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새는 울지 않았다. 대신 세세한 결을 따라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이 다니엘의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곧 이어 원단이 팽팽해지면서 실을 당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났고 얼굴 옆으로 바람이 약하게 일었다. 누군가가 그의 옆에 있다, 라는 생각에 확신이 든 순간 다니엘은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입에서 익숙한 말이 튀어나왔다.
"꼼짝 말고 손들어!"
어이쿠. 다니엘의 신속한 대응에 미지의 침입자가 놀란 듯 감탄사를 뱉으며 엉거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침입자는 손을 들고 항복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거리를 확보한 곳에서 주머니 깊은 곳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소리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웃을 뿐이었다.
"꼼짝하지 않고선 손을 들 수 없는데 말이지."
온순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를 보고 있자니 울컥, 하고 다니엘의 속에서 다시 무언가 올라왔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아주 순진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를 보고도 경계심이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다니엘은 남자가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싱 링크 3. 소리 없이 웃는 남자
다니엘은 눈앞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샅샅이 관찰했다. 농도 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서 묻어나왔다. 공들여 관리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 머리카락이 부산스럽게 이마와 귓가를 덮고 있었지만 다니엘은 남자의 눈 옆으로 내리 그어진 커다란 흉터를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단서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유쾌하지 않은 편견을 부추기고 있었다.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던 폭력성이 짙은 의혹에 비해 남자의 손은 의외로 점잖아 보였다. 서 있는 동안에는 줄곧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아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흔적이 손에 남아있나 싶었는데 노파가 권한 자리에 앉으면서 드디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숨기고 싶은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잔뼈가 도드라졌고 중지에 깊게 박힌 굳은살과 펜을 돌리는 듯한 손장난을 반복하고 있는 게 처음 예상과 달리 사무직 종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닐 수도 있고. 아직, 남자에 대해 뭐라고 결정을 내리기에는 단서가 적었다.
"미안합니다."
"음? 아니, 뭐……."
남자는 생각보다, 아니 순박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는 아주 어울리게도 순순하게 사과했다. 실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데다가 온화하고 예의바르게 웃는 모습이 사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말없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사과는 부족한 게 없었고 오히려 뒤끝 없이 깔끔할 정도였다. 나무랄 것이 없는 태도였지만 그럼에도 다니엘이 탐탁지 않게 반응하는 이유는 남자가 사과한 사건 뒤에 일어났던 일 때문이었다.
그는 남자가 손을 들지 않자 다짜고짜 달려들어 제압해버렸다. 손님이라고 소리치며 들어오는 노파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더 격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공격의사가 없는 상대에 대해 과잉진압을 한 것이다. 남자가 사과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다니엘도 사과하지 않고 넘어가도 될 지도 몰랐을 테지만 저 정도로 완벽한 사과를 해버렸으니 이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양심의 압박은 다니엘이 감당해야할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남자에게는 사과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평소였다면 무리 없이 사과하고 마무리 지었을 텐데 자꾸 마음 한 쪽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아직 남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속으로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죄목이 남자에게 있을 것이라고 그의 직감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매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팔을 상당히 세게 비틀었는데 혹시 나중에 이상이 있다고 손해배상 청구라도 하면 곤란하다. 시민에 대한 과잉 진압은 경찰로서는 정치적으로 제일 피하고 싶은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뭔가 억울하다. 먼저 허락 없이 남의 방에 소리도 내지 않고 들어온 것은 남자였는데 어째 다니엘이 도덕적으로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었다.
"굉장히 반사 신경이 좋으시더군요. 운동선수신가?"
"아니, 아뇨…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호신술을 좀……."
"그렇군요. 하긴, 이런 곳에서 호신술은 필수적이죠."
자신이 형사라는 사실은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남자도 다니엘이 호신술을 배웠다는 사실에 크게 의미를 두는 것 같진 않았으므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아? 일이 바쁘잖아."
"그래야죠. 후원은 감사했습니다, 마담."
"그 쪽은 출근 안 해? “
다니엘은 남의 속도 모르면서 직장 운운하는 노파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아직 주어진 단서만으로는 그가 형사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테지만. 다니엘은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직은요."
"그래? HLPD도 정부당국도 어지간히 고민 중인가 보네."
이 사람이 결국. 다니엘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폭로된 사실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다니엘은 원망의 눈길로 노파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떠나는 손님을 배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어선 남자를 보니 생각보다 키가 훨씬 컸다. 보폭도 넓어서 몇 걸음 만에 문 앞에 도달했다. 문고리를 열고 나가기 전에 그는 다니엘을 보며 살갑게 손까지 흔들었다.
"그럼 근무 힘내십쇼, 형사님."
남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인사해서 다니엘은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어 배웅까지 해주었다. 하나 뿐인 입구이자 출구가 닫히고 노파와 남자가 사라진 뒤 정적 속에서 그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내가 형사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단순히 넘겨짚은 게 얻어 걸렸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대명사로 형사를 떠올리기도 하고. 아니면 노파가 미리 말해줬을 수도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왔을 때 어떤 단서를 봤을 수도 있고. 그래, 그렇겠지.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후 한 시. 어제 침대로 기어들어간 뒤로 하루 종일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강도 높은 근무 환경에 익숙한 그였지만 이곳에서는 훨씬 힘들었다. 평소에 익숙했던 일상적인 절차가 모두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 인간만으로 한정되지 않았고 도시 자체가 되었다. 꼼짝 말고 손을 들으라는 말은, 아니 그러니까 손들고 꼼짝 말라는 말은 인간들로만 구성된 사회에서는 약속된 권력을 행사하지만 도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급한 상황에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결국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물리력에 의지하게 된다. 다니엘은 최근 평소보다 무력을 행사하는데 놀랄 만큼 관대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불안했기 때문에 많은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래서 방금 전 그 남자에게도 생각보다 과도하게 무력을 써 버린 것이리라. 위험하다. 불안감에 끌려 다니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길한 경보음이 울렸다. 그는 빨갛고 파란 불빛이 번갈아가며 번쩍거리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방안을 고안해놓았을지 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바쁘게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서려는데 가슴께에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니엘은 양복 안 쪽에 있는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들어와서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 서에서 가져왔고 아마 침대 바로 옆에 놔두었는데.
"신분증이 어디 갔지?"
경찰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 사라졌다. 그 순간 다니엘의 귓가에서 불쾌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옆에서 살며시 옷깃만을 스치던 그 남자의 촉감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이해되지 않던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계속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던 묘한 거부감이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날뛰기 시작했다. 대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다니엘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놈 어디 갔어요?"
"그 놈이라니, 누구?"
"누구긴 누구야, 방금 그 남자! 얼굴에 흉터 있는!"
"아, 벌써 가버렸는데. 왜 작별인사라도 따로 하려고?"
"그 놈이 내 신분증을 가져갔다고!"
다니엘의 외침에 노파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은 아닌데. 노파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을 그는 여태까지 숱하게 봐왔다. 선량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경계를 풀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젠장!"
지금 나가면 쫓을 수 있을지도.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인 그를 노파가 급하게 붙잡았다.
"관두는 게 좋아. 그 남자를 쫓아갔다가는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경고하는 것처럼 말하는 노파의 표정이 유래 없이 진지했기 때문에 다니엘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노파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당신들 뭐야?"
처음부터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집 한 채가 통째로 사라졌지만 여유로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 구획이 재편성될지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녀는 항상 평온했다. 현장에서 못 볼 것을 많이 봐 온 다니엘보다 그녀는 지옥에 익숙해 보였다. 아마 지옥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존재라면 지옥의 파수꾼밖에 없지 않을까.
"난 그냥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평범한 노인네야."
"그걸 믿으라고? 그럼 왜 에스메랄다라는 이름을 놔두고 보더라는 가명을 쓰는 거지?“
다니엘의 말에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고 그는 질문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침착하고 내 말을 들어봐-"
"됐고, 그 남자 어디 갔어?"
다니엘은 잠시 멈칫했다. 자기 말 좀 들어보라고 하소연하는 여자의 모습은 어딘지 익숙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 말을 자르고 나가버리던 남자의 모습도. 안개 같은 것에 휩싸여 희미해진 장면 속에 강렬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냐. 그 남자가 신분증을 가져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지가 더 중요했다. 다니엘은 결국 노파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 남자를 쫓았다. 눈매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입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웃던 그 남자의 뒤통수는 생각보다 확실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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