만 진짜 돌멩이고 나머진 연출이었어. 반딧불만 보냈는데 못 알아챘나보지?”

히카르도는 멍한 표정으로 방금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로 돌을 던질 때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그 다음부턴 들리지 않았다. 너무 빠르게 뭔가 날아오다 보니 피하느라 알아차릴 틈이 없었다. 그것도 다 까미유가 계산한 시나리오겠지만.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의 움직임은 본인이 의식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이용해 기어코 히카르도가 뒤에 숨긴 것을 알아낸 까미유는 나름 흡족한 표정으로 히카르도에게 다가왔다.

줘봐.”

?”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가져갔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가 관객들 앞에서 마술을 선보이기 위해 자신의 마술 모자를 다루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꽃다발 위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 죽어가던 꽃들이 다시 싱싱하게 되살아나 꽃을 피웠다. 시꺼멓게 시들어있을 때는 몰랐는데 전성기를 다시 되찾은 꽃다발은 매우 아름다웠다. 형형색색 자신의 자태와 색깔을 뽐내는 꽃들은 전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히카르도는 꽃이나 꽃꽂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꽃다발을 만든 사람의 솜씨와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까미유의 반딧불들이 꽃다발 주변에서 아롱거리며 꽃다발을 수놓고 있었다. 아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꽃다발이 어느덧 까미유의 손에 들려 있었다.

벌레의 회복 가속 원리가 꽃에도 듣긴 듣는군. 억지로 가속시킨 거라 계속 지속될 진 모르겠지만. 몰랐던 사실인데 덕분에 알게 됐어.”

까미유는 히카르도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

, . , 고맙다.”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편안한 향을 가진 꽃다발이었다. 아직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꽃다발은 연인에게 준다면 무엇보다 멋진 선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까미유!”

?”

히카르도는 잠시 망설였다. 눈앞의 상대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끌 순 없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내뱉은 말은, 그의 마음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 아니다. 아무것도.”

뭐야 싱겁게. 근데 그 꽃다발은 왜 산거지? 다 시든 건데.”

그냥…….”

또 못 지나치고 사줬군. 안 봐도 뻔하다.”

히카르도는 멋쩍게 웃었다. 글쎄, 자신은 까미유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마냥 마음이 여린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이 꽃다발, 사실 살 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노파와 입씨름을 하던 와중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사람의 얼굴이 있었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물론 꽃다발을 살 때는 그걸 그 사람에게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줄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히카르도는 꽃다발을 타고 올라오려고 하는 벌레들을 쫓아냈다.

이거, 집에 꽂아놓자.”

맘대로.”

무심하게 대답하곤 발걸음을 옮기는 까미유의 뒤를 히카르도가 따랐다. 그들이 추위를 피해 급하게 지나갔던 길에는 반딧불에 아롱진 꽃잎들이 하나, , , 넷 지나간 길을 수놓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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