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무슨 좋으신 일 있으셨나 봐요.”
슬며시 미소 짓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내 진료실을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였기 때문에 자주 마주치곤 했던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아마 노크를 하고 들어왔을 테지만 미처 듣지 못했다. 언제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를 짓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배려심 넘치고 사랑스럽고 항상 받는 것보다 많은 것을 주는 여성.
“그렇게 보이나요? 평소랑 같은 것 같은데.”
“그, 그런가요? 저는 그…왠지 평소보다 더 잘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물론 평소에도 자주 웃으시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평소보다 더 환한-”
“흠, 그래요? 저도 모르는 제 자신을 알고 계시다니 대단하신걸요, 미스 메디.”
“앗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도 모르게 그만…아는 척을……. 정말 죄송해요.”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한 명의 가녀린 여성을 보고서야 지금 내게 말을 거는 것은 히카르도가 아니라 그저 상처받기 쉬운 한명의 여린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녀석과 같이 있었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도 괜찮았을 너의 존재를 잠시 그리워했다는 것이 거슬렸다.
“메디,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누군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호감의 표시라고 하더라도 종종 간파 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내 감정을 지금 내보이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눈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의 손을 살며시 잡는 것은 그에 비해 도움이 되는 행동이겠지.
“나는 당신의 섬세함에 감사하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
나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책상에 놓여있던 달력에 표시해둔 빨간 동그라미가 그녀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용히 엎어놓았다.
빨간 동그라미
그녀가 나가고 나서 다시 세워놓은 달력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 날은 너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날. 그 날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자신을 과시하듯 선명하게 빛나는 빨간 동그라미를 보면서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물끄러미 쳐다보다보니 잠시 예전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 날은 너랑 처음 만난 날이다.”
히카르도의 달력에도 정확히 같은 날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나와 처음 만난 날이라면 아마 뒷골목에서 마주쳤던 이야기를 하는 것일 것이다. 상황은 어슴푸레하게 생각났지만 언젠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흠-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 걸.”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때는 바로 마음 속 말을 내뱉어도 돼서 편했는데. 비록 그 말로 너도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색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편했다. 쓸데없이 신경써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이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니, 은근 섬세한 걸 리키는.”
“벼, 별로 그렇진 않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걸지도.”
그래도 결국에는 간호사에게 했던 것처럼 너에게도 그런 말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과는 좀 더 다른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방금 전 그 간호사처럼 너도 상당히 쑥스러워했었지. 물론, 당연한 거지만 방금 전 간호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던 것과는 좀 더 다른 느낌이었다.
“선생님, 진료 보실 시간이에요. 환자분께서 오셨는데 들어오시게 할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달력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만 보고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다. 괜히 다른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꽤나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그와의 옛 추억이 유쾌하다기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그와의 옛 추억도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유쾌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재밌는 일도 많았고 어쩌면 죽는 순간 기억날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재밌는 부분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확히 같은 날짜에 같은 빨간 동그라미라도 너와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반대라는 점. 너의 빨간 동그라미는 나와 처음 만났던 날이었고 나의 빨간 동그라미는 너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라는 점. 너는 내가 떠나던 날 교도소에 있었고 밖에서 너를 보며 작별을 고했던 날 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이 날이 너에게는 너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이 항상 마음에 들어서 이 날은 특별했다. 같은 날, 전혀 다른 의미. 그것으로 너에게 온전히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환자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오로지 나일 것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환자를 부르러 가는 간호사의 등 뒤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안녕, 히카르도.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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