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설정과 코믹스 내용 있습니다

*한글자막을 토대로 했습니다(존대/반말).


최초의 미지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는 지정 룸메이트를 허용하고 있지 않았으며 자체 개발한 무작위 배정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숙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룸메이트에 대한 아무런 인적사항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방식으로 암암리에 있을 수 있는 소외를 최소화시킬 것이라고 믿었지만 생활 방식 차이로 인한 불만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실제로 스타플릿 기숙사는 첫 2주 동안 룸메이트 변경 신청을 하는 비율이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아카데미는 이러한 방식을 계속 고수할 것이라고 고지했다.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보안 시스템도 정기적으로 관리했다.

일부 혈기왕성한 생도들은 여태까지 룸메이트 정보를 미리 입수하는데 성공한 전적이 없다는 소문에 자극받아 해킹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보를 입수하고 데이터를 조작하려는 기발한 시도가 연례행사처럼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보안망을 뚫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이번 학기에도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정보를 얻는데 감수해야 할 위험에 비해 효용성이 크지 않아 애초에 시도하는 생도가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오래 사귄 친구나 심지어 연인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룸메이트가 될 진 알 수 없다며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입학생들도 룸메이트가 누군지는 미리 알 수 없었고 처음으로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흥미진진한 화젯거리로 소비되었다. 미지를 탐구하게 될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조우하게 되는 최초의 미지는 바로 같은 방을 쓰게 될 룸메이트였다.

최초의 미지는 무슨. 이미 미지의 요소는 수송선을 탈 때부터 수없이 있었는데. 레너드는 이런 과장된 관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면 동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어디든 기저에 깔려있는 심리는 비슷해 보였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레너드의 경우에는 그 최초의 미지가 시시하게 풀렸다. 지정받은 호실 방문 앞에서 재회한 제임스는 레너드를 보자마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마치 레너드가 자기 룸메이트일 줄 알았다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제 속은 완전히 괜찮아졌나 보네요.”

그러게.”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제임스는 여전히 존대를 했다. 분명히 수송선에 탔을 때 처음부터 반말을 했지만 꼬박꼬박 존대로 화답하는 상대도 간만이었다. 이런 상황도 이것대로 난감하긴 했다. 레너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할 말을 덧붙였다.

말은 편하게 해도 돼. 내가 먼저 반말을 했다는 건 얼마든지 네가 나한테 편하게 대해도 된단 뜻이라고.”

물론, 존대가 편하다면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레너드가 말하자 제임스는 전혀, 라고 말하며 다시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을 해서 언제 우리 만난 적 있었나 했었다니까.”

말로 내뱉지 않은 속뜻이 있는 것 같았지만 레너드는 묘한 느낌은 속으로 삼켰다. 혹시 일부러 일일이 예의를 차려 대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났지만 과한 추측은 그만두기로 했다. 방금 전에 웃을 땐 얌전해보였던 눈매가 이제는 좀 더 눈빛에 장난기가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너드는 제임스가 아무런 짐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짐은? 아직 안 찾아왔나? 수송선 아까 떠나던데?”

내 짐은 내 몸 뿐이야.”
설마. 레너드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반문하자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로 가져온 짐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스타플릿 기숙사에는 기본적인 생활용품은 다 구비되어 있어서 굳이 개인용품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문제는 없었지만 누구나 낯선 곳에 갈 때는 이유 없이 간직하고 싶은 낡은 물품 하나씩은 있지 않던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할지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안전선을 설정했고, 혹시 딱히 가져올 물품이 없을 만큼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너드도 그렇게 많은 물품을 싸들고 오진 않았다. 그는 앞서 보였던 반응을 무마하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 제일 무거운 건 챙겨왔네.”

나 그렇게 안 무거운데.”

여기 오면서 자기 체중보다 많이 나가는 걸 가져올 일이 뭐가 있겠어? 들어가자고. 언제까지 문 앞에 서 있을 순 없잖아.”

기숙사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쾌적했다. 하얗고 위생적으로 보이는 방이었다. 뾰족한 모서리가 없는 매끈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막 분사된 탈취제 냄새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레너드가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하학적인 구조를 한 가구들이 있었고 문 앞에 설치된 자동 센서등이 새로운 거주민을 환영하듯 깜박 켜졌다. 제임스는 들어오자마자 한 쪽 침대에 드러누웠기 때문에 레너드도 그 반대편 침대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이제 정말 스타플릿에 와버렸다. 돌아갈 기회는 항상 제공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다가 들었는데, 여기 지상직 근무도 가능하대.”

?”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아 딱딱해 보이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레너드가 고개를 들자 건너편 침대에 누워서 이쪽을 보고 있는 제임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말 편하게 침대에 파묻혀 있어서 레너드도 한 번 침대에 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들게 만들었다. 레너드는 곧 제임스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깨닫고 입으로 비죽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 스타플릿이 우주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 맞지만 지구에서도 할 일은 여전히 많겠지. 그래도 교과과정 동안 훈련도 하고 망할 비행선을 탈 확률은 일반인보다 확실히 올라가겠지만.”

근데 왜 비행하는 게 왜 무서운 거야?”

제임스는 레너드라면 초면에 묻지 않았을 질문을 망설임 없이 했다. 레너드는 이미 못 볼 꼴은 충분히 보여 버렸으니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하는 게 차라리 나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다쳤었어. 얼마나 아팠는지 그 뒤로 높은 곳은 질색하게 됐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제일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졌단 사실이었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올라탔던 가지가 말이야.”

그는 나무에서 한 번 떨어지고 나서부터 두 가지 공포를 떨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와 어떤 안전장치도 믿을 수 없는 공포는 서로를 견고하게 해주었다. 어렸을 때 이야기를 지금 상태에 맞춰 청승맞게 각색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다음 말까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 나뭇가지를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게 멍청했다는 결론은 냈지만. 그게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높은 곳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안전해 보이는 것도 서서히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게.”

애초에 확실한 게 있었던가. 감상에 젖은 레너드는 자신이 나무에서 떨어진 날 세상에 대한 순진한 믿음도 어느 정도는 같이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비슷한 과정을 경험했을 테다. 커가면서 그가 배운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믿음을 가장해서 최악의 결과를 피해가는 요령이었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점차 현재 의료기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을 맡으면서 그 믿음도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애초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은 우주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커가면서 배운 요령을 쓰는 방법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레너드는 굳이 사명감이라는 거창한 감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고 고민했다. 과감하게 나아가야 할 사명감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명감인지 실패에 대한 반항심인지도 헷갈렸다. 세세한 것까지 과민하게 쏘아붙이는 배우자에게 질린 파멜라가 떠나가고 그는 고민을 속 깊게 털어놓을 친구도 여태 없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 남아있는 지지대는 의사로서의 레너드뿐이었고 거기에 집착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만큼은 여태까지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해져야 했다.

그럼 여기 오게 된 계기는 뭔데?”

레너드는 거침없이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임스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복잡하고 긴 이야기야.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나만 얘기하는 기분인 걸?”

레너드의 말에 제임스는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건 사실이니까 그만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자기 얘길 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너드는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점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제임스가 입고 있던 웃옷의 목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피냐?”

레너드가 묻자 제임스도 방금 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러면서 제임스는 이미 지워지기에는 늦은 핏자국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이거. 그냥, 별 거 아냐. 코피가 좀 자주 나서.”

눈 밑이랑 코 주변에 보이는 건 타박상 같은데.”

그가 계속 캐묻자 제임스는 누운 채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는 시늉을 냈다.

알았어. 알겠다고. 사실 어제 술집에서 좀 싸웠어. 주먹이 오갔지만 잘 해결됐지.”

꽤 맞았나보군.”

아마 지금 표정을 살짝 바꾸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레너드가 덤덤한 표정으로 진단을 내리자 제임스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멋진 싸움이었어.”

제임스가 하는 말을 듣고 레너드는 미간을 구겼다. “멋진 싸움이라는 게 무슨 뜻인데?” 라고 그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팔짱을 낀 채 씨익 웃으며 말했다.

멋진 싸움이었다는 건 즉, 난 지지 않은 싸움이었다는 뜻이지. 지는 건 멋지지도 않고 재미도 없잖아. 난 지는 게 죽어도 싫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 레너드는 한층 더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느니 죽는 게 낫다, . 마음속으로 룸메이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레너드는 그제야 아직 최초의 미지가 완벽하게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타트렉 전력 참가글(16.09.24)

*미러버스/잔인한 묘사 주의

*본즈가 안전 강박이 있는 고문기술자를 겸직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내 이름을 불러

 

 

신분을 위장하고 잠입할 때 의사라는 직함이 내 안전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생명을 구하는 직업이라서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는다는 말은 안전한 생각이 아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서 일차적으로 가장 엄격하게 신분을 증명해내야 한다. 정적을 암살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제국에선 의사에게 거의 모든 개인정보를 제공할 것을 수시로 요구한다.

그래도 신분이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경우, 신뢰를 쌓을 기회는 훨씬 많이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의사의 직업적인 선택을 호감으로 착각하곤 한다. 싫어하는 사람을 이렇게 공을 들여 살려놓을 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은 일만큼 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을 고문하다 보면 사람을 살리는 법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임스 커크라는 문제적 인물과 엮이면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질리도록 익숙해졌다.

[이번에 말러 상원의원의 주치의가 되는데 성공했다고 들었는데. 중추신경접합 어쩌고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술 로봇으로도 힘든 그 빌어먹을 대장정을 거뜬히 해냈다고? 역시, 이것저것 고문해보면서 터득한 기술인가?]

통신기 너머로 들리는 그 놈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들 떠 있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그러긴 했다. 들 떠 있거나 분노하거나. 침잠해있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그 정도로 불안정했고 동시에 그 상태를 즐기는 녀석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어때? 의안을 끼고 흉터랑 찌푸린 눈썹 사이를 가려주는 인공 피부를 상판 위에 붙여놓으니까 나도 못 알아보겠던데. 아주 미인이 됐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쯤에서 적당히 찬물을 끼얹어주지 않으면 저 혼자 신나서 계속 떠들 것이다. 곧 회진이 있었고 말러 상원의원은 수술 후 경과에 관해 아주 세세하게 듣고 싶어 했다. 배후에 잠자코 있어야 할 사람과 오랜 시간 통화하는 행위는 분명 신분이 새어나갈 가능성을 높일 것이기에 그다지 안전하지 못했다. 애초에 제임스가 통신기로 연락한 목적은 불확실했다. 확실한 용건 없이 붕 뜬 것 같은 화제로 수다나 떠는 것은 사양하기로 했다.

분명히 해 두겠는데, 내가 했던 말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군.”

말러 상원의원이 병실에서 제국 외에 다른 세력과 접선한다는 소문을 캐내기 위해 제임스는 잠입수사를 계획했다. 말이 수사지 공식적인 효력은 없는 불법 행위다. 그 때 난 위험해지면 바로 발을 뺄 것이며, 혹시 사태가 더 안 좋게 돌아가면 네 정보를 팔아서라도 내 안위를 지킬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다.

[, 맥코이. 그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있나. 내가 그래서 널 사랑해. 매사에 계산적인 사람만큼 읽기 쉬운 이도 없거든.]

여전히 끊을 기색이 보이지 않아 한마디 하려던 찰나에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끊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붙잡지 않도록 하지. 난 내가 붙잡는 건 딱 질색이야. 내 이름만 한 번 불러주면 바로 끊지.]

?”

[내 이름을 불러.]

부탁이 아니라 사실상 명령이었다. 비공개적인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는 통신기로 연락하긴 했지만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 건 위기의식이 있어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 같았다. 끈질기고 의심하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도청이라도 하고 있다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잡게 된다. 여태까지 내 입으로 뱉은 말로는 대화 내용을 특정하기 힘들겠지만 이름을 말하는 순간 모든 안전장치는 소용없게 된다. 사실 제임스는 나를 위해 설치해놓은 안전장치를 완전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긴 했다.

진심인가?”

[난 언제나 진심이야. 아주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군. 멍청한 명령을 받고 말았지만 멍청함조차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며 내뱉는 이름자가.]

그는 언제나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더 중요한 사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게 내팽개치는 주제에 내가 그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받고 싶어 했다. 이번에도 그 고질병이 좋지 못한 시기에 도진 듯하다. 이럴 때는 특별히 정해진 답이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을 해주는 것만이 사태를 최대한 조용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차피 들킨다면 제임스가 더 크게 손해를 본다. 난 빠져나갈 구멍은 수없이 만들어두었다. 그가 언젠가 깔보듯이 말했던 것처럼 겁쟁이라서, 안전장치에 대한 안전장치는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얼마든지, 네가 듣고 싶다면 그깟 이름은 불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안전하지 못했다.

[끊어. 이 망할 놈아.]

통신기 너머로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신호가 끊겼다. 제임스와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날은 별 사건 없이 끝났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매일 다른 시간에 전화해서 자기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는 놈만 아니었다면 감정적으로 훨씬 수월한 나날을 보냈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소위 잠입수사가 이렇게 파탄나지도 않았으리라고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다.

로렌스 선생님, 아니. 본명은 레너드 호레이쇼 맥코이셨죠. 대체 자택에 그런 위험천만한 장치를 해 놓으신 연유가 무엇인지 심히 묻고 싶군요. 마치 누군가가 침입하는 걸 막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시다시피, 전 다소 안전에 대한 강박증이 있습니다. 그 정도 해놓지 않으면 불안하죠.”

의자에 묶인 채로 평온하게 준비해놓았던 말을 했다. 습하고 폐쇄된 공간은 하얗고 개방된 메디컬 베이보다 훨씬 익숙했다. 보아하니 상대는 이미 결정적인 증거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그는 병원에 있는 내 진료실 어딘가에 설치해놓았던 도청장치를 눈앞에 대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사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제임스 커크에게 어디까지 정보를 넘겼는지도 알아야 겠습니다. 물론 선생님께 선택권은 없습니다.”

얼굴에 달라붙어있던 인공 피부가 강제로 뜯겨지는 감각은 유쾌하지 못했다. 흉터가 진 눈 속으로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은 말할 것도 없다. 말러 상원의원이 고용한 것 같은 그 남자는 기어이 의안을 빼냈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녹음파일에는 내가 말하는 것만 녹음되어 있었다. 체콥이 설계한 통신망 보안은 역시 뚫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정말 듣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조바심을 내는 상대를 보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내 정체는 이미 완벽하게 발각되었다.

남자가 한 발자국 더 내 앞으로 다가왔을 때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폭발했다는 건 확실했고 남자가 고개를 돌리면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쓰러진 남자는 이마 정중앙에 페이저가 뿜어낸 에너지로 인한 화상을 입었다. 강도를 보아하니 죽이진 않고 기절시킨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제임스가 보라는 듯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내 앞에 서서 감상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내 맥코이로 돌아왔군.”

내가 들켰는지 어떻게 알았지?”

내가 매일 전화했었잖아.”

그렇군.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러는 분명 내가 하루에 한 번 제임스와 통화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철저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의원직을 지켜낼 수 있었다. 말러였다면 분명히 제임스가 전화했을 때 대신 받을 대타를 마련해놓았을 것이다.

내 통신기는 끌려 나올 때 압수당했어. 아마 대신 받았을 텐데?”

내 말을 듣자마자 제임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 부분을 물어봐주길 바랬다는 것처럼, 칭찬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어린애처럼 그는 또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대신 받았지. 목소리는 너랑 똑같이 변조해서 말이야. 그리고 그 멍청이는 내 이름을 불러주었지.”

제임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기절해있는 말러의 부하를 발로 툭툭 치며 서성거렸다. 이 지점에서 말을 멈춘 것으로 보아 여기가 칭찬받고 싶은 대목인 것 같았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여태까지 이름을 불러달라는 그의 요청을 끈질기게 거절하긴 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제임스가 포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허리를 숙였다.

가짜는 더욱 진짜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해. 진짜가 될 수 없는 가짜는 진짜를 질투하지. 그런데 상대가 마치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름을 물어왔어. 잠입한 상태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진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과 의심을 받는 것 중에 가짜는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진짜는 굳이 진짜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 당연히 멍청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처럼 그의 논리는 중요한 부분에서 모험을 했다.

허점투성이로군. 내가 시달린 나머지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가짜가 모험을 할 수도 있어.”

내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런 가짜는 본 적이 없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이 변하는 것도 본 적이 없어.”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라도 선언하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제임스는 포박을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슬며시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이 안전하지 못한 말에 반박하고 싶으면 내 이름을 불러.”

망할 녀석. 이 녀석은 결국 내가 자기 이름을 부르게 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네가 그 성긴 논리를 다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그의 이름을 부르고, 네가 좀 더 안전한 길을 가도록 반례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이건 본질적으로 그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의사가 직업적인 선택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어디까지나 그가 내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도록, 좀 더 오래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포박을 풀어주며 웃었다.

저 녀석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건 너한테 맡겨도 되겠지? 내가 너한테 마련해준 그 좁고 안전한 장소에서 불안에 떨 필요 없이 맘대로 해도 좋아.”

*프랭크(커크의 삼촌)가 폭력적인 대사를 합니다.

*IDW 코믹스 #17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비기닝 시점

 

 

치사하고 필사적인 위로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


  낮은 주파수로 흘러나오던 엔진 소음이 잦아들었고 몸이 약하게 뒤로 밀리는 느낌이 났다. 후보생과 붉은 옷을 입은 기존 생도들을 태운 수송선이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도착하면서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할 때 느껴지는 진동에 익숙한 생도들이 먼저 일어나더니 차례대로 줄을 섰다. 아직 사복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뒤를 쫓아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안전벨트 클립 부분이 문제없이 분리되었다면 제임스도 재빨리 우후라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는 아직 우후라의 이름이 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녹이라도 슬었는지 클립은 물린 부분이 잘 빠지지 않았고 결국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무게로 분리해냈다. 그는 벨트가 풀리자마자 딱딱한 자리에서 튕겨나갔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스타플릿도 장비 손 좀 봐야겠는걸. 안전장치는 조금 과도한 정도가 좋지만 제 때 분리되지 않는 것도 문제니까."

힘을 주느라 벌게진 손바닥을 못마땅하게 들여다보던 제임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레너드가 아직 옆자리에 앉아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제임스는 안전벨트를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모습을 그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자 새삼스럽게 귀가 뜨거워졌다.

"아직도 안 내리고 뭐해요?"

"속이 안 좋아서 일어서면 토할 것 같아. 좀 있다 내리려고."

침이 가득 고여 있는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레너드는 그가 말한 만큼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잔뜩 흘러내린 식은땀이 그의 속눈썹에 맺히면서 성가시게 달랑거리자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세게 감았다. 그 바람에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마치 눈물을 흘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오와에서 수송선이 출발할 때도 그는 비행공포증이 있다며 승무원과 언성을 높이며 신경전을 벌였다. 비행공포증이 스타플릿에 지원하는데 결격 사유는 되지 않았지만 적절한 치료와 극복을 위한 상담을 받은 뒤에도 효과가 없다면 아마 중도에 그만두게 될 것이다. 레너드가 승무원과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제임스는 주변에 앉아있던 생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무언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표정으로 보건대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제임스는 레너드의 지원 동기는 알지 못했다. 수송선이 출발하면서 레너드가 명상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 말도 없었으므로 대화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우주에서 활동하는 함선에 승선하는데 가장 부적합한 공포증이 있음에도 온 것을 보면 분명 그도 절박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제임스의 생각이었다.

"신속하게 하선해 주십시오! 아니면 다시 돌아갑니다."

"곧 내려요!"

밖에서 승무원이 독촉하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레너드를 보았다. 그는 딱히 제임스와 동행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대로 두고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제임스는 승무원이 다시 보채기 전에 내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너드는 아직 미동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일어서기 힘들면 부축이라도 해줄까요?"

"관둬. 그러다 정말 네 옷에 토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내려."

"그래도. 빨리 안 내리면 정말 돌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그냥 하는 말이야.”

레너드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미쳤던 걸지도 몰라. 내가 우주라니. 고작 지상에서 몇 피트 떨어지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데-"

"그래도."

중간에 레너드의 말허리를 잘랐다. 저지르고 보긴 했지만 제임스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 할 말은 금방 떠올랐다.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멋지기도 했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나가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우주에. 이렇게 바로 포기할 건가요?"

그 말에 레너드가 수송선이 출발한 뒤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침착했을 것 같은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 극심하게 시달렸던 불안감 때문인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흘린 땀 때문에 이마와 뺨에 눌어붙어 있었다. 제임스는 그를 보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긴 뭘요. 지금 이렇게 안 토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 제임스는 레너드가 짧게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음성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눈썹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느린 동작이긴 했지만 기어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임스가 벨트를 푸느라 고생했던 것과 다르게 그의 벨트는 부드럽게 풀렸다. 레너드는 잠시 서서 심호흡을 하더니 느리게 걸어나갔다. 제임스도 그의 뒤를 따라가며 혹시라도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할 경우 받쳐줄 준비를 했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고, 못마땅하지만 걱정되는 표정을 한 승무원이 그에게 안부를 묻자 레너드는 괜찮다며 지면에 발을 디뎠다. 그러더니 아직 수송선 입구에서 내리지 않은 제임스를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가 꼴찌야."

", 치사하게."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제임스는 황급히 수송선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레너드는 빠르게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빨라졌고 표정도 여유로워졌다. 제임스는 그가 보지 못하는 뒤에서 따라가면서 웃고 있었다. 지금 레너드를 보니, 혼자 남사스럽게 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겁에 질려 불안해하던 사람을 안정시키는 건 색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제임스가 스타플릿에 지원한 동기는 이 도전이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패한다면 재미없을 테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것이다. 재미로 스타플릿에 지원한 그는 아직 후보생이었지만 첫 임무를 배당받은 느낌이었다. 레너드가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졌다. 사실은 그가 포기할 거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던 다른 생도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이건 그가 스타플릿에 지원하는 시험을 쳐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프랭크 삼촌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시험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성적을 보고 그가 했던 말 때문에 제임스는 차라리 스타플릿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이크 함장이 찾아와서 지원해보라는 말을 할 때까지도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 실패한다면 프랭크가 얼마나 좋아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떨어졌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꼴사납게 실패하고 돌아올 거야. 알았냐, 이 문제덩어리야. 너 같은 정신머리로 가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니가 그렇게 대단한 놈인 줄 아냐? 너보다 잘난 놈들이 널리고 널렸어! 알았으면 가서 내가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해.”

프랭크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에게 제임스는 미친 것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문제아였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제임스가 자신감이 과잉되어 있으며 오만불손하고 제멋대로라고 시시때때로 폭언을 퍼부었다. 제임스를 통제하고 기를 꺾기위해 그가 항상 꺼내는 말은 넌 실패할 거라는 말이었다. 어쩌다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면 그는 이때라는 듯 조롱과 멸시가 섞인 말을 몇 달 동안 해댔다. 제임스는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당연히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처럼 싫었다.

제임스는 레너드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이상하게 그와는 한 배를 탄 것처럼 동질감이 들었다. 과연 그는 비행공포증을 이겨내고 스타플릿에 남을 수 있을까? 그게 단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진심이 되어버렸다. 그가 당연히 실패하는 게 보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위로를 건네어버렸다.

 

*레너드 호레이쇼 맥코이


수송선이 출발하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심혈관 질환은 병력이 없었고 지금 같은 조건에서 심근이 터질 리 없다는 사실은 레너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불안감이 치솟았다. 비이성적인 공포심이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속으로 몇 번이나 비논리적이라고 외쳤지만 마구 날뛰기 시작한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레너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차라리 차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웅웅거리는 낮은 엔진소리를 지면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로 세뇌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평화롭고 싱그러운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의 두 발은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 운전석 아래에서 페달을 밟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지금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니까 차라리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상정하는 게 나을지도. 그게 현재 상태와 일치해서 몰입하기 더 쉬웠다. 레너드는 다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광경을 바꾸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금속끼리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고 가까스로 진정시켰던 레너드의 경고등을 다시 점등시켰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화들짝 몸을 떨면서 감고 있던 눈을 떠버렸다. 레너드는 그제야 수송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송선은 멈춰있었고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 휑한 공간에 단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 꼴사납게 놀라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제임스라는 사람이 손으로 무언가를 거칠게 흔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너드는 상대가 손에 쥐고 있는 물체가 풀리지 않는 안전벨트 버클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도 예전에 클립 부분이 빠지지 않아서 비슷한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었고 해결방법도 알고 있었다. 스타플릿에서 쓰이는 벨트에도 먹힐지 몰랐지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그는 나지막하게 제임스를 불렀다.

이봐.”

레너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제임스는 결국 허공에 대고 몸을 이리저리 치고받기 시작했다. 애초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열중해서 주변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레너드가 다시 말을 걸려고 목을 가다듬었을 때 안전벨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풀렸다. 가슴팍을 잡아주던 끈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임스는 앞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훌륭한 동작으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

"스타플릿도 장비 손 좀 봐야겠는걸. 안전장치는 조금 과한 정도가 좋지만 제 때 분리되지 않는 것도 문제니까.“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인지 방금 전과 똑같은 음성으로 말했는데도 제임스가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마치 옆에 사람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람처럼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직도 안 내리고 뭐해요?”

속이 안 좋아서 일어서면 토할 것 같아. 좀 있다 내리려고.”

과도하게 긴장하고 나면 속이 뒤집어졌다. 수송선이 멈췄단 사실을 깨달은 뒤로 두근거리는 증상은 잦아들고 있었지만 아직도 식은땀이 흘렀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제임스가 말하자마자 밖에서 승무원이 큰 소리로 하선을 독촉했다. 빌어먹을, 조금만 기다려주면 덧나나. 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레너드는 너무 밀어붙이는 것 같은 승무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리지 않는 후보생을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권한이 밖에 서 있는 승무원에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일어서면 정말 토할지도 몰랐다. 그는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옆에 계속 서있던 제임스가 소리를 질렀다.

곧 내려요!”

난 아직 내릴 생각이 없는데.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제임스가 배려해준 것을 쓸데없는 참견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제임스는 대신 대답해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장 일어서기 힘들면 부축이라도 해줄까요?“

레너드는 제임스가 정이 많은 성격이라고 짐작했다. 아직 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단지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사람일 뿐인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 싫어하지 않는다. 그게 과도할지라도 최소한 냉혈한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친절에 섬세하게 화답할 만한 여유가 그에게 없었다.

"관둬. 그러다 정말 네 옷에 토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내려."

"그래도. 빨리 안 내리면 정말 돌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그냥 하는 말이야.”

레너드는 제임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혹시라도 그 승무원이 귀환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해버렸다. 만약 그 승무원이 당신은 힘들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았다. 적어도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기 일처럼 곤혹스러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레너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다음처럼 말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미쳤던 걸지도 몰라. 내가 우주라니. 고작 지상에서 몇 피트 떨어지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데-“

그래도.”

중간에 제임스가 말을 잘랐다. 레너드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제임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거의 초면인 사람이 하던 말을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기도 전에 자를 정도로 무엇이 그렇게 듣기 싫었던 것일까. 제임스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나가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우주에. 이렇게 바로 포기할 건가요?”

제임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하나도 맞는 말이 없었다. 레너드는 재밌을 것 같아서 스타플릿에 지원한 것도 아니었고 우주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웬만하면 중력이 잡아주는 땅에 붙어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구의 지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의료적인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고 싶었던 레너드였다. 하지만 그는 곧잘 한계에 부딪혔다. 인류가 앓던 질병은 현대 의료기술로 대부분 완치될 수 있었지만,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은 항상 새로 발견됐다. 언젠가 치료법이 생기긴 했지만 일부 질환은 기약이 없었다. 그에 비해 우주는 새로운 치료제와 치료법이 발견되어 미래를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올 수 있는 기회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굳이 그가 우주에 나가서 새로운 치료법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스타플릿에는 레너드 말고도 재능과 신념이 있고 비행공포증은 없는 의사가 많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치료하던 환자가 끝내 세상을 떠났고 배우자도 그의 곁을 떠났다. 지구에서 그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만약 지구에 머무는 데 집착하지 않고 우주에 나가서, 지구에 있는 것들로 치료할 수 없었던 환자에 대한 특정 치료법을 찾는데 애썼다면 그 환자는 죽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며 부부생활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자주 다투었던 배우자도 곁에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레너드는 가지 못했던 길을 탓하다가 충동적으로 스타플릿에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추락사고 때문에 생긴 비행공포증은 지원서를 낸다고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위로하는데 실패한 제임스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레너드는 화풀이로 그에게 짜증이라도 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느라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속도 모른다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쉬웠지만 이제 막 통성명을 한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긴 뭘요. 지금 이렇게 안 토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 역시 저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레너드는 그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까지 그에게 용기를 보채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포기하는 게 나을 때도 있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니 맞았다. 여태까지 그는 비행하는 물체에 탔을 때 매번 토했지만 이번에는 토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구토감을 참는데 성공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나아져서 안전벨트를 풀 힘이 생겼다. 지면에 내리고 나니까 기분은 훨씬 좋아졌다. 승무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안부를 위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고, 계속 옆에서 서성거리던 남자에게 농담을 할 기운도 생겼다. 레너드는 제임스에게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눈짓을 보냈다.

"네가 꼴찌야."

", 치사하게.“

치사하긴. 그래, 치사하긴 하지. 끝까지 들러붙어서 완강하게 포기하지 못하게 하고 기어코 날 내리게 한 네가. 레너드는 문득 떠오른 반론에 속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제임스가 뒤에서 급하게 쫓아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욘드 스포가 있습니다(16.09.10 전력 참가 글)

귀환을 가장 기뻐할 사람

 

 

스타베이스 요크타운은 함선이 정박하는 우주정거장이었지만 중장기형 거주지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지구를 비롯한 다른 연방 행성들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놓았다. 원래대로라면 대기층을 통과하는 태양광선이 산란되며 만들어졌을 푸른 하늘이 영리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인공적으로 생성된 중력은 지구를 기준으로 조절되고 있었고 지면을 밟을 때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테라포밍(Terraforming)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젠 굳이 지구에 있지 않더라도 유사한 환경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다.

[요크타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드러운 기계음성이 갖가지 언어로 방금 도착한 승무원들을 환영했다. 막 승강장을 빠져나온 레너드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고드름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유리로 된 천장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장관이었지만 그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레너드는 옷을 갈아입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요크타운 승강장과 그 주변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스노우 글로브 안에 갇힌 기분이 어때, 본즈?”

누가 어깨에 손을 얹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니 제임스가 익숙한 얼굴로 이죽거리고 있었다. 레너드는 스타플릿 계급장이 달린 노란 셔츠나 어깨가 뻣뻣한 제복이 아니라 편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제임스를 간만에 보았다.

건물들이 너무 아슬아슬해 보여.”

레너드가 굳이 이런 지형으로 기지를 만들어야 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는 테라포밍이나 기지 건축에 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감을 사방으로 표출했다. 제임스도 머리 위에 붙어있는 건물들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레너드는 곧 제임스가 짧게 탄성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저렇게 붙어있을 수 있다니, 멋진걸.”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레너드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자 제임스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북적거리던 승강장에서 떨어져있는 한적한 테라스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나란히 걸으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레너드는 곧 제임스가 구경하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요즘 제임스가 유난히 말수가 적어진 것 같다고 느꼈고 실제로도 줄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신과 전문의는 아니었지만 근래 느껴지는 제임스의 침울함이 우주 생활을 오래하면서 생긴 우울감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우주 탐사선에서 우울증은 흔하게 발병하는 질환이었다.

생명체가 희소한 우주를 떠돌아다니다보면 레너드도 이따금씩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수평선이 없는 우주에서 탐사 활동을 할수록 끝이 보이기보다는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억지로라도 계속 머릿속에 주입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함에 수시로 압도되고, ‘라는 존재가 중심이 되었던 세계는 붕괴되며, 살아있다는 감각조차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생생했던 감각이 무뎌지게 된다. 이로 인한 자아 정체성 상실이 끝없이 무언가의 이유를 생각하게 만들고 답을 찾는데 실패하면 우울감에 빠져든다. 레너드는 메드베이에서 이런 종류의 정신적 피로와 탈진을 호소하는 승무원을 몇 명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가 그들과 비슷한 상태에 돌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따로 말하진 않았다. 정면으로 물으면 부정할 게 뻔했다. 오랜 침묵에 지친 레너드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이봐 본즈. 혹시 아직도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 넌 방금 내가 간절하게 빌던 소원 중 하나를 정확하게 짚어냈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레너드를 보며 제임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에 비해 레너드는 제임스가 웃는 표정을 보더니 도리어 표정을 굳혔다.

잠깐. 혹시 탐사를 중단하고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야?”

아니,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그보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허를 찔린 듯 당황하며 재빨리 수습하려는 제임스였다. 그런 그를 딱하게 바라보며 레너드는 짧게 혀를 찼다.

너 표정에 다 보여.”

이제 안면근육 움직임으로 생각까지 간파해내는 거야? 아무리 네가 실력 있는 의사라지만 초능력자는 아니잖아. 그건 불가능할걸.”

평소에 레너드가 하던 대사를 이번에는 제임스가 했다. 레너드는 한가한 테라스에서 서성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제임스를 마주보았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한 제임스는 새파랗던 눈이 조금 바래보였다.

.”

레너드는 승강장에서 스팍과 헤어진 뒤 제임스를 찾았다. 그러다가 아주 오랜만에 상봉한 술루 가족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제임스를 발견했다. 유난히 그들의 등 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제임스는 그 때도 지금처럼 아슬아슬하게 웃고 있었다. 그 때 당장 말을 걸기 보단 탈의실로 와서 주변을 돌아다녔다. 어차피 그도 이 쪽으로 올 테니까.

, 만약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면 가장 기뻐할 사람이 나라는 건 알고 있겠지?”

우주가 위험천만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레너드였다. 제임스는 조금 망설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거기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다니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레너드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여태 자신이 해왔던 발언이 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임스와 오랫동안 우주 생활을 하면서 그도 생각이 사소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지금은 족했다. 조용히 곪아가고 있을 지도 모를 그의 속내로 파고들기에 가장 적절한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럼 나한테 얘기해봐. 최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눈 똑바로 보고.”

레너드, 넌 진짜-, 모르겠다.”

약간 짜증스럽게 웃는 제임스를 보며 레너드는 씁쓸하게 웃어주었다. 그는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웃는 것은 잘 하지 못했지만 제임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서성거리던 제임스는 무언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곧게 뻗어있는 그의 목울대를 타고 침이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꽤나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던 제임스는 이내 다시 레너드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여기선 안 돼. 말은 해 줄 수 있는데, 생각이 잘 정리가 안돼서. 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다면, 오늘, 같이 있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어차피 갈 데도 딱히 없는걸.”

딱히 갈 데가 없다. 레너드는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게 좀 슬펐다. 이혼한 뒤 지구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그다지 유쾌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지구를 뒤로 하고 우주로 떠날 때 그는 다른 사람보다 희생할 것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미약한 감정이었지만 해방되는 느낌도 들었다. 비행 공포증은 이겨내기 힘든 장애물이었지만 어떻게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초반에는 이런 해방감이 동력이었다. 하지만 우주로 떠나오면서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레너드는 제임스도 막대한 희생을 하고 신념에 불타며 스타플릿에 들어온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모든 사람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들어올 필요는 없었고 적당히 가벼운 태도가 제임스의 장점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게 지금에 와서는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가 엔터프라이즈호 함장으로서 우주 탐사에 쏟고 있는 열정과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헌신을 생각한다면 점점 그렇게 노력해야할 이유를 찾게 될 것이다. 다른 승무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제임스는 그 노력의 이유를 찾는데 더 고생할 것이다. 그가 스타플릿에 지원한 이유는 가장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 기억을 샅샅이 헤집어놓은 다음에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레너드는 그 과정에서 만약 제임스가 열정이 식어버린다고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를 믿고 여기까지 온 승무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결정을 한다고 해도 그의 편에 서 줄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엔터프라이즈호는 다른 함장과 함께 계속 탐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귀환한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아니었던가. 레너드는 그러한 입지에 서 있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제임스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오해받는 것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그 오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생각을 정한 레너드와 별개로 제임스는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크타운에 정박하는 건 잘 된 일이었다. 앞으로 별 일이 없길 바라며 레너드는 제임스의 어깨를 감싸 쥐었고 제임스는 그런 레너드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마주보고 있던 둘은 다시 나란히 서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016.09.03 전력 참가 글

 

넘겨짚는 거짓말

 

우주는 질병과 위험의 온상이야

-레너드 맥코이-

 

레너드는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본 적은 많았지만 저 어둡고 조용한 곳을 동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이 있다면 굳이 후자를 선택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레너드가 서른이 넘도록 살면서 굳어진 인생관이었다. 스타플릿에서 고작 삼 년을 보내며 미지의 가능성이 얼마나 매혹적일 수 있는지 학습한다고 해도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를 타고 오 년 탐사를 떠나고 일 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우주를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레너드와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였다. 레너드가 그에 관해서 할 말은 많았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피곤할 정도로 많았지만 레너드의 마음속에서 거칠게 맴도는 그 아우성들은 짜증스러운 말 몇 마디로만 표출되곤 했다.

맙소사, !”

레너드가 함선에 의학 장교(CMO)로 승선하고 나서 벌써 몇 번이나 이 말을 했는진 모르겠다. 적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다음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스콧과 스팍이 데려온 제임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스콧이 스팍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정말 사고였어요! 누구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레너드는 스콧이 한 말 만으로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어 스팍에게 시선을 주었다. 스팍은 설명을 요구하는 레너드의 사나운 눈빛에는 익숙해졌기 때문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롭게 발견한 행성에서 탐사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 문제없이 트랜스포터를 이용해 함선으로 돌아왔을 테지만 마지막 1초 전에 토착생물이 거의 에너지화된 함장님의 몸에 뛰어들었고 놀라서 몸을 트는 바람에 좌표가 미미하게 바뀌었죠. 그래서-”

그래서 이 꼴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거야? 전송 중에 그 정체도 모르는 토착생물이랑 짐이 섞여버렸다고?”

스팍은 레너드가 말을 끊고 중간에 끼어드는 것도 익숙했으므로 평소처럼 대화를 마무리했다.

적확합니다.”

망할.”

레너드는 항상 확신할 수 있었다. 우주는 질병과 위험의 온상이라서 웬만하면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하지만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우주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과 격한 사랑에 빠졌다. 제임스는 아마 질병과 위험은 그 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시련이나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험한 성취감을 아주 좋아했다. 그 결과가 트랜스포트하는 도중에 갑자기 뛰어든 토착생물과 섞여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리는 참상이다. 부슬부슬한 금발 사이로 억센 털이 잔뜩 박힌 뿔이 두세 개 보였고 세 개의 손가락만 남은 손바닥은 그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을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코는 쥐처럼 길쭉하게 솟아나오고 그 바람에 눈 사이 거리가 멀어졌다. 레너드는 그래도 말은 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토착생물과 섞여버린 제임스가 입을 여는 순간 그 가능성도 포기했다. 아무래도 발성기관까지 바뀐 것 같았고 몸 내부에 있는 장기는 어떤 상태일지 스캐너를 대 보기 전까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너드가 입을 굳게 다물고 제임스의 전신을 스캔하는 동안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의학적 소견을 묻고 싶군요. 함장님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스캔을 마친 레너드는 지금이라도 지나치게 침착한 벌칸에게 주먹을 날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스팍은 지금까지 행동패턴으로 보건대 그가 그러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레너드는 깊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아니. 내부 장기도 뒤바뀐 상태에서 면역 기능이 발작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시스템이라 수술을 한다 해도 극히 위험해. 장기 자체는 새로 배양해서 인간의 것으로 바꿀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함선 내 설비만으론 부족하고. 제일 또 걱정되는 건 뇌 쪽이야. 외상은 당장 관찰되지 않지만 신경망이 서로 섞이거나 세포가 바뀌었을 경우 시간이 흐르면서 심각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지금 일단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생체기능을 잠시 정지시킨 다음에-”

제가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번에는 스콧이 레너드의 말을 끊었다. 그는 스팍과 레너드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과감해질 때였다.

, 제가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몇 번 목격했었는데. 자세한 건 묻지 마십쇼. 어쨌든, 그 때 이런 사고를 대비해서 짜 둔 코드가 있어요. 그걸 사용하면 재에너지화 시킨 뒤에 다시 함장님과 그 뭔지 모를 생명체를 구별해내는 게 가능합니다, .”

다만?”

스콧은 지금부터가 어려운 국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확인해보니까, 모든 에너지가 전송된 게 아니에요. 아직 행성에 남아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중간에 날아가 버린 걸지도 모르지만요. 물론 지금 상태로도 함장님만 분리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그럼 빈 부분을 메꾸기가 힘들어요. 누가 다시 저기로 내려가서 함장님과 뒤바뀐 그 놈을 잡아와야 합니다. 일단 다시 섞어서 분리한다 쳐도 원본이 모두 있어야죠. 아직 그 놈이 있다면, 말이지만요.”

레너드는 대놓고 난감한 표정이 되었고 스팍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지금 그 행성에 다시 내려갔을 때 그 생명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이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지리도 특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행성에서 그 자그마한 생물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명체가 여전히 살아있으리라는 사실조차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 때 갑자기 제임스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레너드의 목을 폭 감싸 쥐며 끌어안았다. 얼굴을 밀착한 채 비벼대는 바람에 당황한 레너드가 몸이 굳어버린 사이 스콧이 조용히 말했다.

일단 여전히 의학 장교님을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레너드가 농담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스팍이 끼어들었다.

그보다는 귀를 찾고 있는 것 같군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글 쓰는 방법은 아직 아실지도 모르니까 기기를 준비해보는 게 좋겠군요. 동시에 언어분석기도 돌리는 게 좋겠습니다.”

벌칸은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건 제일 마지막 수단으로 하고 싶군요.”

알았어. 뭐든 제발, 부탁해.”

레너드는 거의 목을 조르려고 하는 것처럼 안겨오는 제임스를 겨우 떼어내며 말했다. 글을 적을 수 있는 기기는 금방 준비되었다. 다행히 제임스는 그 기기의 사용법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적어내린 첫 줄은 다음과 같았다.

[같이 내려가자 본즈!]

레너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제임스와 기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제임스가 계속해서 기기에 문장을 입력해나갔다.

[내가 그 놈이 어디 사는지 알아. 아마 전송되면서 기억이 일부 섞였나봐.]

레너드는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섞였다는 건 일단 뇌세포에도 잘못된 트랜스포트로 인한 부작용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철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를 보고 레너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일단 떠오르는 말부터 하기로 했다.

잠깐 짐. 내가 거기로 내려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난 니비루 때 이후로 절대 그런 곳엔 안 가기로 했다고.”

레너드는 제임스가 계속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더 말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묘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 의사야. 거기 가봤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그 토착생물을 수거해오는 임무에 관해서 나보다 더 쓸 만한 사람들이 이 함선에 널리고 널렸어.”

[너 아니면 안 돼. 네가 꼭 필요해 레너드.]

간절하다 못해 애원하다시피 문장을 써내려가는 제임스를 레너드는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한 일이었지만 니비루 행성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그는 현장 탐사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시간이 흐른 뒤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때 일만 생각해도 속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안 돼. 나도 안 된다고. 왜 억지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안 돼. 내가 안 간다고 상황이 악화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지는 거잖아.”

제임스는 한 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레너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시 기기에 무서운 속도로 문장이 쓰이기 시작했다.

[레너드 맥코이]

레너드는 제임스가 이름을 완전하게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문장은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난 그 행성에서 살고 있던 그랑이다. 지금 네 놈의 함장이라는 놈 몸을 내가 조종하고 있지. , 아니 트 뭐시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 녀석 기억을 헤집어 보는 것도 꽤 재밌더라. , 그러다가 알았는데 너 참 실력 좋은 의사라며? , 아니 짐이라는 의사는 처음 보는 생물도 고칠 수 있다지? 말이 엄청 많더라고. 이 놈 머릿속에. 그리고 아픈 그, 뭐냐. 그거. 그래! 단어가 지금 생각났어! 생명은 꼭 구해줘야 하는 게 의사잖아? 지금 나랑 같이 살고있는 그랑 하나가 많이 아프다.]

레너드는 스팍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스팍도 말을 아꼈다. 레너드 자신은 그랑이라는 생명체가 제임스의 기억을 읽고 몸을 조종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능성은 적었지만 레너드는 그 작은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와 제임스는 아주 닮았다. 일단 레너드는 손으로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네가, 지금 그랑이라는 생명체라고? 그래 그렇다 치자. 하지만 네가 아직 그 놈 기억을 다 못 뒤져서 모르는 것 같은데 난 일단 짐이 아니라 맥코이고 죽어도 이상한 행성에 내려가고 싶지 않아하는 의사인데-”

[네가 내 가족을 구해주지 않는다면 난 이 제임스라는 놈을 죽여버리겠어.]

잔뜩 성난 것 같은 문장이 쓰였다. 레너드는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문장이 반짝거리고 있는 기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스콧에게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침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밑으로 내려가게 준비 좀 해줘요.”

행성으로 전송되자마자 제임스의 모습을 한 그랑은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전혀 해로워 보이지 않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생명체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행히 산소로 호흡하는 생명체였고 인간과 크기도 비슷해서 레너드는 좀 더 쉽게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죽어가던 그랑 옆에서 조심스럽게 제임스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다른 그랑을 볼 수 있었다. 그 그랑은 제임스의 코를 달고 손과 발이 인간의 것이었다. 저 그랑의 몸 안 쪽에는 아마 제임스가 갇혀있을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생명체 몸에 갇혀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레너드는 당장 그랑의 상태부터 검사해보고 싶었지만 그 전에 급한 쪽부터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제 다 됐어. 곧 있으면 완전히 회복할거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임스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레너드는 너무 익숙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제임스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이젠 약속한 것을 받아낼 차례였다. 그는 제임스와 그랑 하나를 데리고 귀환했고 스콧의 분해 방정식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제임스와 그랑은 깔끔하게 분리되었고 각자 원래 있어야할 곳으로 전송되었다. 제임스는 상태 점검을 위해 곧장 메디컬 베이로 옮겨졌고 레너드가 그를 담당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레너드는 조용히 제임스에게 다가와 침대 옆에 서서 물었다. 그는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이봐 짐. 너 정말 괜찮아? 모니터에는 다 정상이라고 표시되지만 네 생각도 듣고 싶어서 묻는 거야.”

본즈. 난 괜찮아.”

그래? 그럼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자.”

제임스는 갑자기 침대 옆이 푹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레너드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사에 진지한 그 남자는 언제나처럼 조금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랑이라는 그 생물이랑 잠시 정신이 바뀌었다는 거 정말이야?”

무슨 말이야?”

레너드는 좀 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맞추었다. 제임스는 코끝에 그의 숨결이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팍이 그러던데. 네 몸을 차지하고 있던 그랑이 썼던 문장 앞부분만 읽어보면 난, , , , , 말이라는 말이 된다고. 이거 우연치고 참 기묘하지 않아?”

제임스는 그 말을 듣고 레너드를 향해 픽 웃어버렸다.

그러게. 우연치곤 참 기묘하다, 그치? 우주는 참 신기한 곳이야.”

농담하는 거 아냐. 난 지금 진지해.”

제임스는 레너드가 그에게서 멀어지더니 그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조금 뜨거웠다.

네가 만약 그 아픈 그랑인가 뭔가를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고, 억지를 부려서 굳이 날 그 행성으로 끌고 내려갔다고 해도 용서할 생각이야. 할 말은 정말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있어. 스팍 말로는 그 곳에 내려갔어도 위험한 일은 없었을 행성이라고 하니까. 어쩌면 니비루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행성에 내려가는 걸 지나치게 꺼려하는 날 설득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하고 한 일일지도 모르지. 넌 그런 게 가능한 녀석이니까. 내가 넘겨짚은 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들어. 원래 동기가 뭐든 간에 난 네가 위험해지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함장이면 굳이 현장에 나가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도 없잖아. 그런데도 네가 굳이 가는 걸 난 의학 장교로서 말리고 싶었지만 자주 참았어. 네가 나와는 달라서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그래도 가끔은 말이지. 널 보내고 나서 내가 무슨 심정이었을지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내 입장에서도 좀 생각해달란 말이야.”

제임스는 레너드의 손이 이마를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일하러 돌아가겠다는 레너드를 보며 제임스는 슬며시 웃어주었다. 그는 근무 시간이 끝나서 지금 할 일이 없을 테지만 제임스는 붙잡지 못했다. 왠지 지금 돌아선 레너드의 표정을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연령가/소설본/떡제본/60p 내외/6000원

쌍둥이 형제는 1분 차이로 형과 동생이 나뉘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걷고 싶어하지만
매번 앞서 나가는 형과 비교당하는 것이 싫었던 마커스

어느 날 그에게 다니엘을 추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스팁다니 기반으로 진행되는 로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마커스가 다니엘과 일란성 쌍둥이이며 형사라는 동인 설정이 있습니다*

*자작 인물이 등장합니다*

*커플링 성향은 옅습니다*

*퇴고 시 목차 제목 및 문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용 변화는 없습니다*


목차

 

프롤로그. 양보했던 아이

1. 운 나쁘게 찾아온 기회

2. 통화 중에 얼굴은 보지 못한다

3. 복수하는 혈계의 권속

4. 심야 통화

5. 거울에 비치지 않는 세계

6. 한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

에필로그. 배타적인 위로


침묵의 이유

 

 

이 일에 관해서는 당분간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었다. 침묵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뤄왔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다. 결핵 환자들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격리 병동을 운영하던 방식에 관해서도 자유롭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요청한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사라 로저스라는 인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열성적인 학자가 몇 번이고 설득하기 위해 전화를 해 준 탓이다. 그가 원하는 인터뷰는 대부분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 지금은 캡틴 아메리카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라의 아들과 사라의 관계에 관해서였다.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였다는 사실도 연락을 받은 후에야 알았기 때문에 믿기 힘들다는 말을 몇 번이고 연발했던 기억이 난다. 놀라움 속에서 여차저차 인터뷰에 응하긴 했지만 사라가 아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피상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병약한 아들을 잘 신경써주던 자상한 어머니로 인물에 관한 틀이 잡히자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은 만족한 것 같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내가 아는 사라에 관해서 잘 말하지 못한 느낌이라 찝찝해졌다. 결국 인터뷰를 했던 탓에 나는 일기장을 펼쳐들고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일과 내 죄책감에 관해서 써내려가기로 했다. 일기장인 내가 죽은 뒤 적어도 가족들에게는 공개될 예정이다.

사라 로저스는 훌륭한 간호사였다. 여느 자서전 축사에나 나올 법한 문장을 쓰는 건 부끄럽다. 사라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일의 결말을 생각해 봤을 때, 모든 면에서 민감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래도 난 사라가 훌륭한 간호사라고 생각했고 그 작은 몸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행동력을 동경하거나 때로는 의지했다. 결핵 병동에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당시만 해도 결핵은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는 불치병이었고 환자들은 식단 조절과 규칙적인 생활, 충분한 휴식과 같은 처방을 받았을 뿐이었다. 잘 알고 있겠지만 결핵은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어서 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건 배짱이 필요한 일이었다. 꼭 필요한 접촉만 하다 보니 환자들이 불편을 호소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다들 알고 있었지만 감염방지절차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간호사는 사라가 제일 두드러졌다. 아마 다른 간호사나 의사들도 그런 사람이 몇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교적이지 못해서 인간관계 폭이 좁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쩌다 친분이 생긴 사라가 제일 잘 보였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내가 아는 좁은 세계에서 제일 잘 보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가 결핵에 전염됐다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확인됐을 때 난 마치 이정표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환자들은 최근 로저스 부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주 물어왔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요즘 사라의 병약한 아들이 많이 아파서 못 나오고 있어요.”였다. 여기서 왜 굳이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사적인 영역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유도 있었다. 당시에 병동에서는 병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죽음에 관해 말하는 건 금기시되어 있었다. 고통이나 불행에 관해서는 절대 언급하면 안 됐다. 환자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야했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병동은 인위적으로 완성된 바른 마음가짐으로 넘쳐났다. 만약 사라가 결핵에 감염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병동에서 기껏 완성해놓은 긍정적인 분위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환자들 중에는 사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라의 불행은 그래서 표현할 수 없는 금기가 되었고 이 점은 내게 한동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사라는 병동에서 긍정성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인물이었는데 그 때문에 사라의 불행은 입에 올리지 못할 주제가 되었다.

나중에 이 글을 읽은 누군가는 사라의 아들이 아프다고 말한 것도 그럼 실수한 것 아니냐고 지적할 수도 있다.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이의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건 마무리였다. 사라의 아들이 아프다고 말 한 뒤에는, “최근에 상태가 정말 많이 호전돼서 이젠 뛰어다닐 수도 있대요! 원래 천식이 심했거든요.”라며 덧붙였다. 회복에 대한 미담은 병동에서 언제나 환영받았다. 이제 열여덟이 되었을 사라의 아들, 스티브가 선천적으로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언뜻 들은 바가 있었고 난 그 사실을 이용해 사라가 처한 불행한 상황을 숨기고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내가 환자들을 안심시키는 동안 사라는 개인실에 격리되어 있었다. 개인실이라는 명칭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사실은 보여주지 않는다. 혼자 모든 공간을 쓸 수 있는 이 병실은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다른 환자들과 분리시켜놓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고독하고 쓸쓸한 곳이었는데 사라는 결핵에 감염된 첫 날부터 이 병실에 배정되었다. 사라의 병환을 마치 군인들이 군사기밀을 숨기듯 대한 이유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사라를 개인실에 혼자 두는 게 병이 악화되는데 일조할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환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뒤 가족들과 떨어지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후 병이 악화되었다. 환자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이나 친구를 보고 싶어 했지만 활동성 결핵은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에 면회는 금지되어 있었다.

예전에 사라는 뜻을 같이 하는 몇 사람들과 함께 격리 병동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선을 설치하길 건의했다. 결핵 환자가 급증하면서 허둥지둥 지은 병동에는 기본적인 설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병동은 좀 더 활기를 되찾았다. 그 중에서도 가족과 지인들에게 외면 받는 환자들은 있었지만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좋아졌다. 안타깝게도 사라는 본인이 주도해서 설치한 전화기를 이용할만한 상태도 되지 못했다. 고된 일정으로 면역력이 급격히 붕괴된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 결핵이 진행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우리가 손 쓸 틈도 없이 사라는 점점 우리와 멀어져갔고 곧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나는 스티브가 사라를 보러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앙상해진 사라의 면역체계에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다. 스티브는 사라의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상태에 관해서는 알리지 않았었다. 앞에서 썼다시피 사라의 병환은 숨겨야할 사항이었고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나는 계산을 했다. 사라에게서 자주 들은 바로 스티브는 병약하지만 올곧은 사람이라서 불의를 보면 참고 넘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만약 사라가 결핵에 감염됐다고 귀띔해준다면 과연 아들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려고 할까? 만약 스티브가 격리 병동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규칙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 일은 누가 감당하게 되는 걸까? 사라를 옆에서 지켜봐오면서 난 스티브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걱정됐다. 난 내 생각보다 합리화를 잘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속으로 스티브는 심장이 약하니까 충격적인 소식은 좋지 않으며, 사라가 회복될 수도 있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고 경황이 없어진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사라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여태까지 소식을 알리는 걸 미뤄왔던 죄책감에 대한 반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거다. 난 평소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티브와 사라를 만나게 해 줄 계획을 세웠다. 물론 환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건 절대 허락될 수 없었다. 대면식은 환자를 수용하는 병실과 외부 손님을 받는 통로를 단절시키는 문 사이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스티브를 보면서 외부에 설치된 전화기를 통해 음성을 전달하면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굳이 병원으로 데리고 와야 할까?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하면서도 걱정이 멈추지 않았다. 스티브도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염려되는 건 당연했다. 사라도 아들을 위험한 장소로 데려오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모든 염려를 다 해봤지만 포기하지 못했다. 그 때 나는 가족들이 면회 오는 걸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사라가 스티브를 보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릿속에서 환상을 구체화시켜나가고 있었다. 결핵 치료제와 발병 기전이 어느 정도 밝혀진 지금에 와서는 근거 하나 없고 위험하기만 했던 모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마치 사라가 된 것처럼 확고하게 일을 추진했다. 그만큼 난 사라가 병을 얻은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오직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일을 추진했다.

왜 그렇게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 짚어보면 잊으려고 노력했던 사건에 다다르게 된다. 사라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고 나는 뒤에서 닦아놓은 길을 쫓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너무 익숙해져서 어떤 때는 사라가 길을 닦아주길 은근히 기대할 때도 있었다. 그 중에는 유난히 기침을 심하게 하는 환자를 수발 드는 일도 있었다. 내 담당이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지치고 우울했다. 간호사 일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던 시기였는데 기어이 담당 환자를 사라에게 넘겼다. 그 후에 딱히 환자와 접촉할 일이 없던 사라가 덜컥 결핵에 걸려버렸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사라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꿈을 꾸었다. 그랬다. 난 그 환자가 사라에게 병을 옮겼다고 직감했고 그랬기 때문에 사라의 병이 낫길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바랐다. 적어도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내 직장을 걸었다는 기억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보람 한 번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직장이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있도록.

난 직접 스티브를 찾아갔다. 사라는 집에 전화기가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를 붙잡아 어머니가 결핵에 걸렸으며 그를 보고 싶어 한단 말을 전했다. 스티브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체구가 작고 말랐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땐 정말 괜찮은 걸까 다시 고민했다. 만약 이 가여운 스티브가 병동에서 결핵에 감염된다면 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거는 건 익숙하지 못했는지 그는 초반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혹시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기 때문에 사라가 방문을 원한다는 뉘앙스를 말 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다. 가족이지만 치료약이 없는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방문하고 싶지 않아하는 경우는 많이 봐왔고 그들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걱정했다. 절대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그랬다.

가면, 병에 걸릴 수도 있어. 그래도 갈래? 원한다면 그냥 전화로도 할 수 있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어. 사라도 원하지 않을 거야.”

아뇨, 아닙니다. 전 가고 싶어요.”

좋아.”

정해진 형식은 없다지만 한동안은 누구도 보지 않을 일기장에 대화를 쓰는 건 뭔가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던 대화를 그대로 복기한 이유는 내가 어떻게 원하는 반응을 교묘하게 이끌어냈는지 생생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다.

짧게 대화한 후 우리는 단 둘이서 병동으로 향했다. 결핵 환자들을 수용하는 병동은 요양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제일 근방까지 운영되는 버스를 타고 나머지 거리는 걸어서 갔다. 도착한 뒤에는 마치 사전조사를 철저히 마친 도둑처럼 직원용 뒷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전염방지절차를 확실히 지키기 위해 애썼다. 다용도실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뒤 병원균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갑과 마스크, 위생복을 스티브가 착용하도록 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온통 흰 옷을 입고 다니는 병동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도 좋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동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길 몇 번 반복했고 마침내 사라를 아들과 대면시키는데 성공했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티브는 전화기를 통해 사라를 불렀지만 의식이 없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내가 병실로 잠시 들어가 어깨를 살짝 흔들어보았지만 기적은 없었다. 낙심해서 말수가 적어진 스티브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쥐어주고 병동으로 돌아가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기서부터 뒷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하려고 몇 장에 걸쳐 긴 변명을 일기장에 늘어놓았는지도 모른다. 사라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사라가 침대에서 반쯤 일어난 상태로 발뒤꿈치를 들고 들어오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는지 찡그린 눈썹에서 괜스레 불쾌감이 느껴졌다. 정작 사라는 불쾌하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래 저지른 잘못이 들킨 아이처럼 난 사라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언제 일어난 거야? 방금 스티브가 다녀갔어. 이 말을 할 때 내가 데려왔다는 사실은 어느새 빠져있었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 라고 말했다. 알았다고? 그런데 어째서 답해주지 않았어? 스티브가 몇 번이나 불렀어. 나는 놀라서 사라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물었다. 사라는 본인이 침묵했던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스티브를 데리고 오려고 했다는 걸 벤자민 선생님이 눈치 채셨어. 그 사람이 널 지켜보고 있는지 몰랐지? 니가 그런 짓을 할까 걱정되지만 체면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것 같더라. 나한테 와서 이랬어. 스티브한테는 병동에서 잘 신경써주고 있어서 곧 나을 것 같다고 말하라고.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야. 환자 관리도 허술하고 내 담당의인 선생님은 날 제대로 봐주지도 않았잖아요. 회진도 없었고, 이 상태라면 그냥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잖아요. 예전부터 선생님은 본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환자를 포기하곤 했죠.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벤자민이 허튼 소리 하면 널 자르고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겠다고 했어. 병동수칙을 어기고 전염병의 온상인 곳에 허락 없이 취약한 외부인을 들여온 간호사는 어디서도 경계해야 할 존재라고.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직장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친구에게 알게 해주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지만 난 거짓말은 할 수 없었어. 그렇지만 네가 해고되는 것도 원치 않아. 더 좋은 방법이, 더 옳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떠오르지 않았어.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차라리 다른 질문이라도 했으면 바로 대답했을 텐데. 스티브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지내냐고만 묻더라.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난 사라를 담당했던 의사가 벤자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정도로 다른 일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라와 벤자민은 예전부터 병동 운영에 관한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이 잦았다. 벤자민이 나쁜 사람이었다곤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자식을 결핵으로 잃은 뒤 보다 효과적으로 결핵을 치료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의사였다. 사라와는 환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근접해서 개입할 것인지를 놓고 자주 싸웠다. 어째서 사라를 담당하게 된 의사가 하필 벤자민이었는지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때만은 사라를 붙잡고 따졌다. 벤자민이 수를 쓴 거였다면 어째서 내게라도 말하지 않았는지. 내게 한번이라도 말했다면 모든 일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난 어차피 간호사라는 직업에 질려가고 있었고 모아놓은 돈으로 조만간 이사 가서 새로운 삶을 계획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벤자민이 자르겠다고 협박했어도 전혀 상관없었다. 이왕이면 줄곧 후회밖에 남지 않았던 내 짧은 간호 경력에 작은 보람이라도 보태줄 수 있었는데 어째서 무거운 죄책감만 지우는지. 넌 예전부터 그랬어 사라. 정말 지긋지긋해. 그 지긋지긋함을 동경했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사라가 미안해, 라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사라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그렇게 처참했다.

*자작 인물이 등장합니다

 

너랑 등을 맞대면서 잠시 옛날 일을 생각했었어. 만약 내가 너의 등 뒤에 있지 않았더라면 네 뒤에는 브로디 무리가 있었겠구나, 하고.

-스티브 로저스-

 

 

이인二人원형진 #1 브루클린, 리틀리그 놀이터 공방

 

 

좁은 인도를 경계선으로 허름한 주택가가 차도와 지나치게 가깝게 늘어서 있었다. 인가가 조밀하게 들어찬 브루클린의 한 골목길에서 야구장 시설을 갖춘 놀이터는 리틀리그(Little-league)가 유일했다.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라는 문구 아래 시작된 놀이터 건설 사업은 어린이를 위한 놀이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브루클린에서도 환영받았다. 새로 짓는 놀이 공간에는 소형 야구장 말고도 미끄럼틀, 그네, 정글짐, 몽키바, 모래밭과 같은 신식 놀이기구로 가득해서 완공되자마자 소문을 들은 아이들이 몰려들곤 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놀이기구가 있는 곳이나 야구장, 농구장이 있는 곳은 다른 놀이터보다 인기가 많았다.

놀이터 건설 사업은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만큼이나 성공적이었다. 놀이터를 사용하지 않는 어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났다.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인도와 차도를 넘나들며 위험천만하게 놀던 아이들의 수가 줄었고 사업을 추진했던 뉴욕 시장은 이번에 지지율이 소폭 올라서 연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문에서는 향상된 안전 수준에 대해 기사를 내보냈고 전문가들이 칼럼을 기고했다. 한창 어른들이 들 떠 있을 때, 현장에서는 아직 그들이 확연히 눈치 채지 못한 문제점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일부 아이들은 이미 그 문제점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놀이터로 몰려드는 아이들은 많은데 놀이기구 수가 부족하다보니 자리싸움이라는 새로운 갈등이 생겨났다. 어른이 개입하지 않는 이 작은 싸움판에서도 어떤 종류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근방에 살면서 리틀리그 놀이터를 찾는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가 급하게 야구장을 사용할거야. 그러니까 양보해줄래?”

하지만 이제 곧 우리 팀이 공격할 차롄데…….”

아니까 물어보는 거야. 양보해줄래?”

리틀리그 놀이터에서 한창 진행되던 야구 경기는 우천 이외에 몇 가지 다른 이유로 예고 없이 중단되곤 했다. 브로디 무리가 게시판에 바지런히 기록되어 있는 예약 일정을 무시하고 멋대로 난입하는 경우는 야구하기 좋은 날 가장 빈번하게 발생했다. 브로디는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이 빨라서 몸집도 크고 근육도 벌써 붙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현장을 장악하는 계산적인 면모도 갖췄다. 마지막에는 항상 아이들에게 선택지를 줬는데 이 대목이 그가 가장 영악해지는 순간이었다. 꺼지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대신 숱이 많지만 끝이 날카롭게 잘 정리된 눈썹에 힘을 주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자리를 양보하게끔 선택하도록 했다.

고마워.”

예상대로 짐을 싸기 시작한 아이들을 브로디는 유쾌하게 배웅했다. 그가 쓰는 수법은 아버지가 해 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노먼은 예전에 잘 나가던 변호사였지만 유통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해서 여태 모아둔 돈보다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브로디는 아버지가 잘 나가던 시절에서도 가장 멋졌던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는데, 여러 일화 중에서도 신사적인 변호사 노먼이 살짝 조작한 증거물을 판사가 채택해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을 교도소에 보냈던 성공담을 제일 좋아했다. 유달리 하늘이 맑고 높은 오후에 방문한 놀이터는 야구장을 탈환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증거 조작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른들은 야구장과 분리되어 있는 놀이터에 모여 있었고 음울해보이던 관리인도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날씨가 좋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짐을 싸서 간 후에 관리인이 다시 오겠지만 팀이 바뀐 지는 알아채지 못할 거고 알아차린다고 해도 별 소란이 없었다면 넘어갈 것이다. 그는 귀찮은 일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이봐. 여긴 쟤네들이 먼저 와 있었어.”

공교롭게도 브로디가 물어봤던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한 사람은 내야나 외야에 서 있던 소년이 아니었다.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브로디는 짧게 혀를 찼다. 텅 빈 줄 알았던 관중석에는 사실 파리해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팀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경기 내내 덩달아 환호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다고 착각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어른이 아닌 이상 장외 인물이 얽힌다고 그게 계획에 큰 차질을 주진 않는다.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혹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변수가 이 놀이터에 있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는 멋진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브로디는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큰 목소리로 지겨운 상대를 맞이했다.

스티브 로저스, 또 너냐? 넌 어차피 야구에 끼지도 못하잖아?”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 중요한데? 너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고 왜 하지도 못할 거면서 참견이야? 야구도 못하는 약골주제에.”

브로디는 몸집이 커서 그림자로 스티브를 모두 가릴 수 있었다. 그가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체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티브가 또래 소년들보다 조금 넓은 그림자 폭에 완전히 갇힐 수 있을 만큼 여위었던 것뿐이었다. 브로디는 느긋하게 스티브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눈높이를 맞춘 브로디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상대방의 귀를 감싸 쥐었다. 스티브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보통 이런 자세를 취하면 열에 아홉은 널따란 손바닥이 따귀를 날릴 거라고 생각해서 눈을 질끈 감곤 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눈을 다시 떴을 때 비웃어줄 예정이었지만 관리가 안 된 금발의 푸석한 감촉만 확인했다. 브로디는 어이없이 웃으면서 다른 손으로 스티브의 무릎 위를 가볍게 톡톡 쳤다.

, 야구하고 싶지? 야구하게 해줄게.”

?”

드디어 흔들렸다. 브로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이런 놈에겐 채찍보다 당근인가 싶었다. 브로디와 이 고집스러운 소년은 악연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매번 주인공인 척 하는 모습이 거슬렸다. 그는 스티브를 가장자리로 더욱 몰아붙이기로 했다.

야구하게 해준다고. 내 팀에 들어온다면 앞으로 질릴 만큼 하게 해줄게. 잘 뛰진 못하겠지만 공은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 나는-”

스티브도 야구는 하고 싶었다. 조금만 뛰어도 목을 짓이기듯 터져 나오는 기침만 아니었다면 전력으로 흙바닥 위를 달려대며 제일 잡기 힘든 공을 잡아내고 싶었다.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느낌이 궁금하기도 했고 득점했을 때 받는 환호와 실점했을 때 쏟아지는 야유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한번 사람들과 부대껴보고 싶었다. 몸은 관중석에 앉아있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야구장에서 뛰는 상상을 벌써 수백 번이나 했다. 스티브는 브로디에게 위협을 받을 때도 감지 않았던 눈을 이번에는 감았다.

난 됐어. 그보다 먼저 왔던 애들한테 사과해.”

어떤 방식으로든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스티브는 눈을 다시 뜨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스티브의 귀를 가볍게 감싸고 있던 손이 뒷덜미를 잡아채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이 아프기도 했지만 머리를 흔들어대는 통에 현기증이 일었다. 관람석에서 끌어내려져 바닥으로 내팽개쳐질 때는 하늘이 뒤집히면서 아침에 먹은 걸 그대로 토해낼 뻔했지만 스티브는 시큼한 침을 삼키고 다시 일어섰다. 브로디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다시 때려눕힌 뒤에 그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등을 밟아서 눌러버렸다.

재수 없어, 로저스. 그렇게 한다고 누가 널 야구에 끼워줄 것 같아? 쟤들이 나중에 고맙다면서 야구에도 끼워주고 널 영웅으로 대접해주기라도 할 것 같냐고. 땅바닥을 사랑하는 영웅은 쓸모도 없는데 오히려 그 반대일걸? 애들은 점점 널 피하게 될 거야. 로저스가 있으면 일이 귀찮아지니까!”

그쯤 해 둬, 브로디.”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스티브는 브로디와 대조될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는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었다. 경기가 중단되기 오 분 전에 밀리는 편에 있던 소년이 멋진 삼루타를 성공시키며 후끈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삼루타를 친 주인공은 환호하며 삼루로 진출했는데 그 때 들었다. 홈런이 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좋아했다. 스티브가 기억하기로 그 때 들었던 소년의 이름은 버키였다.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끼어들 거면 시간표가 왜 필요하겠어?”

뭐야, 너네 둘이 친구냐?”
의혹이 불거져 나왔지만 스티브는 버키와 만난 적이 없었다. 둘 다 야구를 좋아했고 근처에서 그 또래 아이들이 놀 만한 야구장은 리틀리그 놀이터가 유일했으므로 언젠간 마주쳤을지도 모르지만 여태까지는 인사도 나눈 적 없었다. 버키는 스티브 쪽을 힐끔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브로디보다 키가 좀 더 컸다.

아니, 오늘 처음 보는데?”
    “근데 왜 편 들어 주냐?”

쟤도 오늘 처음 보는 내 편 들어줬으니까. , 쟤가 한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거든.”

웃기시네. 아깐 너도 짐 싸려고 했잖아.”

버키는 쓰게 웃으면서 브로디 발밑에 쓰러져 있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브로디가 발을 치울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한발자국 내딛었다. 그는 그 발 좀 치워주겠냐며 물어보는 것처럼 말했지만 상대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진 않았다. 버키의 손에 떠밀린 브로디가 휘청거리는 사이 스티브는 재빨리 기어 나왔다. 얼른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생각처럼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한 쪽 무릎을 바닥에서 떼어냈는데 다시 스티브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번에도 완전히 그림자에 먹힌 스티브는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지만 눈을 부릅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스티브가 걱정한 상황과 다르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은 브로디가 아닌 버키였고 내민 것도 발이 아닌 손이었다.

일어설 수 있어? 내 손 잡아.”

난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니까 그러지 말고.”

가까이서 보니 스티브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말랐다. 버키는 일어서는 것이 버거워 보이는 앙상한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스티브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도움을 주려던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스티브가 몸을 풀 듯 어깨를 돌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옷에 묻은 먼지를 오랫동안 털어내다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결국 스티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 , 혼자서 일어설 수 있잖아. 도우려고 해준 건 고마워.”

너도 참. 고집 있구나. 저 녀석한테 맞섰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고마워. 스티브가 얼굴을 붉히며 처음으로 수줍어했다. 딱히 칭찬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부끄러워하는 지점이 남달랐다. 그런 그를 보며 버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버렸다. 그런 거 싫지 않아. 버키는 스티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너무 무모했다. 동그랗게 둘러싸이면 뒤를 방어할 수 없게 되니까. 버키의 말을 엿듣고 있던 브로디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 녀석은 못 막아. 그러면서 그는 언성을 높였다.

빨리 야구장이나 비워. 봐봐, 니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게시판에도 지금 우리가 야구할 시간이라고 적혀 있잖아. 이제 끼어든 건 너네들이라고, 반즈.”

스티브가 다시 일어서는 사이 브로디 무리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있던 예약 게시판을 점령했다. 어느새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수정된 시간표는 여지없이 버키와 그의 팀이 끼어 든 것처럼 내용이 바뀌었다. 버키가 따지려고 했지만 스티브가 먼저 나섰다.

저건 멋대로 바꾼 거잖아. 버키-아니, 반즈랑 다른 애들은 양보한다고 한 적 없다고. 아까랑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양보하려고 한 적 없다고? -뭐지. 그래, 증거! 증거 있어? 방금 전에 짐 싸던 건 어떻게 되는 건데? 양보할거니까 짐 싼 거 아냐? 왜 갑자기 말을 바꿔?”

브로디는 언젠가 아버지한테 들었던 어려운 단어를 떠올리곤 의기양양하게 받아쳤다. 스티브는 잔뜩 약이 올라 따지기 시작했다.

너희가 협박해서 그런 거잖아?”

난 협박한 적 없어.”

난 짐 안 쌌어. 지금 보니까 다른 애들도 그러네?”

버키는 스티브보다 조금 늦게 나섰다. 스티브가 먼저 나서주는 바람에 할 일이 없게 된 그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에게 짐을 풀어놓으라고 지시했다. 친구들이 머뭇거리자 버키는 먼저 자기 짐을 모두 풀었고 몇몇 아이들이 가세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아이들도 마지못해 싸두었던 야구 배트와 글로브를 다시 꺼냈다. 급하게 싼 짐이었던 만큼 풀기도 쉬웠다. 보라는 듯 바닥에 와르르 쏟아놓기만 하면 됐다. 버키는 고갯짓으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자신의 짐을 가리켰다. 어딜 봐도 정돈된 짐은 아니지? 라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버키에게 브로디가 소리쳤다.

웃기지마. 아까 짐 싸는 거 다 봤어!”

증거 있어?”

버키는 마치 악당이라도 된 것처럼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스티브는 내내 침착하고 마냥 순해 보이던 버키가 상대를 얕잡아 보는 눈빛을 하고 업신여기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자태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화할 줄은 몰랐다. 자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브로디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조작된 증거로 승리하는 건 그의 몫이었는데 그걸 버키가 날름 가로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순식간에 달려들더니 버키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그는 무거운 주먹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충격 때문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곧장 일어서서 브로디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빗나갔다. 둘 다 움직임이 빨랐지만 브로디가 더 빨랐다. 야구장 저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버키의 이름을 불렀지만 브로디의 친구들이 모여 들자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버키와 어울려 노는 아이들은 대부분 제대로 싸워본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버키를 빙 둘러싼 브로디 무리는 승리를 확신하고 미소 지었다. 브로디는 버키가 짐을 푸느라 던져두었던 야구 배트를 들고 나타났다.

미치겠군.”

풀어두었던 짐이 이번엔 버키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상대에게 무기를 던져준 꼴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야구 배트를 든 브로디에게 맨 손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버키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원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브로디의 진영에서 한 명이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구멍이 뚫린 곳에는 스티브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아무래도 몸통으로 치받고 난입한 것 같았다. 버키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바보야, 넌 어서 도망가!”

난 안 도망가!”

스티브는 재빨리 원 안 쪽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버키와 등을 맞대고 섰다. 그가 들어오자 커다란 원에 대항하는 작은 원형진이 형성되면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등 뒤의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진형이 완성됐다.

너넨 못 이겨.”

아군을 등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승산은 낮았다. 게다가 아까 얼굴을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버키의 코에서 새빨간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는 한 쪽 소매로 피를 닦아내고 입술에 남아있던 피는 핥아서 없앴다. 최대한 버티다가 기회가 생기면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걱정되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스티브가 그의 생각에 동의해 줄 지, 그 이전에 제대로 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버키의 머릿속에 점점 복잡해져 가던 순간 멀리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당장 멈춰라!”

관리인이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가 소년 한 명과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브로디 무리는 관리인을 보더니 빠르게 와해됐다. 버키는 적절한 시기에 돌아와 준 관리인이 내심 감사했다. 애초에 그가 자리를 비워서 생긴 일이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시 침착해진 버키가 진정한 것처럼 보이자 스티브가 다가왔다.
미안해.”

뭐가?”

버키는 스티브가 왜 사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티브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실 로니 아저씨보다는 놀이터에 있던 다른 분을 데려오는 게 더 빨랐을 거야. 네 친구들이 그러려고 했는데 내가 말렸어. 그러면 아저씨가 곤란해져. 중간에 자리를 비웠으니까. 하지만 로니 아저씨는 사실 오늘 병원 예약이 있어. 어제 엄마가 통화하시는 걸 들었거든. 왜 일하는 시간 중에 예약하셨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사정이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해.”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버키는 스티브의 말을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간격을 두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시간을 끌겠다고 했어.”

그러다가 만약 시간 내에 못 오셨으면?”

듣고만 있던 버키가 물었다. 스티브는 마치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마침 아저씨가 다니는 병원은 나도 다니는 곳이어서……. 거리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만약 아저씨가 병원에 안 간 거였으면?”

? 그게 무슨 말이야?”

예약은 했지만 안 가고 다른 데 갔을 수도 있고 진료가 끝난 뒤에 바로 안 돌아오고 다른 데 들렀을 수도 있잖아.”

아냐. 로니 아저씨는 안 그러셔. 실제로 병원에 계셨잖아.”

아니, 그러니까. 버키는 만약의 사태도 있을 수 있다고 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했는지 멈춘 줄 알았던 코피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버키는 급한 대로 코를 손으로 막았다. 그 광경을 본 스티브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 있어. 병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 집에 상처에 바르는 약도 있어. 코에 발라도 될 진 모르겠지만.”

손수건에는 피가 말라붙은 것 같은 갈색 얼룩이 이미 묻어있었는데 스티브가 자기 상처를 지혈했던 것 같았다. 버키는 스티브가 준 손수건으로 인중에 묻은 피를 닦아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코 옆에 난 상처가 쓰라려서 그 부분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다행히 코뼈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고 나오던 피도 점차 말라갔다. 스티브는 결국 빨갛게 물들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

스티브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뭔가 더 자신을 변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스티브는 말을 정말 못했다.

아냐, 아냐. 사과하지 않아도 돼.”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약 스티브가 다치지 않았다면 버키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다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브로디가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게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군가 다칠 위험이 있었기에 싸움을 피했다. 그런데 그 결과 다칠 필요가 없던 사람이 다쳤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버키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애초에 스티브와 브로디가 싸움이 붙었을 때 다른 어른들에게 알리자고 한 아이들에게 기다려보라고 했던 건 버키였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고 마음 한 편으로는 어른들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버키라고 불러.”

, 스티브.”

이제야 통성명을 했지만 둘 모두 서로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만큼 쓸데없는 통성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 앙리와 빅터의 대사의 일부는 http://ganggang.postype.com/post/83137/를 참고하였습니다

* 기반 페어: 형은

* 자작 인물: 이본, 아멜리, 니콜라

 

 

앙리는 이본 할머니가 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수의로 싸인 상체가 조금 들썩였는데 어린 앙리의 눈에는 마치 일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 잘 대해주었던 할머니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뻐 앙리는 유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예상치 못했던 생존을 알렸다. 높다란 그의 목소리는 묘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깡마른 시신을 두툼한 석관 속에 넣은 후 그 위에 흙을 덮어버렸다.

앙리,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단다.”

하지만 움직였어요!”

보육원 생활지도와 교육을 담당하는 아멜리는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잘못 봤을 수도 있고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신은 움직이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앙리는 사실 할머니가 죽지 않아서 움직인 거라고 왜 생각하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말도 들었지만 앙리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날 묘지를 파헤치고 땅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할머니를 구해냈다. 집념어린 소년이 잘 묻어둔 묘지를 파헤치는 데는 꼬박 하룻밤이 걸렸다. 이튿날 앙리가 벌인 일을 목격한 보육원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본 할머니는 사실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앙리가 그 말을 했던 날 내내 침착했던 아멜리가 결국 화를 냈고 아이들은 모두 좁은 강당에 모여 목사님께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죽음으로 협상하는 법

~앙리편~

 

 

생명은 신이 정한 자연의 섭리였으므로 태어나서 죽는 것은 거스를 수 없다. 앙리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죽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렸을 적에 호흡과 심박이 멈춘 채 반응하지 않던 이본 할머니가 까딱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고 살아계실지도 모른다고 외쳤다. 할머니는 그 두 가지만 빼면 살아있던 시절과 완전히 동일해보였지만 아무도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앙리는 혼자서 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답을 얻었던 것은 보육원이 속해있던 교회에서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의대에 진학한 뒤였다. 그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은 학과장만 알고 있었다. 생리학과 해부학 강의를 들으면서 호흡과 심박이 멈춘 뒤 사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장례식에서 유족이 고인과 대면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염습 과정을 배운 뒤에도 앙리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단지 몸이 움직이기만 한다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거겠네?”

첫 해부학 실습이 끝난 뒤 동기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해부학 실습은 의대 정식 교육과정으로 승인받은 지 오래였지만 아직 세간에선 장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진 않았다. 기증된 시신이나 사형수의 시신을 실습에 사용하는데 공급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직접 해부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최선을 다해 임했지만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앙리는 전자였고 단순한 근육 경련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려 애썼지만 보라는 듯 실패했다.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처음 마시는 술을 과감하게 들이켰고 자신을 변호하고픈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 바람에 푸념처럼 늘어놓은 고민에 답해준 것은 스물이 훨씬 넘어서 의대에 들어온 니콜라라는 학우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 외부에서 신경계에 전기 자극을 줘서 그 사람이 살아있었을 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기계적인 존재인 걸까? 인체를 구성하는 화학적, 물리적 요건만 충족되면 생명이 탄생하는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물론, 생명활동이 일어나려면 일단 몸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야 해. 그건 필요조건이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자연과학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힘과 다른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 그거에 관해 연구한 학자도 있는데 읽어볼래?”

니콜라가 추천해준 것은 폴-조제프 바르테즈와 스위스의 생리학자 할러의 논문이었다. 본문에서는 근육 활동과 신경 활동의 관계에 관해 기술했고 생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독특한 힘을 활력이라고 지칭했다. 활력은 자연과학적인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미지의 힘이었다. 논문을 다 읽고 난 뒤 앙리는 비록 이본 할머니의 몸이 움직였지만 활력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앙상하게 남아있는 근육으로 몸이 들썩일 수는 있었지만 시들해진 신경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본 할머니의 활력은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 후 앙리는 활력을 잡아두기 위해 인체를, 특히 신경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고안해내는데 전력을 다했다. 활력이 사라지는 것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었지만 몸이 무너진다면 그 근본적이고 신비한 힘도 사라진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몸을 추스르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실습 시간에 환자들과 만나본 뒤로는 사무치도록 실감할 수 있었다. 고장 나기 시작한 그들의 육체는 물이 새기 시작한 댐처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댐을 보수하는 것처럼 아예 새로운 재료를 무너진 곳에 공급해주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머리만 손상된 인체, 예를 들어 단두대에서 형을 집행했지만 집행인의 부주의로 머리가 굴러 떨어진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체 내부에 있는 장기와 사지는 멀쩡하지만 활력의 근간이 되는 뇌는 지켜보던 사람들의 발에 밟혀 으스러졌기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결한 의지로 시신을 기증한 분들도 계시죠. 이런 특별한 경우로 인해 보존된 인체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에게 이식한다면 아직 인간 스스로 인체를 만들어낼 수 없는 지금, 그 사람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앙리는 인체 접합술을 개발해 사체를 재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졸업할 때 제출했다. 그의 논문은 학회에서 발표하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사체를 재활용한다는 것은 신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주장에서부터 새로운 신체에 수혈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인 부작용, 인위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불길한 신체를 붙이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우려까지 한 데 뒤섞여 회장을 소란스럽게 했다. 앙리는 논문을 발표하는 현장에서 개인의 윤리성과 도덕심 뿐 아니라 그의 재능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질문을 연속해서 받았다. 가장 신랄하게 그를 비판했던 인물 중 한 명은 그의 동기였던 니콜라였다.

그런데 잘도 그런 논문을 실어줬군 그래. 그렇게 비난해도 결국 사람들은 인정했다는 거 아니겠나?”

그건 인정해서 실어준 것보단 낙인 같은 거였습니다. 싣지 않을 수도 있었고 졸업을 철회할 수도 있었지만 인정해준 걸 보면, 편집장이나 일부 사람들은 속으로 인정해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속은 저도 잘 모르겠고 실제로 나타난 효과는 달랐죠. 이 자는 이런 논문을 발표한 전적이 있고 학술지에 게재했으니 앞으로 변명하거나 철회할 수 없다는 겁니다.”

1사단 무기연구소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앙리는 빅터의 물음에 무덤덤하게 답했다. 실제로 앙리는 그 뒤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거나 논문을 쓸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빅터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앙리는 설마 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것만으로 세상이 인정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빅터가 놀란 표정을 짓자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앙리가 웃는 것을 본 빅터는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보다 순진하구나 싶어서요. 앙리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웃어버리긴 했지만 그의 논문을 읽고 순수하게 감탄해 준 사람은 빅터가 처음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기적처럼 나타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감미로운 관계를 독점할 수 있는지 앙리는 처음 알았다.

먼 미래를 열자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을 바꾸자는 거지. 죽음, 지옥, 운명, 저주. 이 미신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좀 더 훌륭한 인간의 세계관을 만드는 거야!”

전쟁터 한복판에서 끌어 모은 명분과 자본으로 사체를 활용한 무기를 개발하면서 그런 말로 앙리를 설득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전쟁을 생명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오만해 보이는 그의 발상을 거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감을 찾지 못하고 군의관으로 자원한 뒤 경험한 전장은 매일 밤 악몽을 꾸게 할 만큼 참혹한 죽음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에도 신의 의지가 개입한 것일까? 앙리는 매일 밤 질문했다. 인간은 서로를 더욱 치명적으로 죽이는 기술들을 개발하는데 그것은 신이 의도하지 않은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도치 않은 죽음을 막기 위해 살리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생태계를 유지하는 일이 된다.

과학은 살인 도구로 변질됐어. 무지한 인간들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지.”

앙리는 빅터의 연구를 돕는 것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살아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눈뜨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죽음을 다시 정의하는 연구였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갇힌 뇌에 아직 활력이 남아있다면 빅터가 고안한 기술로 나머지 신경계를 다시 활성화시켰을 때 비로소 살아있었다고 외칠 수 있을 테니. 그래도 난 살아있다고 외치지 못한다면 그 때 그 사람을 죽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앙리는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관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물음에 드디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랜 억울함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 빅터의 손을 맞잡고 세게 흔들었다.

신체 접합술은 머리 부분이 손상된 사체만 사용했다. 앙리가 생각하기에 머리가 없는 사체만이 정말 죽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머리만 나머지 신체에 접합할 때도 있었다. 머리가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아직 그 속에 활력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사람을 살려내는데 중요한 부분은 머리였고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도 머리였다. 단단한 두개골 속에서 보호받고 있던 연한 뇌 조직은 근육까지 전달되어야 하는 강렬한 전기 자극을 견뎌내지 못하고 타버렸다. 겨우 뇌 조직 손실 없이 전류를 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웰링턴 장군도 빅터도 연구가 명분을 다했다며 아쉬워했지만 앙리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 무기로 쓰는 게 아니라 활력을 다시 이끌어내는 기술은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 미래에 닥쳐올 수 있는 비극에 대비해야했다. 하지만 비극은 앙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찾아왔다.

장의사는 이미 뇌가 손상됐지만 월터는 아직 희망이 있어.”

장의사가 살해된 직후 앙리는 빅터에게 그렇게 말했다. 빅터가 순간 분을 못 이겨 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바람에 장의사는 완전히 죽었다. 그에 비해 월터의 머리는 아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신체 접합술을 이용해 월터의 머리를 다른 몸에 이어 붙인 뒤 활력이 발산될 수 있는 길을 터준다면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되살아난 월터는 장의사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귀족 가문인데다가 빅터를 동경했으므로 재판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장의사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월터를 살려내는 것도 결국 실패했다. 긴장한 빅터가 지나치게 강한 전류를 흘려주는 바람에 뇌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는 긴장하면 일을 그르치는 경향이 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앙리는 이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터 에센과 장의사 프란츠 코프카는 제가 죽였습니다.”

거짓으로 자백을 한 뒤 앙리는 스스로 사형수가 되었다. 뒤늦게 면회를 온 빅터는 자백을 번복하라고 했지만 앙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단두대에 올라가면서 빅터가 애걸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네가 죽이지 않았다고. 제발 사실대로 이야기해!”

너와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죽는대도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린 앙리는, 죽은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빅터는 반드시 실험을 성공시켜 생명의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 자신의 머리와 몸을 전부 이용해서. 빅터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자신이 3사단에서 빅터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상황을 되돌려야만 하게 만드는 것. 이건 앙리가 죽음으로 협상하는 방법이었다.

난 너의 꿈에, 살고 싶어.”

앙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단지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며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빅터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고 죽음을 다시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그는 죽음을 최후의 활력이 사라져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태, 즉 머리가 완전히 손상된 상태로 정의하고 있었다. 만약 이 정의를 한 번 더 번복할 수 있다면. 뇌를 넘어서서 생명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이 완성될 수 있다면 모든 상황을 되돌릴 수 있다. 일평생 탐구해 온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게 다시 미뤄진 느낌이었지만 앙리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단두대가 그의 목을 가르는 순간, 앙리는 이본 할머니가 다시 일어나 그에게 미소 짓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습관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에는 꽤나 중립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꽤나, 라고 군더더기를 붙인 이유는 참된 중립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습관에 관해 논하자면 더욱 의구심을 품게 된다. 나는 습관이 몸에 배는 현상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내가 행동하는 방식을 제약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가장 읽히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의중을 읽히기 때문이다. 네트 너머로 보이는 눈들은 언제나 습관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습관을 의식하고 목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습관이 된다는 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카아시 케이지, 습관에 관하여-

 

당신을 위한 습관

 

 

아카아시!” 라고 보쿠토가 힘차게 외치는 것을 아카아시가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바람 같은 외침이 코트를 쓸고 지나간 뒤 아카아시의 눈동자는 아주 짧은 순간 그 쪽을 향했다. 보쿠토는 세터들이 자주 보여주는 그 찰나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아카아시는 언제나처럼 속으로 무심한 계산을 하는 와중인 것이다. 막 스텝을 밟으며 뛰기 시작한 보쿠토에게 공을 주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솔직한 동선을 눈치 챈 블록들이 벌써 벽을 만들고 있었다. 보쿠토는 그 인간 벽을 뚫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조금만 빗나가도 꼴이 우스꽝스러워지기 십상인 고난도 스파이크를 멋지게 성공시킬 수 있었다. 보쿠토는 넘치는 활기와 자신감을 한껏 담은 눈빛을 아카아시에게 보냈다. 그 눈빛이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달굴 수 있도록.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는지 공을 향한 보쿠토의 열렬한 구애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외면당한 채 열기가 식어가는 코트 한편으로 신속하게 공을 배달했고 코노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언제나처럼 단호했다. 그 결과 후쿠로다니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명랑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에 공을 안 드려서 마음이 상하셨나요?”

, 그런 거 아니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씀은 있으신 거죠?”

아카아시는 경기에 승리했지만 보쿠토가 생각보다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로 축하하며 흥에 겨워하는 모습은 다른 팀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평소의 보쿠토와 비교해본다면 차이가 명확했다. 지친 팀원들이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대부분 잠들었을 때 그 이유를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때 공을 줬다고 해도 나는 성공시켰을 거야.”

삐죽 튀어나온 입이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이 갔다. 아카아시는 구부러뜨린 손가락 마디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상대를 살폈다. 불쾌해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좋았고 굳이 속내의 부스럼까지 긁어모아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

분명 성공했을 겁니다. 제가 맘에 걸렸던 건 이미 제 움직임이 읽혔다는 거였어요. 언제부턴가 선배에게 토스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자제한 겁니다. 세트 업부터 읽히면, 곤란하잖아요.”

아카아시는 잠시 말을 이어가기를 망설였다. 이 말을 내뱉기 바로 전까지 그는 보쿠토가 분명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던가. 의심할 여지없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토스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무심코 속으로 계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공격이 성공했을 경우 보쿠토의 기분과 컨디션이 함께 상승하는 경우와, 느낌이 좋았지만 실패했을 때 보쿠토와 기분과 컨디션이 추락하는 것 사이에서. 도박을 해야 할 정도로 득점에 쫓기는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안전하게 가자고 타협했을지도. 이미 흐름을 읽어낸 네트 너머의 눈빛에 압도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네 생각은 잘 알겠어. 그 느낌 알 것 같단 말이지. 나도 읽히면 신경 쓰일 것 같고, 알게 모르게 든 습관을 나보다 먼저 간파한 녀석이 있다는 것도 맘에 안 들것 같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감사받을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대단한 것도 아니라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보쿠토가 보기 좋아서 아카아시는 편안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나 아카아시의 습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아직 끝나지 않은 보쿠토의 말이 뒤통수 너머로 들려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먼저 눈을 돌렸기 때문에 표정을 보지 못했다. 반문하며 한 박자 늦게 돌아본 뒤에는 보쿠토도 다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풀 방법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군더더기에 침착하지 못했던 표정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보쿠토도 잠든 버스에서 나른한 느낌에 휩싸여 눈을 감자 벌써 페이지가 넘어간 습관 목록이 떠올랐다. 쓸데없이 자세하게 써내려간 항목을 곱씹으며 아카아시의 얼굴은 느리게 미소를 완성했다. 괜찮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쩌면, 당신을 위한 습관 하나 정도는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위압적인 상대에게 읽힌 습관을 지켜내게 만들어서 당신이 더 자신만만하게 코트를 박차고서 날아오르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습관이라면 몇 개 정도 몸에 배게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괜찮은 느낌의 생각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