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새는 울지 않았다. 대신 세세한 결을 따라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이 다니엘의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곧 이어 원단이 팽팽해지면서 실을 당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났고 얼굴 옆으로 바람이 약하게 일었다. 누군가가 그의 옆에 있다, 라는 생각에 확신이 든 순간 다니엘은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입에서 익숙한 말이 튀어나왔다.

"꼼짝 말고 손들어!"

어이쿠. 다니엘의 신속한 대응에 미지의 침입자가 놀란 듯 감탄사를 뱉으며 엉거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침입자는 손을 들고 항복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거리를 확보한 곳에서 주머니 깊은 곳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소리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웃을 뿐이었다.

"꼼짝하지 않고선 손을 들 수 없는데 말이지."

온순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를 보고 있자니 울컥, 하고 다니엘의 속에서 다시 무언가 올라왔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아주 순진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고도 경계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다니엘은 남자가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싱 링크 3. 소리 없이 웃는 남자

 

다니엘은 눈앞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샅샅이 관찰했다. 농도 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서 묻어나왔다. 공들여 관리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 머리카락이 부산스럽게 이마와 귓가를 덮고 있었지만 다니엘은 남자의 눈 옆으로 내리 그어진 커다란 흉터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단서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유쾌하지 않은 편견을 부추기고 있었다.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던 폭력성이 짙은 의혹에 비해 남자의 손은 의외로 점잖아 보였다. 서 있는 동안에는 줄곧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아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흔적이 손에 남아있나 싶었는데 노파가 권한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숨기고 싶은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잔뼈가 도드라졌고 중지에 깊게 박힌 굳은살과 펜을 돌리는 듯한 손장난을 반복하고 있는 게 처음 예상과 달리 사무직 종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닐 수도 있고. 아직, 남자에 대해 뭐라고 결정을 내리기에는 단서가 적었다.

"미안합니다."

"? 아니, ……."

남자는 생각보다, 아니 순박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는 아주 어울리게도 순순하게 사과했다. 실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데다가 온화하고 예의바르게 웃는 모습이 사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말없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사과는 부족한 게 없었고 오히려 뒤끝 없이 깔끔할 정도였다. 나무랄 것이 없는 태도였지만 그럼에도 다니엘이 탐탁지 않게 반응하는 이유는 남자가 사과한 사건 뒤에 일어났던 일 때문이었다.

그는 남자가 손을 들지 않자 다짜고짜 달려들어 제압해버렸다. 손님이라고 소리치며 들어오는 노파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더 격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공격의사가 없는 상대에 대해 과잉진압을 한 것이다. 남자가 사과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다니엘도 사과하지 않고 넘어가도 될 지도 몰랐을 테지만 저 정도로 완벽한 사과를 해버렸으니 이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양심의 압박은 다니엘이 감당해야할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남자에게는 사과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평소였다면 무리 없이 사과하고 마무리 지었을 텐데 자꾸 마음 한 쪽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아직 남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속으로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죄목이 남자에게 있을 것이라고 그의 직감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매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팔을 상당히 세게 비틀었는데 혹시 나중에 이상이 있다고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면 곤란하다. 시민에 대한 과잉 진압은 경찰로서는 정치적으로 제일 피하고 싶은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뭔가 억울하다. 먼저 허락 없이 남의 방에 소리도 내지 않고 들어온 것은 남자였는데 어째 다니엘이 도덕적으로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었다.

"굉장히 반사 신경이 좋으시더군요. 운동선수신가?"

"아니, 아뇨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호신술을 좀……."

"그렇군요. 하긴, 이런 곳에서 호신술은 필수적이죠."

자신이 형사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남자도 다니엘이 호신술을 배웠다는 사실에 크게 의미를 두는 것 같진 않았으므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아? 일이 바쁘잖아."

"그래야죠. 후원은 감사했습니다, 마담."

"그 쪽은 출근 안 해? “

다니엘은 남의 속도 모르면서 직장 운운하는 노파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아직 주어진 단서만으로는 그가 형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테지만. 다니엘은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요."

"그래? HLPD도 정부당국도 어지간히 고민 중인가 보네."

이 사람이 결국. 다니엘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폭로된 사실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다니엘은 원망의 눈길로 노파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떠나는 손님을 배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어선 남자를 보니 생각보다 키가 훨씬 컸다. 보폭도 넓어서 몇 걸음 만에 문 앞에 도달했다. 문고리를 열고 나가기 전에 그는 다니엘을 보며 살갑게 손까지 흔들었다.

"그럼 근무 힘내십쇼, 형사님."

남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인사해서 다니엘은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어 배웅까지 해주었다. 하나 뿐인 입구이자 출구가 닫히고 노파와 남자가 사라진 뒤 정적 속에서 그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내가 형사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단순히 넘겨짚은 게 얻어 걸렸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대명사로 형사를 떠올리기도 하고. 아니면 노파가 미리 말해줬을 수도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왔을 때 어떤 단서를 봤을 수도 있고. 그래, 그렇겠지.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 한 시. 어제 침대로 기어들어간 뒤로 하루 종일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강도 높은 근무 환경에 익숙한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훨씬 힘들었다. 평소에 익숙했던 일상적인 절차가 모두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 인간만으로 한정되지 않았고 도시 자체가 되었다. 꼼짝 말고 손을 들으라는 말은, 아니 그러니까 손들고 꼼짝 말라는 말은 인간들로만 구성된 사회에서는 약속된 권력을 행사하지만 도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급한 상황에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결국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물리력에 의지하게 된다. 다니엘은 최근 평소보다 무력을 행사하는데 놀랄 만큼 관대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불안했기 때문에 많은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래서 방금 전 그 남자에게도 생각보다 과도하게 무력을 써 버린 것이리라. 위험하다. 불안감에 끌려 다니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길한 경보음이 울렸다. 그는 빨갛고 파란 불빛이 번갈아가며 번쩍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방안을 고안해놓았을지 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바쁘게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서려는데 가슴께에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니엘은 양복 안 쪽에 있는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들어와서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 서에서 가져왔고 아마 침대 바로 옆에 놔두었는데.

"신분증이 어디 갔지?"

경찰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 사라졌다. 그 순간 다니엘의 귓가에서 불쾌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옆에서 살며시 옷깃만을 스치던 그 남자의 촉감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이해되지 않던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계속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던 묘한 거부감이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날뛰기 시작했다. 대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다니엘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놈 어디 갔어요?"

"그 놈이라니, 누구?"

"누구긴 누구야, 방금 그 남자! 얼굴에 흉터 있는!"

", 벌써 가버렸는데. 왜 작별인사라도 따로 하려고?"

"그 놈이 내 신분증을 가져갔다고!"

다니엘의 외침에 노파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은 아닌데. 노파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을 그는 여태까지 숱하게 봐왔다. 선량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경계를 풀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젠장!"

지금 나가면 쫓을 수 있을지도.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인 그를 노파가 급하게 붙잡았다.

"관두는 게 좋아. 그 남자를 쫓아갔다가는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경고하는 것처럼 말하는 노파의 표정이 유래 없이 진지했기 때문에 다니엘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노파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당신들 뭐야?"

처음부터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집 한 채가 통째로 사라졌지만 여유로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 구획이 재편성될지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녀는 항상 평온했다. 현장에서 못 볼 것을 많이 봐 온 다니엘보다 그녀는 지옥에 익숙해 보였다. 아마 지옥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존재라면 지옥의 파수꾼밖에 없지 않을까.

"난 그냥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평범한 노인네야."

"그걸 믿으라고? 그럼 왜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을 놔두고 보더라는 가명을 쓰는 거지?“

다니엘의 말에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고 그는 질문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침착하고 내 말을 들어봐-"

"됐고, 그 남자 어디 갔어?"

다니엘은 잠시 멈칫했다. 자기 말 좀 들어보라고 하소연하는 여자의 모습은 어딘지 익숙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 말을 자르고 나가버리던 남자의 모습도. 안개 같은 것에 휩싸여 희미해진 장면 속에 강렬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냐. 그 남자가 신분증을 가져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지가 더 중요했다. 다니엘은 결국 노파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 남자를 쫓았다. 눈매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입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웃던 그 남자의 뒤통수는 생각보다 확실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노란 중앙선 끝자락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 너머로 곧게 이어지는 대로의 끝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서글프게 흐느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끔찍한 비탄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여자 같았다. 소리는 확실히 들려오는데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를 헤치고 길 끝이 다다랐을 때는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대로의 끝에는 아무도 울고 있지 않았다.

미싱 링크 2. 소리 없이 우는 남자

 

8번 관할 구역을 효율적으로 순찰할 수 있는 역동적인 라인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을 과장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그가 제안한 순찰 시스템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게 그가 무능한 탓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다니엘은 일단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부동산이 동산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상식적인 선에서 쉽게 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기에.

구획이 바뀐다고? 어떻게?”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제가 두 눈으로 봤습니다. 분명 소니가 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사라졌단 말입니다.”

상반신 만요. 순간 다니엘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고 그건 과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상반신만 사라졌다면 나머지 몸의 절반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영상에 가까울 정도로 생생한 장면이 있었지만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젓는 동료를 두어 명 더 보았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려는 장면을 억누르기 위해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순히 길을 걷다가 몸이 두 동강 나는 곳이라면 여긴 정말 지옥이라고 단정 지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 나머지는 수습을 일단 해왔습니다.”

……알았네. 수고했네.”

예상외로 침착한 말투에서 다니엘은 과장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솔직히 말해서 일반인이 온갖 수단을 강구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하려고 해봤자 개죽음 당할 뿐이다. 괜히 나서지 말고 다른 정부기관의 지원을 기다리는 게 훨씬 안전할 뿐만 아니라 합당했다. 그 정부기관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FBI나 항상 소문은 무성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CIA나 온갖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군부대다. 앞에 두 집단은 이미 이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아직 접촉해온 바는 없었다. 모두의 의견을 전달받은 서장은 결단을 내렸다.

내가 윗선에 보고를 할 테니, 자네들은 당분간 상부에서 지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게. 솔직히 말해서 여태까지 매뉴얼대로는 절대 안 돼. 섣부르게 나설 생각 하지 말고. 알겠나?”

이것은 말하자면 합법적인 땡땡이였다. 상부에서 지령이 내려올 때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지만 깜짝 휴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휴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여기 괜히 지원했나 싶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니엘은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들어 일찌감치 집에 왔을 때 맨 먼저 뛰어나와서 품에 안긴 보더 콜리를 아직도 품 안에 끌어안고 있었다. 먼저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견공의 뒤를 이어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솔직히 눈물이 나올 뻔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현재 경찰서에서 자원해서 온 사람은 다니엘과 조용하게 구석을 지키고 있는 멜슨이라는 경관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원래 이 근처 구역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8번 관할 구역으로 통합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집에 가면 그들을 맞이해 줄 가족이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원래대로라면 없었을 테지만 예상치 못했던 동거 덕분에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압도적인 무력감이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갑자기 뼈에 사무치도록 감사했다. 다니엘은 결국 노파에게 속에 있던 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 지원한 이유는 특별한 거 없어요. 그냥얼마 전에 여자랑 헤어졌는데 그 여자랑 같은 장소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어요. 마침 지겹도록 오래 살았던 곳이겠다 슬슬 자리를 옮겨볼까 싶어 전근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이 곳으로 자원할 사람을 뽑는 거예요.”

마치 남의 얘기 같았다.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도무지 스스로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웃어버렸다.

여기 지원할 땐 어떻게든 될 거라는 무책임한 생각도 했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저번에 있던 곳에서는 경찰 경력에서 가장 인정해줄 법한 공적도 몇 개 세웠고 최연소로 승급 시험도 통과했단 말이죠. 그래서 정말 솔직히 얘기해서 난 막연하게 이곳을 얕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을 단순히 그 여자를 피하기 위한 도피처 이상으로 보지 못했던 거예요. -짜 부끄럽고 멍청한 일이긴 한데-, 젠장.”

다니엘은 자신의 가슴 앞에 자리 잡고 누워있는 견공에게 고개를 파묻었다.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아직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속절없이 떨리는 음성이 원망스러웠다. 무섭다. 이곳이 무섭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그래도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겁쟁이였고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자신도 그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겁쟁이였다. 게다가 훨씬 한심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겁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제일 멍청했던 사람이었다. 다니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노파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 그래.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에 총각이냐고 물었을 때 여자랑 헤어졌다고 말했었지. 그래, 그래. 기억나는구먼. 그 여자 이름이 뭐야?”
에스메랄다요.”

예쁜 이름이네. 에메랄드에서 따온 이름이야. 그래서 그 여자는 에메랄드처럼 단단했어?”

아뇨. 에스메랄다는 잘 우는 여자였어요. 사소한 일에도 상처받거나 감동받거나.”

에스메랄다를 정말 사랑했어?”

.”

근데 왜 헤어졌어?”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그는 그 이유를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별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내리친 날벼락 같았다. 심하게 충격을 받았지만 대체 어디서 날벼락이 떨어진 건진 알 길이 없었다. 중간에 사이가 확연하게 나빠지는 과정이 있었다면 그나마 납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그 전날에도 둘은 서로 웃으면서 헤어졌다. 그나저나 기분도 안 좋은데 이런 고약한 질문을 던지다니. 역시 노파는 어중간하게 봐주는 게 없었다. 하지만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다니엘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한 노파를 보자 어딘지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이 도시는. 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산보 삼아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소리만은 확실하게 들렸지. 여자가 우는 소리였어. 어찌나 구슬프게 울던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가서 까닭이라도 묻고 싶었지. 그래서 안개를 헤치고 그 긴 대로를 혼자서 걸어갔어. 걸어가서, 묻고 싶었지. 왜 울고 있느냐고.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고. 근데 막상 길 끝에 도달하고 안개가 걷히니까 눈앞에는 모든 것이 보이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거야. 그러고 보니까 안개를 헤치고 걸어가는데 정신이 온통 팔려서 언제부터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도 신경 쓰지 않게 됐지 뭐야. 난 결국 도로 끝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찾을 수 없었어. 당연히 울고 있던 이유도 묻지 못했지. 지금도 가끔 생각해. 아 그 때 안개 속을 걸어가면서 좀 더 소리에 집중했더라면,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었을까 하고.”

노파는 웃으면서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잔한 웃음이긴 했지만 다니엘은 그 밑에서 일고 있는 깊은 파고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후회였다. 도와줄 수 있었는데도 누군가를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경찰로 일하면서 다니엘은 그렇게 웃는 사람을 종종 봐왔다. 동료 중에도 후회스럽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은 그의 탓이 아니라면서 위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네 탓이 아니다. 비록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경찰로 일하면서 유일하게 진실이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쪽 탓은 아니잖아요. 그 여자가 우는 이유를 묻지 못한 게.”

무뚝뚝하게 내뱉는 다니엘의 말을 듣고 노파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이유를 물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울고 있는 이유를 말이지.”

. 노파의 말에 다니엘은 헛기침을 하면서 견공의 부드러운 털을 빠르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콜리는 다니엘에게서 빠져나와 다시 노파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울었는데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다 아니까. 소리는 안 들려도 다 알 수 있어. 왜냐하면 난 그 때 이후로 죽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거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까 소리가 들리는 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앞뒤가 맞지 않아서 다니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노파가 말하고픈 게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아직 무엇인진 정확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노파가 두 번째로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명확한 모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억울했다.

근데 딱히 우는 이유를 묻진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냥그냥 제가 말한 거지.”

내가 굳이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자네에게 물었어. 자네는 그래서 내게 털어놓았지. 울고 있는 이유라는 걸.”

말도 안 돼. 다니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파는 단호했다. 그 와중에 다니엘은 어느덧 자신이 들리지 않는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틈에 다시 그의 앞에 둥지를 튼 견공의 온기가 비로소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은 조그맣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노파 덕분이었다. 그 과정이 못마땅하긴 해도 이야기를 들어준 건 감사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입을 열려다 멈췄다. 자신의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노파의 이름을 기억해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태까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그런데 이상했다. 얼마 전에 누군가 그녀를 보더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다니엘이 기억하기로, 그녀와 임대차 계약을 했을 때 서류에 쓰여 있던 이름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이 헤어졌던 여자 친구의 이름과 똑같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노파의 이름은 잘 부르지 않게 되었었기 때문에. 에스메랄다 M. 가르시아. 그게 다니엘이 기억하고 있는 노파의 이름이었다.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겠어. 먼저 들어가 볼게.”

, .”

다니엘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노파의 뒷모습이 어쩐지 피곤해보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새가 울지 않았다. 다니엘은 절대 뜰 수 없을 것 같은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 아직 새가 울지 않는 것을 보니 아침이 아닌가 보다. 그러니 이 빌어먹을 두 눈깔이 뻑뻑하게 감겨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직 아침이 아니니까, 일어날 시간이 아니니까 일어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당연하다. 다니엘은 몰려오는 피로를 설명할 수 있는, 충분히 논리적인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안심했다. 그 완전무결한 논리에 결함이라는 것은 없었다.

 

미싱 링크1. 울지 않는 새 논리

 

첫 날부터 지각하는 게 배짱이 굉장히 좋군. 괜히 이 지옥으로 자원한 게 아니란 건 확실히 알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니엘은 섣부르게 입을 열려다 지그시 다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 그래도 심기를 어지럽히는 변수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과장에게, 새가 울지 않았으니 아침이 아니라고 판단했노라고 말해봤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 훌륭한 판단력에 감복했소, 다니엘 로 형사, 와 같은 칭찬을 들으며 지옥에서 지옥을 맛보게 될 지도 모르므로 입을 딱 다물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이기로 했다.

자네가 자고 있는 동안 아침 회의가 있었다네. 구역 순찰을 돌 조를 짰네만.”

, 아침 회의. 다니엘은 과장의 시선이 유난히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최근 정말 정신이 없나보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를 짚고 속으로 혀를 찼다. 십 년 넘게 살던 곳에서 실로 간만에 이사를 하느라 익숙지 못한 임대차계약 관련 서류들을 샅샅이 검토해야 했고 가족들도 납득시켜야 했다. 일부러 반차를 내서 이사를 도와주겠다던 존은 그 날 강력 사건이 발생해서 급하게 서에 나가야 했다. 거기까진 그나마 예상 가능했던 범위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제일 황당했던 건 이사하기로 했던 집이 당일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이게 말로만 듣던 부동산 계약사기 사건인가 싶어 계약한 임대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노파의 심상치 않은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무래도 또 구역이 뒤섞였나 봐요. 여기, 자주 그래요. 어쩌죠? 지금 그게 어디 갔는지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고 어쩌면 찾느니만 못한 장소에 떨어졌을지도 몰라요.”

찾느니만 못한 장소라고요?”

, 왜 그 있잖아요. 요즘 나타난 이상한 것들이 득시글거리는 데 떨어졌으면 나도 몰라.”

그 쪽이 모른다고 하면 나는 어쩌라고. 계약할 때부터 속편한 노인이구나 싶었는데 집 한 채 정도는 사라져도 여유로울 정도로 갑부인가 싶었다. 그럼 그만큼 자산이 넉넉하지 못한 내 돈은? 아니, 내일부터 출근인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이 잔뜩인 건 둘째 치고 당장 오늘 밤 묵을 곳도 없다는 말 아닌가. 뭐가 나타날지 모르는 거리에서 노숙이라고? 생각하기도 싫다. 다니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있을 무렵 수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기침소리와 함께 다시 말이 들려왔다.

근데 젊은이, 총각이에요?”

질문을 듣고 울컥하는 바람에 다니엘은 가볍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아마 수화기 너머로 들렸을 것이다. 최대한 노인은 공경하자는 게 그의 지침이었지만 이번 질문에는 퉁명스레 대꾸해버렸다.

그건 왜 물으세요?”

총각이야 아냐? 그것만 말해 봐요.”

아주 그냥.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노파였다. 다니엘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약혼한 사람이 있어서 총각일 예정이 없었는데요, 지금은 어째 그럴 일정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노파가 다시 물었다.

그럼 총각이라는 거지?”

.”

돌려 말했더니 굳이 확인사살까지 하는 노파는 만만한 사람은 아닌가보다 싶었다. 그리고 그는 수화기 너머로 다시 홀홀 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머물 곳 없으면 잠시 우리 집에 와 있어요. 새로 집 마련될 때까지. 마침 방 하나가 남거든. 딱 한 명만 쓸 수 있는 방이라 좀 캐물어봤어요. 괜히 여자라도 끌어들이면 나도 곤란하니까. 불쾌했다면 미안해.”

아뇨. 여자 문제라면 그다지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 혼자가 좋거든요. 다니엘은 굳이 노파가 묻지 않은 말까지 붙여가며 대답하는 자신을 자각하곤 쓴웃음을 지었다. 노파가 불러주는 주소로 가니 생각보다 아담하고 정겨운 주택이 보였다. 그 앞에 서서 아직 덜 자란 보더 콜리를 어루만져주고 있는 노파는 어딘지 헬살렘즈 롯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다.

자네, 내 말은 듣고 있나? 아직 잠이 덜 깬 거야?”

아닙니다. 듣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영 못마땅하게 딱딱거리며 서 있는 과장을 관찰해 보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회의가 순탄하진 못했나 보다 싶었다. 보통 순찰을 야간이나 심야에 21조로 정해진 구역을 순시한다. 경찰차를 타고 대로를 돌다가 우범지대에 들어서면 골목으로 도보 순찰을 나가기도 한다. 우범지대가 아니라도 정기적으로 맡은 구역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것이 정해진 원칙이다. 두 명이서 한 조가 되는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이 곳 8번 관할지역, 헬사렘즈 롯에서는 순찰을 돌아야 할 장소는 많았고 인력은 적었다. 인력이 부족한 탓에 굳이 과장이 나서서 신경쓰지 않을 일까지 총괄하고 있는 것이리라.

알다시피 인력이 부족하네. 그래서 최대한 배정을 했지만 아직 한 명도 배정받지 못한 구역도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다니엘은 생각해보았다. 최대한 배정을 했다는 말은 아마 두 명이서 조를 꾸리지 못한 구역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헬사렘즈 롯에서 단독으로 순찰을 나가는데 다른 사람들이 쉽게 납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장은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배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한 지역이 남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지. 어쩌면 회의 시간에, 누구도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유일하게 지각한 사람에게 넘겨주자고. 아직 첫 출근이라 대면도 제대로 못해본 상대를 멋대로 판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시선을 피해 괜히 눈을 돌리는 과장의 행동이 그런 의구심을 부추겼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마치, 이별을 고하기 전 여기저기 눈을 흘겨보던 그 여자처럼.

그래서 말인데-”

과장님.”

?”

생각해보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과장이 이상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니엘도 이런 자신이 낯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충동적인 자신은 여태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배정받지 않은 그 구역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느낌은 굉장히 낯익었다. 그는 항상 생각보다는 말이 빨랐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다. 항상 싸울 때면 먼저 날이 선 말을 쏟아내는 쪽은 그였고 사과를 하는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그는 지기 싫어했고 지기 전에 이겨버릴 만큼 충동적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생각이 말보다 앞섰던 적은 에스메랄다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뿐이었다.

자네, 그거 진심이야? 오기라든가 괜한 압박감이라든가 그런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

아냐. 다니엘 로라는 남자는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일리는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떠나간 것이 자신의 잘못일 리가 없었다. 이별 전과 이별 후 사이의 실종된 간극, 미싱 링크를 메우기 위한 여정이 그런 비극적인 결말일 리 없다. 그 여자가 전적으로 잘못했고, 잘못된 기대를 했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떠나갔다. 자신은 전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것을 증명해 내야만했다. 지금 하는 행동이 단순히 과장에게 지고 들어가기 싫은 자의 충동 같은 게 아니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이게 충동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의 충동은 숭고한 희생을 위한 과정이었고 그러니까 결국 에스메랄다가 떠나간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 모든 사실을 증명하고픈 충동에 휩싸여, 다니엘은 자신 있게 가슴을 펴고 흘러내린 앞머리 너머로 과장을 바라보았다.

아뇨. 진심입니다. 제게 맡겨 주시죠.”

말이 끝나고 나서는 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과장은 아마 자원은 했다지만 무언의 압박에 떠밀려 온 사람 같았고 여기 모인 대다수가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과장의 생각은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몇몇 정의감과 사명감 넘치는 이들로만 유지될 만큼 이 곳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위험한 일에 있어서는 대부분 소극적으로 발을 뺄 것이고 그런 비겁함은 그들에게 동질감이라는 안도감을 선사해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다니엘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지원 공고가 나간 지 단 한 시간 만에, NYPD 최초로 이 지옥으로 자원한 사람. 비겁한 자신들을 비웃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자원에 감사한다며 웃는 과장의 일그러진 표정을 모른 척 했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제 어느덧 해가 하늘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낮에는 해가 뜬다. 그것은 이 곳 헬살렘즈 롯에서도 변함없는 진실인 것 같았다.

다니엘은 그 때 문득 또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새가 울지 않는 이유는 새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떠나갈 수 있는 날개가 있는 그들은 굳이 이 위험천만한 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울고 있는 것들은, 자유롭게 떠나갈 날개를 꺾인 채 스스로 원해서 지옥에 남아있다고 자부하는 측은한 존재들이었다. 그 완전무결한 논리에 결함이라는 것은 없었다.

 

 

 

"제군들, 오늘부터 우리는 더 이상 NYPD가 아니다."

-3년전 가이저 뉴욕 경찰 청장 연설문 첫 문장-

 

미싱 링크 0. 그 남자의 지원 동기

 

뉴욕 경찰에는 8번 관할구역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맨 처음에는 남부 맨해튼 15번 관할구역으로 출발했다가 16번 관할구역으로 넘어가고 31년이 지나 8번 관할 구역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9년이 더 지나가고 8번 관할구역은 다른 지역과 통폐합되었으며 지부를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떠나간 뒤 건물은 허물어졌다. 지금은 그 자리가 남아있는지 아니면 다른 건물로 흔적이 메워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누군가는 알고 있을 테지만 사람들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뉴욕 경찰 8번 관할 구역이 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은 3년 전 대붕락 때였다.

"오늘부터 이계와의 게이트가 연결된 지역을 중심으로 8번 관할구역을 다시 창설하고 이 지역을 관할하는 경찰은 HLPD라고 명명한다."

청장의 공식적인 발표문이 나간 뒤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눈부신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전세계로 생중계 됐다. 그 선언을 모르는 뉴욕 경찰은 이제 별로 없을 테지만청장의 연설문 첫 문장에 담긴 진짜 의미를 간파한 경찰도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아니라 오늘부터 저들은, 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HLPD로 자원할 사람은 내일 정오까지 지원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모두,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말의 방점은 뒷 부분에 있었던 것 같다. 다니엘은 상사가 그의 앞에 늘어선 부하들을 죽 둘러보면서 말을 끝맺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과 갓 태어난 딸 하나 그리고 LA 해변가에서 만났던 매력적인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부장이었으니까.

"이봐, 다들 그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마치 전염병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한다구?"

"제대로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 안이 어떤 진 들어가봐야 아니까."

"대니, 그러면 역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이미 지원서 다 썼는걸."

다니엘은 서 앞에 있는 식당에서 동료이자 선배인 존이 그를 상대로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는 것을 한마디로 저지했다. 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입을 딱 벌렸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갈림길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저렇게 고민 하나 하지 않고 질러버리다니. 질려버렸다. 그런 표정을 하고서.

", 에스메랄다랑은 어쩌고?"

울컥, 하고 다니엘의 표정에 변화가 온 것은 존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다니엘은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금연석인데요, 라고 말하는 주인과 옆에 있는 동료이자 선배인 존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라이터를 점화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마지못해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투덜거렸다.

"그 이름은 꺼내지도 마."

"뭐야, 설마 헤어져-"

"아 진짜."

다니엘은 참다 못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스메랄다와 헤어진 것은 바로 그저께 아침이었다. 그 여자가 정말 지독했던 부분은 아침에 이별 통보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인들이 다 보는 경찰서 바로 앞에서. 야근하느라 전날 밤을 꼴딱 세웠던 다니엘은 덕분에 뭐라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 그녀를 보냈다. 경찰서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거나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후에는 더 분했다. 그냥 그 때 경찰로서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줄걸. 헤어진 뒤에 남은 것이 저릿한 후회도 아름다운 추억도 아닌 수치스러운 분노라는 게 그의 가슴 깊숙이 상처를 입혔다. 그 분노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향했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존은 그 자리에 없었나 보다. 멍청한 표정으로 불쾌한 질문을 해대는 걸 보니 틀림없다. 존은 사려 깊고 온순한 사람이었으니까 전말을 알았다면 다니엘 앞에서 그런 질문을 했을 리 없었다.

다니엘은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경찰서 입구 앞에 섰다. 5년 넘게 슬픔도 행복도 같이 나눠온 연인이었는데, 떠나갈 땐 그렇게 한 순간이더라. 모든 정보를 종합해 봐도 그녀가 헤어지자고 한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속되는 사건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미싱 링크, 다니엘은 불현듯 어릴 때 자주 봤던 경찰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중얼거렸던 단어를 떠올렸다. 실종된 중간 과정, 사라진 진실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린 시절 자신의 영웅이 다시 고뇌에 휩싸였다. 진실을 붙잡을 새도 없어서 꿈을 꾸었나 했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전화를 해봤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앞으로 찾아가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함께 웃고 떠들었던 장소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니엘은 마음을 굳혔다.

"이런 곳, 더 있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먹었던 다음 날 아침, 부장에게서 8번 관할 지역에 관한 자원 소식을 들은 지 1시간만에 다니엘 로 경부보는 이별을 통보받았던 입구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며 모두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무를 마음도 먹지 못할 테니까. 다니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절대 자신에 대한 유치한 반항같은 게 아니다. 이건 앞으로 자신의 여생동안 기리고도 남을 숭고한 희생이었다.

"다니엘 로, HLPD에 자원하겠습니다!"

 

시선 교환의 법칙

~피를 부르는 네메시스의 케첩~

 

0.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 햄버거를 사러가는 길에는 예상치 못하게 비탈진 장애물을 만났지만 그 후로는 죽 내리막이었다. 가는 길 보다는 돌아오는 길이, 그리고 돌아오는 길보다는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일이 훨씬 수월했다. 여기까지는 내리 활주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진행됐으니 식사 후 뒷정리는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는 여정이 될 것이다. 레오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햄버거 봉지와 감자튀김을 담아두었던 네모난 종이 곽을 봉투에 담았다.

부탁하네, 레오나르도군.”

탁자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큼지막한 손 안에 있던 봉지와 종이 곽을 조심스럽게 봉투 안으로 떨어뜨렸다.

착하네, 소년.”

스티븐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마쳤다. 봐야할 서류가 있었지만 일거리를 놓아둘 탁자가 잔뜩 사온 패스트푸드로 점령당했기 때문이었다. 레오가 앞에서 봉투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자 그가 웃으면서 서류 너머에 널브러져 있던 봉지를 건넸다. 그 사이에 소닉은 레오가 들고 있던 봉투에 자신의 몫을 골인시켰다. 나이스. 레오가 엄지를 치켜들자 소닉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레오의 어깨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뒷정리라는 건 버겁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수고가 필요한 오르막길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해져서 남의 자전거 뒷자리에 편승해가는 느낌이었다. 봉투에 넣어줄 필요까진 없는데 다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왠지 쑥스러웠던 레오는 다른 곳에 떨어진 쓰레기가 없다는 것을 괜히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재프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조금 조심해야할지도 모른다. 레오는 그의 앞에 서서 봉투를 흔들었다.

, 재프씨도 쓰레기 주세요.”

, 니가 치우는 거냐?”

아까부터 봉투에 쓰레기를 담으러 다녔지만 상대는 영 모르는 척이다. 어차피 보란 듯이 생색내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지만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재프의 표정은 마음에 걸렸다. 레오는 다시 한 번 봉투를 흔들었다. 스스로 쓸어 담아도 되지만 도통 무게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재프의 앞에서는 매번, 일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지워주고 싶어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 못마땅해 하고 있던 건 매번 자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을 무렵, 재프가 잠시 기다리라며 그가 앉아있던 자리 앞에 그득하게 쌓여있는 봉지며 곽들을 레오가 들고 있던 봉투 안에 몽땅 담았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쓰레기를 버려주는 재프를 보며 레오는 어쩌면 자신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뭘 그렇게 쳐다 봐? 이제 쓰레기 없는데.”

.”

혼자 감상에 빠져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었나. 레오는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어둠을 응시했다. 이대로 더 이상 바라보고 있다가는 어쩌면 다큐에서 나왔던 대로 마음이라는 게 교환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증명된 것이 없는 법칙이었지만. 옳지 못한 오해로 인해 느껴지는 죄책감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숨기고 싶은 감정이었고 더군다나 앞에 있는 상대는 치부를 드러내기에는 제일 부적절한 상대였다. 레오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그에게서 돌아섰다.

아 잠깐만. 이거 까먹었다.”

레오가 쓰레기를 잔뜩 먹고 배가 불러온 봉투를 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 재프가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서자 재프가 케첩이 들어있던 것 같은 플라스틱 용기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일회용 케첩만 주기 때문에 사무실 어디엔가 있을 조미료 찬장을 뒤진 게 틀림없었다. 허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스나 스티븐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괜찮을 건가 싶었다. 어쩌면 딱히 밤낮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사무실에 당연히 구비되어야 할 물품일 수도 있겠고, 숱한 야근을 버텨내며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라이브라의 케첩이 바닥난 모양이라고 레오는 판단했다. 하지만 재프가 건네주는 케첩이 생각보다 묵직해서 이질감이 들었다. 좀 더 찬찬히 관찰해보니 생각보다 케첩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용기 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것도 아니고 힘을 주면 그대로 새빨간 케첩이 새어나올 정도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케첩을 담고 있는 용기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이걸 버리기엔 아까울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재프가 씨익 웃었고 레오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뿌직.

캬하하 음모에 케첩이 묻었네!”

으으…….”

지금 상황은 잠시나마 방심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 맞았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레오는 문득 재프가 케첩이 남아있는 용기를 자신에게 건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인간 실수했군. 레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개방된 입구를 재프에게로 돌렸다.

빠직.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복수라는 겁니다.”

당당하게 복수를 선언하는 레오를 보며 재프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은근히 의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나 보여서 레오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재프는 입술 근처에 묻은 빨간 케첩을 혀로 핥았다. 마치 맹수가 사냥 전에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오냐, 그 도전 받아주지. 피의 복수다.”

그래봤자 케첩은 제 손에 있거든요!”

레오는 재빨리 소파 뒤로 돌아가 재프를 향해 케첩을 있는 힘껏 발사했다. 그렇게 라이브라의 사무실은 붉은 케첩 빛으로 물들었고 무작정 수월해지기만 할 것 같던 여정도 끝이 났다. 그리고 예고된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1.

재프씨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에요.”

, 너도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솔직히 니가 그렇게 정확도 없이 뿌려대지만 않았어도 사무실이 이 꼴이 되진 않았어.”

재프씨가 괜히 케첩 뺏겠다고 능력만 안 썼어도 병이 터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나는 내 혈류를 조절하는 건 자신 있어. 니가 무식하게 세게 잡아당겨서 그렇지!”

그건-”

그럼 그렇게 자신 있다는 기술을 쓸 때 제가 힘을 줄 것까지 계산에 넣으셨어야죠! 라고 반박하는 게 반박이 되는 건가 잠시 망설이던 레오가 입을 막 열었을 무렵 서늘하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속사포처럼 그칠 줄 모르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멈췄을 때를 맞춰 일부러 문을 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기가 적절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렇게 시기를 맞춰 문을 열었을 것 같은 인물이 그 앞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스티븐은 항상 신고 다니는 구두 끝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린 다음 둘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랑 클라우스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

잘 다녀오세요, 라고 적절한 인사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겨진 뒤였다. 비록 임무로 인해 사무실을 비우는 것이었지만 재프와 레오는 스티븐의 마지막 말에서 왠지 모를 복선을 느꼈다. 복선이라는 게 그렇듯이 결과가 닥치고 난 뒤에야 그 존재가 의미 있어지겠지만 지금 그 복선의 존재 의미를 실감하고 싶진 않았다.

, 나갔다 올 때까진 사무실을 원상복구 해놔야 한다는 거군.”

그러네요.”

하필 이럴 때 길베르트씨가 없다니.”

불평은 하지만 먼저 신속하게 행동에 나선 것은 재프였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사무실 벽과 천정에 묻은 케첩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전력을 다하기 시작하자 레오도 바닥에서 케첩과의 2차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있는 힘껏 세게 문질러도 케첩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붉은 잔병들이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게 저항하자 재프와 레오는 전략을 바꿔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속 전략의 출처는 접근성이 용이한 통신망이었다.

찾아보니까 식초가 케첩 지우는데 좋다네. 야 음모머리 나가서 식초 좀 사와라.”

여긴 없어요?”

없어.”
사무실에 구비되어 있던 식료품 중 식초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티븐과 클라우스는, 임무를 맡으러 나간 이상 일찍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식초를 이용해 케첩을 제거하면 그 뒤로는 식초의 시큼한 냄새를 제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라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다녀올게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레오는 길을 나섰다. 머리카락과 옷에 묻어있던 케첩을 아직 제대로 닦아내지 못했다는 게 맘에 걸렸지만 헬사렘즈 로트가 머리와 옷에 케첩 묻히고 다니는 정도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곳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건 그랬지만 스스로의 몰골은 알아야겠다 싶어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에 붙어 있는 사이드 미러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점검해보았다. 그런데 예상 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줄 알았던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어두운 갈색이었다.

이상하네. 케첩이 그렇게 잔뜩 묻었는데.’

손으로 닦아내긴 했지만 묻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재프가 처음에 뿌렸던 양도 만만치 않았지만 힘 씨름을 하다가 공중에서 케첩이 터졌을 때 한바가지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케첩이 흩뿌려졌던 옷을 보니 머리카락에서 묻어나온 것 같은 진한 갈색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혹시나 해서 머리카락을 슥 만져보니 시큼한 냄새가 여전히 진하게 풍겼다. 다만 그 냄새가 방금 전과 좀 달라진 것 같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냄새가 기분 나쁘게 후각을 자극했다.
이상하네. 케첩도 색깔이 변하나?’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봤던 케첩에 한해서라면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헬사렘즈 로트, 다른 곳과는 상식의 기준이 달라서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면 오히려 상식이라는 경계선 바깥으로 나가떨어지는 곳이다. 경계선 바깥으로 밀려나 눈에 띄는 것만 이라면 견딜 만 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상황에 대응하는데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였다. 레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빨리 식초를 사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붉은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2.

이건, 엄청난 광경이로군요.”

, 길베르트씨.”

재프는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길베르트를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에서는 바라마지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험이 많은 집사라면 케첩 얼룩 정도는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내는 것보다 쉬울 것이고 재프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식초로 케첩을 제거한다고 쳐도 그 다음이 더 문제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사의 표정은 재프가 예상했던 것보다 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무슨 일이야, 길베르트씨?”

이 자국들은 빨리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재프는 길베르트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긴장감은 케첩이 아니라 피로 물든 사무실에서 느껴지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재프는 어느덧 사무실에서 나는 냄새가 미묘하게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룩에서 풍기는 냄새는 더 이상 케첩이 아니라 피에 가까웠다. 자국을 지우는데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묻은 케첩은 벌써 기분 나쁘도록 칙칙한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이건?”

네메시스의 케첩입니다. 맛이 뛰어난 조미료로 거래되지만 못지않게 위험하죠. 특히 종류 불문하고 피와 접촉하면 그 자체가 아주 강력한 주술의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 무슨 주술?”

피를 부르는 주술이죠. 사실 저주에 가깝습니다만 케첩이 피를 흡수하고 거기에서 풍기는 진득한 피 냄새가 경계선 너머에 닿으면 이계에서부터 복수를 하기 위해 복수자가 소환됩니다. 주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공격적인 존재들로 아주 오래된 복수가 성공하기를 꿈꾸죠. 네메시스라는 복수의 여신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도 이런 점 때문입니다.”

아니, 무슨 그런 게 조미료야?”
재프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그에 비해 길베르트씨는 여전히 평온했다.

위험한 만큼 맛은 일품이니까요. 예로부터 인간들은 쾌락적인 보상을 위한 위험을 무릅쓰곤 했습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맞으니 원래대로라면 제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쓰기 위해 찬장 안 쪽에 숨겨뒀습니다만. 그리고 피와 접촉했다는 것도 좀 놀랍군요. 케첩이 피와 접촉할 가능성은 희박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프는 찔리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길베르트는 무언가의 전말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는 재프가 했던 것처럼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자상하게 웃으면서 상대를 안심시켰다.

, 괜찮습니다. 라이브라의 사무실은 여러 가지로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라 아직 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한 같으니. 이 정도 양이라면 사실 이미 나타나고도 남았어야 했죠. 하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빨리 제거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만.”

재프는 길베르트의 말을 듣는 순간 여태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로 밀폐된 사무실이라지만 어찌됐든 이 사악한 냄새가 그 틈을 비집고 나갔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럼에도 아직 복수자가 소환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다른 곳에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재프는 문득, 터진 케첩을 뒤집어쓴 채 바깥으로 나간 레오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방비하고 평범한 소년 한 명을.

제기랄!”

제발 늦지 않았기를. 복수라니, 비록 얼빠진 녀석이긴 하지만 그 녀석이 무엇 때문에 복수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부조리했다. 재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길베르트를 무시하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3.

레오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넘쳐나는 헬사렘즈 로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넘쳐나는 일상에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특히 엄청난 분노를 자신에게 표출하고 있는 존재와 맞닥뜨리는 일에 관해서는 더욱. 여태까지는 주로 주변의 분노와 광기에 휘말리는 식이었지 자신에게 그 살기가 집중되는 일은 없었다. 살기라는 것은 명확한 목표가 존재했고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이유가 존재해야 했다. 그 이유가 없다면 굳이 살기의 목표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굳이 말하자면 최초의 사건이 없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과 비슷했다. 레오는 헬사렘즈 로트에서도 아직 그 인과관계가 유지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오늘부로 그 안도감도 깨지게 되었다.

…….”

갑자기 일어난 일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다는 것은 자명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는 이해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레오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다리가, 안 움직여.’

여태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꽤 많이 겪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군가의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적대감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굳이 신들의 의안을 쓰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강렬한 감정이 레오를 짓눌렀고, 동공 너머로 그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아무리 그렇게 속으로 소리쳐도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레오는 소닉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소닉 너라도 도망쳐. 아니 너는 도망치는 게 아냐. 가서 재프씨를 불러와. 왜 하필 그 사람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스도 스티븐도 길베르트도 없는 마당에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소닉이 전속력으로 재프를 부르러 가고 레오가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복수를 위해 이를 갈던 존재는 벌써 준비를 마쳤다.

복수.”

죽는다. 복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기능을 회복한 다리가 달릴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복수를 부르짖는 존재들이 잇몸이 버거워 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온 어금니로 목표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레오는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눈에 관한 비밀을 풀고 미셸라와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전 까지는. 레오의 소망과 달리 어금니는 그의 발치에 까지 도달했지만 이대로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여정을 끝낼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

레오는 괴물의 어금니를 박차고 내달렸다. 요행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신들의 의안을 개방해 복수자의 움직임을 읽어냈고 그 움직임에 맞춰 어금니를 박차고 뛰쳐나간 것이다. 하지만 신들의 의안을 개방하면서 부작용이 뒤따랐다. 복수자들이 뿜어내는 증오와 분노가 여과 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엄청난 감정의 파고가 밀려왔다. 한순간 기지로 육체적으로 말살당할 위기는 넘겼지만 이제는 정신적으로 말살당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은 고장 날 것만 같이 뛰어댄다. 잔뜩 활성화된 신경이 머리부터 손끝까지 저릿하게 만든다. 다음번 공격도 피할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막아야 할 텐데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처럼 끈 시간이 의미가 없어진 상태에서 복수자가 다시 공격해왔다.

!”

그 때 였다. 레오의 앞에 갑자기 거대한 존재가 불쑥 솟아올랐고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복수자들은 예기치 못한 방벽에 튕겨져 나갔다. 레오는 그의 눈앞에서 익숙한 벽을 볼 수 있었다.

너희는-”

레오는 벽을 만들어준 것이 아까 햄버거를 사러 갈 때 봤던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조그마한 존재들이 서 있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레오의 팔과 다리를 끌어당겼다. 되도록 저 사나운 존재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나운 운전자들을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던 거대한 벽은 복수자 앞에서는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복수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 때문에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레오는 그 느리고 작은 존재들이 절대 제 때 공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모두를 지키고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 레오는 알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복수할 상대는 제대로 골라야지.”

.”

레오는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그림자를 느꼈다. 하나는 소닉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눈앞에서 붉은 실들이 춤을 추더니 이내 모여들어 하나의 칼을 만들어냈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레오가 상황을 이해했을 무렵에는 벌써 핏빛 칼날이 복수자들을 관통했다. 복수자들은 몸부림치더니 끓어오르던 기포가 터지듯 소멸했다. 그 바람에 그 안에 품고 있던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재프가 앞을 가로막아서고 있던 덕분에 레오는 추가로 붉은 액체를 뒤집어쓸 일이 없어졌다.

재프씨, 등이…….”

레오는 재프의 등에서 타는 것처럼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재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붉은 액체가 묻은 옷을 레오가 보는 앞에서 벗어 던져버렸다.

바지에 안 튀어서 천만다행이네.”

재프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며 핏빛 검을 거둬들이자 비로소 상황이 종료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레오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이, 설마 다쳤냐?”

재프가 급하게 손을 내밀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팔까지 꽉 잡아버렸다. 그 바람에 재프도 같이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리게 되었다. 막상 받아낼 때는 그 감정에 압도되어 마비되어 있던 감각들이 풀리면서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모습을 재프의 앞에서 보여 버렸다.

……우냐?”

,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눈물이 나오는 거라고요!”

계속해서 넘치듯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떻게든 그쳐보려고 했지만 매정한 눈물은 그럴수록 주룩주룩 쏟아질 뿐이었다. 최악이다. 이 사람 앞에서 울어버리다니.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던 레오는 재프가 어느덧 꿇어앉아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두 사람을 횡단보도를 건넜던 작은 존재들이 둘러쌌다. 마치 두 사람을 지켜주려는 것처럼.

그냥 울어. 운다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이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는 기분은 이상하다.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더없이 어울리게 느껴졌다. 여전히 한쪽 팔을 잡힌 채 조심스럽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재프에게 레오는 끅끅거리면서 말했다.

, 재프씨한테 복수한다는 말, 취소할래요.”

?”

그 말은, 너무무서운 것 같아요.”

복수라. 레오는 재프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괜찮아. 니 복수는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고…….”

어딘지 엇나간 언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 것처럼 재프는 말끝을 흐렸다. 어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아예 주저앉았다. 하얀 옷이 더러워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레오의 머리에 손이 하나 푹하고 얹혔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의 손은 이상하게 더 무거운 것 같았다. 레오는 어느덧 재프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을 교환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는 것. 그 사실에 굳이 실험까지 해 볼 필요는 없었다. 오랜 시선교환 끝에 재프는 툭 던지듯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네게는, 적어도 너에게만은 복수당할 만한 짓,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시선 교환의 법칙

   

[그거 아십니까, 인간이란 종족은 마음에 드는 상대일수록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군요.]

[그거 참 희한하군요. 저희는 그럴 땐 촉수로 교감하죠.]

[그렇다면 그 쪽의 촉수와 인간의 눈이란 건 같은 종류의 기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지금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 윗 촉수에 빛이 탁, 하고 와버렸습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그거, 아십니까?”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은 레오가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하게 느껴졌다. 만담을 기반으로 한 익살스러운 다큐멘터리는 여기, 헬사렘즈 로트에서 유난히 인기가 많았다. 종족 간의 갈등을 가장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지난번 스페셜 편에서 인터뷰를 한 바로는 익살스러운 해설자가 마음에 든다는 거주민이 많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좋아요. 그 날 방영분에서 레오는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익숙함을 거부하는 헬사렘즈 로트는 평범함이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라이브라의 사무실에서 딱딱하지 않지만 푹신하지도 않은 소파에 앉아 감자 칩을 한 팔에 끼고 티비 방송을 보고 있자니 그 평범함이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저희, 시선을 교환해보죠.]

[부끄럽군요. 평소에 눈을 이렇게 쓰는 일은 없었는데-끼얏]

맘에 들면 정말 시선 교환을 많이 하나?”

묘하게 오르내리는 해설자의 음성에 집중하느라 내용 중 반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 와중에 끼어들고 싶은 부분이 생겼다. 예전에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좋아하는 만담 방송을 시청할 때도 레오는 이런 타이밍에서 한마디씩 하곤 했다. 이런 타이밍이 무엇이냐 하면 모두가 웃기 시작하고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는 바로 그 때. 그러면 옆에 있던 누군가가 레오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괜한 고지식함에 피식 웃어버리거나 모두가 웃을 때 질문을 던지는 연유에 관해 왜 그런지 물어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은 없었고 대신-

"어이, 음모머리. 넌 티비랑 대화 하냐?"

"시끄러워요."

"아앙?"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다. 재프 렌프로, 라는 이름을 떠올리기 이전에 성가신 남자, 라고 레오나르도는 속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누가 저 사람들이랑 대화했어요? 그냥 혼자서 중얼거린 거지!"

"하하 저 '사람' 아니거든~이계인이거든~"

. 레오는 아주 상식적인 부분에서 반격 당했다는 사실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분노를 식혀줄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계인도 인()이 들어간단 말이지. 그렇게 치자면 소년의 말도 아예 틀린 건 아니지 않을까?"

"스티븐씨."

스티븐.A.스타페이즈. 에스메랄다식 혈동도를 쓰는 남자는 쓸데없이 가열된 열기를 진화하는 덴 언제나 능숙했다. 다만 그는 진화할 뿐 딱히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재프는 재밌을 뻔 했던 분위기가 식어가자 투덜거리면서 다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레오가 눈치 챘던 점은, 재프가 투덜거리긴 해도 스티븐에게 말대꾸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야 배고픈데 햄버거 어떠냐, --."

"햄버거 좋죠. 재프씨가 사오는 건가요?"

"그럴 리가. 그런 건 원래 막내 일이야."

너무 당연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녜요?”

당연한 거니까.”

레오는 당연한 걸 당연하다 말했을 뿐인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건 재프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생각보다 길게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재프였다.

해보자는 거냐, 음모머리.”

혹시, 스티븐씨나 크라우스씨는 햄버거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햄버거?”

스티븐이 고개를 들었다. 창가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내용을 알 수 없는 수첩을 넘겨보고 있던 그는 뜬금없이 발의한 제안의 저의에 관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향했다.

햄버거 좋지. 크라우스는 어때?”

. 점심으로 햄버거는 괜찮겠지. 그런데 그걸 다 들고 오기엔 레오나르도군 혼자는 좀 버거울 것 같은데.”

.”

재프는 그제야 작전을 눈치 채고 레오를 노려보았다. 레오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재프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재프씨랑 같이 다녀올게요!”

* * *

, 진짜 완전 약아빠진 놈이었구만. 치사하게.”

이 정도 수완도 없이 헬사렘즈 로트에서 어떻게 살아왔을 것 같으세요?”

재프는 익숙하게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 걸터앉는 레오와 소닉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레오 역시 그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마음에 드는 상대와는 시선 교환을 자주하고 싶어지는 건 맞을 테지만 오랫동안 서로 눈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는 수많은 이유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어렴풋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레오는 재프 덕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럽게 밀리네. 여기 일방통행인데 또 어떤 놈이 껴든 거 아냐?

차라리 걸어가는 게 빠르려나요.”

그거, 내 애마에 대한 간접적인 모욕이냐?”

아니거든요. 그냥 길이 밀려 있으니 갈 수 없다는 아주 순수한 의도로 말한 거였거든요.”

그냥 말해본 건데 뭘 그렇게 성을 내냐? 하여간 이래서 머리가 음모 같은 녀석은 안 된다니까. 뻣뻣하다 못해 부러지겠다.”

레오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재프의 말대로 차는 멈춰 서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 거리에서 이 정도로 차가 밀리는 것은 처음이라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싶었다. 원래부터 통제라는 게 가능한지 여부가 불분명한 헬사렘즈 로트였지만 교통 시스템은 기존의 뉴욕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건 또 뭐야.”

재프의 말에 레오는 그의 머리 너머를 내다보았다. 꽉 막힌 차도 저 앞에서 한 무리의 존재들이 어수선하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차에서 내려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운전자들이었다. 다양한 체형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문제는 키가 큰 운전자들이 줄 앞쪽을 차지하고 중얼거리고 있어서 그보다 키가 작은 존재들은 무슨 상황인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운전자들은 마치 키로 서열을 잰 것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보통은 줄을 서도 키가 작은 순서대로 앞부터 서지 않던가. 레오는 흔치 않은 상황을 살펴보다가 문득, 그 행렬의 가장 앞에 우뚝 서 있는 높은 벽을 발견했다. 운전자들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살아있는 벽이었다. 그 키가 무척 커서 재프가 자신의 애마에 발을 디디고 서는 수고를 감수했는데도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오가 물었다.

다른 길로 돌아갈까요?”

그래도 되긴 되는데, 그냥 무슨 일인지 궁금하잖냐.”

크라우스씨랑 스티븐씨 배고프실 텐데.”

괜찮아, 괜찮아. 좀 늦는다고 죽을 사람들이냐.”

대신 저희가 죽을지도 모르죠. 레오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재프가 냅다 그를 들어올렸다. 갑작스럽게 들어 올려지는 느낌에 레오는 당황해서 재프의 하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야 미친, 아프다고!”

뭐 하시는 거예요?”

-, 내가 안 보이니까 니가 내 위에 올라가서 좀 봐봐. 머리카락 빠진다 미친놈아!”

레오는 재프가 자신을 목말 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가 안정적으로 그의 어깨에 걸쳐있었고 머리는 마치 방향타처럼 가슴 앞에 불쑥 솟아있었다. 오토바이 위에 올라서서 목말을 타니 확실히 시야가 트이면서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벽의 너머가 보였다. 아마 레오의 머리 위에 올라서 있는 소닉은 더 잘 보일 것이다.

저 잘 안 보이는데 어깨 밟고 서도 되나요?”

잘 보이는 거 다 안다. 죽을래?”

. 레오는 아쉬워하며 벽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그 앞에서는 생각보다 엉뚱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벽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실 존재라기보다는 정말 벽이었다. 생명이 없는 벽을 세우고 그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존재들이었다. 아주 작고 연약하고 그 이상으로 느리게 걷는 존재들은 헬사렘즈 로트에서 길을 건너면서 꽤나 박대 받았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래서 길을 건너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했다. 그것은 마치 목도리 도마뱀이 스스로의 크기를 부풀리는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들과는 반대되는, 아주 크고 강해보이는 벽을 만들어 놓고 유유자적하게 길을 건너는 것이다. 사실 유유자적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한걸음을 필사적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벽으로 가로막힌 길 뒤에 있는 존재들은 그 너머로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지만 이것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도 그 작은 존재들의 힘인 것 같았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겨우 일방통행용 좁은 길 하나 건너는데 힘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왠지 레오에게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딘지 자신과 비슷했다, 저 존재들은. 신들의 의안이라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혼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레오 자신과.

저희, 다른 길로 갈까요?”

? 무슨 일인데?”

…….”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말을 하면 상황을 파악한 성난 운전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되었다. 안타깝게도 벽 너머를 볼 수 있는 운전자가 없는 상황에 면식이 있어 협력할 수 있는 운전자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눈에 띄는 시도를 하고 있는 두 인간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전부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레오는 안전모에 장착되어 있던 고글을 썼다.

재프씨가 직접 봐요.”

재프가 레오를 목말 태울 때 그랬던 것처럼, 그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레오는 의안을 개안했다. 이렇게 주목받는 상황에서 써도 되는지 의문이었지만 사실 여태 그렇게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었다. 고글을 쓰고 개안한다면 아마 특별한 것은 눈 자체가 아니라 고글이라고 받아들여지길 바랄 뿐이었다. 레오는 자신의 시선을 재프와 교환했다.

, 저게 뭐냐.”

보이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는데요.”

레오의 눈을 통해 장면을 목격한 재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운전자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앞에 난리가 났네. 아무래도 헬게이트가 열린 것 같은데 가면 목숨부지하기 어렵겠는걸.”

둘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운전자들은 예상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을 전해듣고 투덜거리면서 각자 차에 올라타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벽 너머 소식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면서 뒤에서부터 차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거리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게 되었다. 이 시간에 이 거리가 그렇게 밀리던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았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시간에 이 거리가 이렇게 한적한 적이 있었던가. 레오나르도는 재프의 어깨에서 내려와 다시 오토바이 뒤에 앉았다.

저희도 출발하죠.”
좋아, 꽉 잡아라. 음모머리.”

?”

재프는 갑자기 오토바이를 한참 뒤로 물리더니 오직 그들만이 있는 대로의 끝에 섰다. 아무도 없는 널찍한 대로는 오직 그들만의 차지였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설마?”

내가 미쳤다고 괜히 저 차들을 물렸겠냐? 난 미안하지만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라서.”

으아아-미친-!”

레오는 곧 여태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 오토바이 위에서 오갈 데 없는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유일한 지지대인 것 같은 재프의 허리를 꽉 잡았다. 허리를 최대한 세게 잡고 그의 등에 밀착한 채 다음에 올 상황을 기다렸다. 가속 페달을 밟은 엔진처럼 박동하고 있는 재프의 심장소리는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게 들려왔다. 다음 순간, 레오는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오토바이를 공중으로 띄운 건진 모르겠지만 특별한 엔진이 있거나 또 쓸데없이 능력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착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잘못하면 벽 뒤에서 애를 쓰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을 짓뭉갤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재프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썼을까? 자신은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라는 재프의 말이 괜히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그 상황에서 레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호!”

우아아-!”

신난 것 같은 남자 한 명과 겁에 질린 것 같은 소년 한 명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고 이어서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낙하 충격과 함께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관성이 레오를 덮쳤다. 이 상황에서는 잡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못하면 팔이 못 버틸지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튕겨져 나가려는 반대 방향으로 재프가 레오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재프의 가슴에 안기듯 머리를 박은 레오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재프는 오토바이를 몇 바퀴 돌렸고 고무 타는 냄새가 진하게 났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레오가 눈을 떴을 때 목격한 것은 터무니없는 경로로 남겨진 대로의 상흔이었다. 역시 인간이 아닌 건가. 레오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놀이기구를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고 손바닥은 땀 때문에 미끄러웠다. 의외로 재프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제 좀 떨어져라.”

.”

레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재프에게서 떨어졌다. 재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레오를 보더니 이내 히죽거리며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지렸냐?”

닥쳐요.”

아깐 아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만.”

당연하죠! 죽는 줄 알았다고요!, 앗 소닉은?

레오는 황급히 소닉을 찾았지만 의외로 멀쩡하게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다행이다.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벗겨진 안전모를 다시 착용했다. 그리고 뒤늦게 다시 횡단보도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는 앞 쪽에 있었지만 이제는 뒤를 돌아봐야 하는 곳에서, 아직 길을 다 건너지 못한 작은 존재들은 놀란 듯 멈춰있었다. 그래도 저 존재들을 깔아뭉개진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레오는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 재프의 뒷모습은 평소와 변한 것이 없는데도 뭔가 달라보였다. 그 때 레오는 길가에 있던 상점에서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 아십니까, 인간이란 종족은 마음에 드는 상대일수록 시선을 교환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군요.]

[다시 들어도 그거 참 희한하군요. 저희는 그럴 땐 촉수로 교감하죠.]

[역시, 촉수와 눈은 마음의 매개체인 걸까 싶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죠.]

[, 그 말, 제가 보증하도록 하죠. 그걸 실험해 본 사람들도 있는데 시선 교환의 법칙을 증명한다고-어디보자 결과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

재프의 물음에 레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녜요. 그나저나 빨리 가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선으로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만약 누군가, 모두가 웃을 때 웃지 않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익숙한 뒷자리에 앉아 출발을 기다렸다.

저기, 벨져. 오늘 티타임에 했던 말은 그냥 잊어 주시오.”

릭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은 릭의 강점이었다. 웃고 있는 릭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고 부담 없이 다가온다. 저 나이에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리라. 그런 추측이 어느덧 마음속에 사실처럼 자리 잡는다.

한편 벨져는, 그가 생각보다 쉬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릭은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의외로, 라는 말이 적당한지 벨져는 잠시 망설이긴 했다. 그가 부담 없이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부담스러운 것은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는 사람은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지.

벨져는 좀 더 릭의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턱을 넘어 그의 우주에 들어가 보고 싶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 역시 깨달았다. 벨져는 짓궂게 웃으면서 릭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 재밌던데. 오늘 밤 숙소에서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

 

사우전드 유니버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어서 저것들이 정말 모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주는 외롭기 보다는 꽤나 복작대는 북새통 같은 곳 일 텐데, 어째서 매번 볼 때마다 마냥 고독한 느낌만 드는 것인지. 마치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벨져는 지금 느낌이 딱 그랬다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릭이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는 사실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 더 좋은 설명 방식을 찾고 있느라 머리 위로 향해 있는 그의 시선을 아래로 불렀다.

네 설명은 뭔가 너무 두루뭉술하군. 실체를 모르겠다. 그래서, 이 우주와 다른 우주가 있다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수도 테니 어차피 시간을 재는 건 의미가 없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학자가 말하는 것도, 네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것도 다 가설일 뿐이잖나.”

그것도 확률이 낮은. 벨져는 그렇게 말하면서 릭의 팔목을 잡아 이리로 끌어왔다. 그의 팔목을 휘감고 있는 시계들은 마치 그를 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자발적인 속박이라는 것 정도일까. 여러 개의 시침과 분침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일사불란한 군집을 보는 것 같았다. 세계 각 지역의 각기 다른 시간을 재고 있는 여러 개의 시계가 절박해 보인 이유는, 자신을 동일한 시간선상에 붙잡아놓기 위한 릭의 노력이 벨져에겐 강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시간이 맞지 않을 때 릭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서 있게 될까.

그야 그렇소만. 가설이라고 해서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니겠소?”

가능성이라. 벨져는 릭의 말에 턱을 괴고 있던 나머지 한 손을 들어 릭을 가리켰다. 릭은 뜬금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벨져의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했다. 벨져는 그 느낌이 좋았다. 손가락으로 시선을 유도할 때 드는 느낌. 벨져는 말을 이었다.

너는 머리가 좋아, . 여러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볼 수 있지. 하지만 그러다보니 가능성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

가능성에짓눌리는.”

그래. 벨져는 아무생각 없이 릭의 이마에 그대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의 손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릭이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능성에 짓눌리는 사람은 그 많은 가능성을 보면서 결국 스스로는 무엇도 불가능하게 돼. 아이러니지.”

그보다, 벨져. 지금 난 그대의 손가락에 짓눌리는 것 같소. 너무 세게 누르는 거 아니오?”

…….”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릭의 이마를 좀 더 세게 눌렀다. 릭이 숨을 들이키면서 벨져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 장난 아니고 정말 아프단 말이오.”

안다. 아프라고 더 누르는 거지.”

릭은 사정없이 짓누르는 벨져의 손가락을 이마에서 떼어내기 위해 상대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지만 생각보다 밀리지 않았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손목에 비해 내리누르고 버티는 힘은 릭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곧 릭은 해결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버티는 대신, 뒤로 물러서는 방법을 택했다. 벨져의 손가락을 떼어낼 수는 없지만 굳이 자신이 그 힘을 받아내며 버틸 필요는 없다. 릭은 슬쩍 의자를 뒤로 끌어 탁자에서 멀어졌다. 벨져의 손가락이 릭의 이마에서 살포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릭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재밌군, 릭 톰슨.”

벨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릭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앞뒤로 아무것도 걸칠 것이 없이 혼자만의 공간에 동떨어져 있는 릭과 그 의자를 다리를 사용해 슬쩍 뒤로 밀었다. 그대로 밀기만 했다면 릭은 바닥에 꼴사납게 뒹굴게 되었겠지만 벨져는 마지막 순간에 의자 다리 사이에 걸쳐져 있는 지지대를 발로 눌러 아슬아슬하게 무게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거기서 벨져가 발을 뗀다면 릭은 영락없이 그대로 뒤통수를 바닥에 찧을 것이다.

어떤가. 이번에도 그만 떼어달라고 부탁해보시지.”

너무하는군. 이건 정말 너무하오.”

릭 톰슨,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어디 기발한 탈출 법으로 날 즐겁게 만들어 봐라.”

벨져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는 릭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릭은 긴장된 표정으로 벨져에게 웃어보였다.

이보시오, 벨져. 내 능력을 잊고 있나본데 어차피 난 바닥에 닿기 전에 게이트를 만들어서 다른 곳으로 떨어지면 되오. 그 이외에도 탈출법은 얼마든지 있다오. 사실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어려울 정돈데-”

그때 릭은 그대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건 사실이었다. 벨져가 지지대를 누르고 있던 발을 뗀 것이다. 땅바닥에 닿기 일 초 전, 릭은 급하게 공간을 이동해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착지했다, 라기 보다는 그대로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 난 니가 그 곳으로 게이트를 열 줄 알았다.”

벨져는 릭이 푹신하게 안착한 침대 앞에 섰다. 여독을 풀기 위해 잡은 숙소는 내부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좁은 방 안에 충격을 방지할 수 있는 푹신한 물체는 오로지 침대뿐이었으므로.

, 벨져. 그대는 정말이지.”

릭이 웃는 것이 보였다. 기가 차서 웃는 것 같았지만 글쎄. 그라면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릭을 그대로 다시 침대에 파묻었다. 애매한 소리를 내며 릭이 몸을 뒤척였지만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한 것일 뿐 딱히 탈출하려고 하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의 뺨을 간질이고 있는 벨져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에 휘감으며 그 감촉에 감탄하고 있었다. 벨져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것 같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릭은 자신의 손을 움켜쥔 벨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릭의 목소리가 바로 근방에서 들렸다. 한 공간에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져, 사실 가능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지금과 다른 세상으로 좌표가 어긋나버린다 해도 상관없소. 그 곳에서 또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면 되니까. 어차피 그 세상에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조금 방식이 다를지라도 존재하고 있을 거고, 그 사람들 역시 여러 명의 진짜 중 한 명이지 가짜가 아니라오. 다채로운 진짜를 만나볼 수 있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여태까진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그랬는데?”

벨져는 고개를 숙여 릭에게 입을 맞췄다. 둘의 입술은 약간 어긋난 채 부드럽게 물려 들어갔다. 벨져는 한번 혀를 섞고 바로 입을 떼었다. 짧은 입맞춤은 아쉬웠지만 그래서 항상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릭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다. 여러 개의 시계에서 느껴지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은 왠지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어쩌면 그 집착 덕분에 릭은 확실한 해답을 찾았을 수도 있다. 무엇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항상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 와중에 두려워하던 자신의 능력을 아예 봉인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자신의 능력을 고작 엉덩방아 찧는 것을 피하기 위해 쉽게 써버린다. 어째서. 여전히 그의 우주는 알기 힘들었다. 벨져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대를 만나고 나서는 그게 싫어졌소.”

릭은 벨져가 멀어져가는 게 아쉬웠는지 그의 뒷목을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대로 버티는 것은 쉬웠지만 벨져는 릭이 이끄는 대로 가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내게서 탈출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안심하도록.”

그런 것 같소. 아마 천 가지 다른 우주가 있다고 해도, 어디에 있든 내가 아는 그대가 다시 나타나 쫓아올 것 같은 악몽을 꿀 것 같아.”

벨져는 다시 릭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쉽게 놓아주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벨져는 누워있는 릭의 안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식사는 빠르고 간단하게

 

 

맑고 화창한 날씨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과 그보다 더 다양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서서의 경우, 그는 맑고 화창한 날씨를 좋아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죽겠군. 머리도 아픈데 밖에서는 햇빛이 들이닥치고 꽃 냄새가 너무 강해서 토할 것 같아. 이런 날씨, 최악이로군.”

…….”

서서는 대답하는 대신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사로운 햇볕이 아른거리면서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주변을 감싸 안고 있었다. 싱그러운 꽃향기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고개를 절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보다 완벽한 날씨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는데, 정작 지금 그와 함께 대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불만이 많다.

그러니까, 점심을 그렇게 급하게 먹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서서는 한숨을 쉬었다. 시끄럽군. 법정은 팔로 눈을 가리다가 햇빛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빛을 등지는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서서는 한가롭게 노니는 나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안에 들어가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럼 탈 난 게 가라앉을지도 모르죠.”

됐어. 어차피 조금 있다 괜찮아질 것 같으니.”

그런가요? 서서는 뒤에 누워있는 법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상대는 귀찮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대답이 없었지만. 대답 없는 법정의 뒷모습이 신경 쓰였던 서서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혹시, 만약에 대답을 못한 이유가 귀찮거나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탈이 난 배가 아파서 그런 거라면 자신의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여기서 햇빛이나 꽃향기 타령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의원에게 달려가 봐야 하는 게 맞을 텐데-

뭘 보냐?”

……멀쩡하시군요.”

법정은 뚱한 얼굴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쳐다보고 있는 서서를 쏘아보았다.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을 감지했지만 별달리 신경 쓰진 않았다. 다만 왜 이리로 온 것인지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뭔데?”

아뇨, 그냥……. 아까 대답을 안 하시길래.”

굳이 대답해야 되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야, 그렇긴 하죠.”

서서는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시 그의 생각보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해서 도저히 자신의 입장에서는 생각해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에겐 자연스러운 경우가 빈번히 있었다. 그건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 서서는 조용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한가로운 시간이었지만 어째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식사를 좀 더 느긋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시간이 아깝군.”

서서는 법정이 항상 식사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시작해도 먼저 일어서는 것은 언제나 법정 쪽이었다. 요즘에는 그것에 익숙해져서 굳이 속도를 맞추려고 하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에 쫓길 필요가 있나요?”

그럴 필요는 없지.”

법정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의 하품 역시 짧았다.

하지만 굳이 필요해서 모든 걸 하는 건 아니잖아?”

그 쪽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군요.”

서서는 법정에게 다가갔다. 법정은 다시 그가 다가오자 누운 채로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시 다가올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서는 법정의 손을 잡았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법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손에 땀이 찼는데. 제가 의원은 아니지만 손에 일정한 곳을 자극해주면 얹힌 게 내려간다고 하더라고요.”


법정은 다시 말이 없었다. 분명 아픈 건 내색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 서서는 그냥 웃기만 했다. 예전에 골목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다닐 때도, 주변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보아도 꼭 그런 사람들이 한명씩 있었다. 아픈 걸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 이유야 서서가 상상할 수 있는 것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것 까지 다양하게 있겠지만 아픈 걸 고치지 않으면 스스로만 고통스러워질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좀 유심히 보게 된 것 같아서. 사람의 안색이라든가 말 이외의 것으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말이다.

서서가 법정의 손을 주물거리는 동안 법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서는 법정의 손이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느꼈고 법정은 그 반대였다. 이 녀석, 정말 검을 오랫동안 잡았었군. 법정은 속으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걸 바로 알 수 있는 손이었다. 혈을 짚는 것도 정확하고 단호해서 정말 얹혔던 게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직접 인정은 하지 않을 테지만 그는 실력이 좋았다.

왜 그러시죠?”

넌 참 신기한 녀석이야. 예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해야 할까. 종잡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어떤 땐 우스울 정도로 예측에 들어맞는단 말이지.”

다들, 그러지 않나요? 사람들은.”

법정은 그 말에 웃으면서 여기저기 혈을 짚고 있던 서서의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살짝 깨물었다.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일어난 일이었고 서서는 기겁하면서 손을 뺐다. 법정이 씨익 웃는 게 보였다.

그래도 역시 단단한 손도 깨물면 아프긴 한가보군.”

아니, 그게-아프기도 아픈 거지만……아니, 생각보다 그래도 아프진 않았습니다만, 근데…….”

지금 네 녀석이 입으로 뱉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

멀리서 말 우는 소리가 들리자 법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멀쩡하게 일어나서 정말 아팠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꾀병이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법정은 손가락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서서에게 고갯짓을 했다.

빨리 가자고. 간단하게 해치워 버리자.”

서서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도 그에게는 식사처럼 빠르고 간단한 것이 될 것 같았다.

 

티타임 문답

가끔은 빛보다 빠른 물질이란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 지 의문을 품어요. 그리고 그렇게 회의하는 것보다 더욱 자주, 그것이 존재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죠.

-한 물리학자의 말-

 

 

너는 참 소박한 사람이로군.”

벨져는 릭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릭은 아무런 맥락도 없는 벨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사실은 직접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입 안에서 도넛을 우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잔망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벨져는 어딘지 지루하게도 보이기도 하는,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가한 티타임이었다.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 능력을 고작 여행이나 다니는데 썼다니.”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 고맙소.”

릭은 때마침 나온 커피를 받아들며 웨이트리스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웨이트리스는 살짝 눈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다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티타임은 커피브레이크가 아니다.”

벨져는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커피를 마시면 뭔가 마음이 급해져서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그래서 느긋한 오후를 즐기기 위한 티타임에 커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벨져였다. 릭은 갈색의 멀건 음료에 각설탕을 한 조각 넣고 휘저으며 밀린 대답을 했다.

하하, 미국에 있을 때는 주로 커피를 마시다보니. 그런데 여행 다니는 거 말인데, 여기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니 이상하게 다들 그 말을 하더군. 여행을 다니는 게 이상하오?”
그런 건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능력의 운용 가능성에 비해 스케일이 작다는 거지. 내가 그 능력을 가졌다면 아마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썼을 거다. 좀 더,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벨져는 자신의 생각을 딱 잘라 말했다. 릭은 각설탕이 잘 녹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한 개로는 부족한지 아직 커피는 썼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라. 릭은 겸연쩍게 웃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떤 식으로 능력을 쓰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거요?”

벨져는 릭의 물음에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릭은 햇빛에 비쳐 하얗게 빛나는 새하얀 백발이 언제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하얀 게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게-릭과 벨져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잠시간 말이 없었지만 작은 참새들이 날아들어 그 어색한 침묵을 메워주었다. 벨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 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는 릭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벨져가 되묻자 릭은 빙그레 웃었다.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되묻는 방식은 다소 자존심이 강한 그가 답을 모를 때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묻는 질문에 답은 안하고 다른 소리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릭은 그게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그는 모르는 답에 대해 되묻기는커녕 당혹감을 선사한 것에 대해 역정을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되묻는다는 건 아직, 자신에게 완전히 갇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릭은 생각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되물었을 때 그에 대한 답을 릭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 정도였다.

나도 모르오.”

릭은 그 대답에 벨져가 얌전하게 내리고 있던 나머지 한 쪽 눈썹까지 치켜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이건 좀 심했나 싶었던 릭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사실, 그걸 찾으려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것도 있었다오.”

아마도. 릭은 벨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사족을 붙이고는 말을 마쳤다. 벨져는 그런 릭을 가만히 바라보며 차를 휘젓고 있었다. 릭은 급하게 지어낸 말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임기응변이었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별 거 아닌 것이라고 깎아내리던 벨져의 먼젓번 말에 대해 은근히 반격하는 동시에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릭은 괜하게 뿌듯함이 밀려왔지만 그걸 내색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대는 답을 찾았소?”

이번에는 벨져가 릭의 대답에 답을 차례였다. 릭은 벨져가 앞에서 대답하기 망설였던 만큼 이 질문으로 꽤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찾았다.”

하지만 벨져의 대답은 짧고 굵었고 빠르기까지 했다. 릭은 단답형으로 즉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진땀을 뺐다. 그렇다면 찾았다고 대답을 끝낸 사람에게 다시 어떤 답을 찾았느냐고 물어봐야 할까? 보통은 찾은 답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기 마련이지만 일부러 짧게 끝냈다는 건 그다지 자세히 밝히고 싶지 않다는 심중을 말없이 드러낸 것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곤란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답을 못 찾았는데 찾았다고 했다든지, 그런 상황 말이다. 릭은 입에서 쓴 맛을 없애기 위해 달달한 도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계피향이 기분 좋았다. 상대의 말마따나 느긋하게 즐기기 위한 티타임에 나누는 담소로는 터무니없이 무거운 주제였지만 벨져 홀든이라는 사내는 항상 그랬다. 가볍고 날랜 그의 검과 달리 무겁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군.”

결국은 릭도 똑같이 짧게 대답했다. 이 뒤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릭은 가벼운 화제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화창한 오늘의 날씨라든가. 하지만 날씨 이야기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끌지 못할 것 같았고 아직 차와 커피는 많이 남아 있었다. 고민하던 릭은 벨져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모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귀여운 소녀가 길바닥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간만에 화창한 날을 맞이해 햇빛을 머금고 적당히 따뜻해진 돌바닥이 좋았던 고양이는 손짓하는 아이가 귀찮은 듯 홱 돌아누웠고 아이는 고양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아이를 말리는 부모를 보며 릭은 슬며시 웃었다. 그의 주변에서 자식은 언제나 부모에겐 걱정거리였는데 그건 어딜 가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능력을 어떻게 쓸까 처음 고민을 시작했던 시기가 있었다오.”

결국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벨져는 다행히 릭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릭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커피에 각설탕 하나를 더 빠뜨렸다.

능력이라는 게 처음 나타나고 일주일이 지난 뒤 수업시간에 어떤 물리학자가 초청되어 왔소. 예전에 학교를 졸업한 선배라서 진로 상담도 해줄 겸 찾아왔던 건데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오. 물리학이 무엇을 연구하는지,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지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라 재밌게 들었다오.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건 그 농담이 전부라 미안하긴 하지만.”

릭은 그 대목에서 혼자 웃었다. 벨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박하게 시작하는 릭의 서론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그렇게 말하더군. 물리학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빛의 속도란 것이 있고 과연 그 속도를 초월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해서는 더 뜨거운 논란이 있다고. 그는 일부 학자들이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고 말했소.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과연 그것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 이전에, 그것은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릭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물리학자는 다소 격해진 어조로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공간 이동은 둘째 치고 시간 여행으로까지 응용이 가능해질 것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 변화는 세계에 가히 파괴적일 무수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종국에는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릭과 눈이 마주쳤다. 릭은 반신반의한 채 반쯤은 정신을 놓고 듣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학자는 그것을 감명 받았다는 표정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강연을 끝내면서 릭에게 이야기를 유난히 잘 들어줬다면서 칭찬까지 해주고 갔다. 혹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의례적인 말도 함께 남겼다. 하지만 릭에게는 가벼운 인사치레보다 더 많은 것들이 남았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빛보다 빠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종종, 공간 이동을 하고 나서 시계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오.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라서 시계가 고장 난 것일 수도 있소. 실제로 그럴 때도 있었고. 만약 시간도 거스르는 것이라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소.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왔던 시간과 세계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고 단지 궁금했을 뿐이오. 내가 정말 빛보다 빠른지. 그래서 나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시계를 차고 능력을 쓰기 시작했소. 만약 하나나 두 개 정도가 맞지 않는다면 단순히 시계의 고장이라고 봐도 되겠지만 모두가 맞지 않는다면 그건……시간을 역행했다고 봐도 되지 않겠소?”

전부 다 맞지 않았을 때가 있었나?”

벨져는 어느덧 릭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대체 이 소박해 보이는 남자는 어디까지 거창하고도 대단한 존재인 것인지. 공간에 이어서 시간까지 넘나들 수 있다면 이제 이 남자가 가지 못할 곳은 어디도 없다.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존재라는 게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 학자의 말마따나 있어도 되는 것일까. 벨져는 어쩌면 릭이 정말 찾고 싶은 답은 올바른 능력 사용법 따위가 아니라 더 전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능력이 있어도 되는지에 관한 질문.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진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 어쩌면 릭 톰슨이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여태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을까?

아직은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인데, 괜히 말이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다 그대가 어려운 얘기를 해서 그런 거요.”

벨져는 괜히 상대 탓을 하는 릭을 바라보았다. 꽤나 대담하군. 벨져는 여태까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탓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겼다. 여전히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벨져를 릭은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릭이 곤란해 하며 입맛을 다실 때 쯤 벨져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선 후회해도 소용없다, . 네가 존재하는 것도, 그리고 네가 이 이야기를 내게 한 것도.”

벨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마지막으로 들이켰다.

그래서, 여행은 계속 할 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여행을?”

벨져의 말에 릭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릭의 말을 들은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릭은 미처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졸지에 벨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서른 초반의 남자는 어딘지 여전히 잔망스러워 보였다. 이대로 혼자서 외로운 여행을 계속 하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벨져는 뒤를 돌았다.

그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여행에 동행하지.”

……?”

릭은 벨져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 것인지 헷갈리는 것 같았다. 벨져는 그런 그에게 확실히 매듭을 지어두기로 했다.

착각하지 마라. 단지 네 능력에 흥미가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먼저 가겠다며 벨져는 쓰게 웃는 릭을 남겨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느긋하게 즐겨야 했던 티타임은 예상치 못한 문답 시간이 되었다. 같이 당분간 다녀주겠다고 한 그 대답이 다소 충동적이었던 것 같아 고민했지만 벨져는 이내 생각을 끝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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