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시끄러울 때 아침에 일어나 조용한 대숲을 거닐면서 그렇게 빽빽하게 들어선 마디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결을 느낄 때마다 나는 바람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조차 팔을 가볍게 휘두르면 어디엔가 스며들어 있던 바람이 나타나, 흐르는 옷자락을 장난스럽게 넘나든다.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묻자 옆에서 내 허튼 장난을 보고 있던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겠죠.

하지만 너는 바람을 부리잖아?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붙잡지는 않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서서 원직과 제갈 공명의 대화 -

 

 

다시 돌아오는 바람

진삼국무쌍 촉 IF모드 기반

 

 

5년 뒤, 건안 208년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고 조조군을 조금씩 격파해나간다. 그 와중에 그는 알려지지 않은 경로를 통해 전달된 어머니의 서신을 받고 조조군과 유비군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서서의 어머니는 그가 조조군으로 넘어오길 바라고 있었다.

 

바람은 항상 스쳐지나가죠. 어디에 머무는 법 없이. 바람을 잡는다면 그건 더 이상 바람이 아닐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원직은 공명을 향해 물었다. 공명의 팔이 흔들리면서 소맷자락에서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원직은 공명이 익숙한 부챗살로 입가를 가리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가에 드러난 주름만으로 그의 표정을 짐작할 수밖에 없을 때 그는 이따금씩 중요한 말을 꺼냈다.

이미 무슨 말인지는 대충 짐작했을 것 같지만.”

공명의 말에 원직은 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표정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차분하게 시선을 내리고 발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제 막 갈아 신은 신발 덕분에 발이 가볍고 산뜻해서 어디로든지 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명의 시선도 원직을 따라 그의 발에 머물렀다. 이미 채비를 모두 끝낸 것 같은 원직의 의장은 사실 평소와 별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변함없는 그에 비해 상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서 어젯밤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응대 방식은 그대로 써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써먹지 않아도 될 만큼 상대를 설득하는 게 수월해져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지 말라고 했잖아.”

.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원직은 물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여전히, 연기는 잘 안 되는 사람. 공명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와 달리 그의 생각은 표정으로 짐작할 수 없었다.

결정하는 건 당신이죠. 오늘 떠나지 않으면 제 때 당도하지 못할 겁니다. 우린 강을 건널 거고 그러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강을 건너는 기점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강은 거꾸로 흐르지 않으니 공명의 말이 맞을 것이다. 원직은 답답한 심정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대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원형으로 보이는 하늘이 있는 곳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저 하늘이 유일한 출구일 것만 같은 숲 속에서는 이 둘 외에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 자연의 방벽처럼 대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은 당분간 공명과 일행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다. 불만 붙이지 않는다면.

편지는-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미 어머니의 존재를 그 쪽이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 그렇죠.”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그 편지는 그에게 중요했다. 원직은 한숨을 뱉어냈다. 없던 바람이 가볍게 일면서 주변을 흐트러뜨렸다. 설마 그를 아는 사람이 조조의 휘하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 이상 겸손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편지를 받아들고 아직 읽어보기 전에 공명이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그 말에 서서도 애매하게 웃었다. 내용을 읽으면서 그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는 것은 그다지 다시 떠올리고 싶은 일화는 아니었다.

원직은 발을 붙이고 있던 곳에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한걸음 옮기기가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두 걸음, 세 걸음 걸어가자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대숲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는 공명이 서 있었다. 살짝 옆으로 비켜서 있는 그를 스쳐지나가기 전에 원직은 멈춰 섰다.

너는 자주 나를 바람에 비유하는 것 같아.”

어울리니까요. 특히나 전장에서는.”

원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걸리는 것이 많아. 사실 바람만큼 나랑 반대되는 것도 없을지도. 그다지 나랑 어울리는 비유는 아냐. 원직은 그렇게 말하며 무겁게 웃었다. 평소라면 재치 있게 대답을 돌려주었을 공명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공명의 앞에 서 있던 원직은 살짝 눈을 감았다.

어울리는 거랑 별개로 마음에 들어. 왜냐하면, 너는 바람을 부리니까.”

바람을 부리는 사람은, 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원직은 다시 눈을 뜨고는 길고 곧게 뻗은 대나무 숲에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우물 속에 있는 것 같아. 저 밖으로 뛰쳐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겠지. 아마 당장 내일이면 보지 못했던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우물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조금 다른 길을 가겠지만.

하지만 나는 너의 바람이 될게.”

바람은 머물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공명을 보며 원직은 다시 한 번 무겁게 웃었다. 그는 날이 그다지 춥지 않은데도 서늘하게 식은 공명을 부둥켜안았다. 그 바람에 공명은 입가를 가리고 있던 부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직은 공명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아. 그러니까 머물지 않고 네가 부르면 다시 돌아올게. 바람 길을 따라. 내 방식대로.”

어떻게, 라고 묻지는 않았다. 공명은 다시 멀어지는 온기를 뒤에서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오는 바람이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요. 이왕이면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공명은 들고 있던 부채를 들고 있던 손으로 뒷짐을 졌다. 어쩐지 좁았던 대숲의 하늘이 조금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개월 뒤 제갈량은 시상을 찾아가 손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한다. 그는 동남풍을 이용해 적들의 배를 불태우자는 계책을 냈고 바람을 부르기 위해 제단을 마련한다. 하지만 때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은 제단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따라 불어올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제단을 마련했고 그 위에서 바람을 부른다.

왔군요. 긴가민가했습니다만.”

네가, 불렀잖아.”

그렇군요.”

제갈량은 어디선가 홀연히 제단에 나타난 사람을 향해 우선을 들어올렸다. 애매하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은 역시 예전과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공명은 웃으면서 우선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원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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