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교묘한 거짓말은 언제나, 가장 믿고 있던 것에 관한 것이다-
“이봐, 히카르도 일어나. 어서!”
“무, 무슨 일인가?”
“큰일 났어.”
“…큰일?”
“너, 여자가 되어 버렸잖아?”
“……뭐?”
히카르도는 완벽하게 말이 되지만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의 어깨 위로 걸쳐있던 길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그는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4월의 바보
히카르도는 아무 말 없이 어젯밤에 사다 놓았던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식탁에 앉지 않고 그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천천히, 평소보다 더욱 확실하게 샌드위치를 치아로 분쇄하던 히카르도는 결국 입을 열었다. 거실은 부엌과 불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여기서 말을 해도 거실에 있는 소파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뒤통수에 닿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까미유의 뒤통수가 아까부터 가볍게 도리질 치고 있었다.
“그만…좀 웃는 건 어떤가.”
“하지만 설마, 진짜로 속을 줄은 몰랐지. 걱정 마 히카르도. 사람의 성별이 바뀌는 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하루 만에 일어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정확히 얘기하자면 바뀐다기 보다는-”
히카르도는 짧게 신음했다. 완전하게 믿고 있던 사실을 부정당했다고 느꼈을 때 한순간 느꼈던 좌절감 비스무리한 느낌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그의 감정 한복판을 비집고 지나갔다.
“요즘 꽤 한가한가보군. 고작 만우절 장난 한번 치려고 가발까지 준비한 걸 보니.”
“음, 맞아. 시간만 여유로운 게 아니라 내 지갑 사정도 상당히 여유로워졌지. 덕택에 좀 비싼 추억도 만들고 좋은걸?”
까미유는 그의 시간과 지갑 사정만큼 여유롭게 히카르도의 말을 받아쳤다. 조용히 숨을 삼키며 웃고 있는 까미유를 외면하고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씹는데 다시 열중했다. 자주 가던 빵집은 샌드위치에 쓰이는 바게트를 바삭하게 유지하는데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요즘처럼 습기가 사방에 가득한 날에는 몇 시간 정도 밖에 놔두면 설거지를 막 끝낸 스펀지만큼이나 눅눅해졌다.
“근데 그거-상한 것 같은데.”
까미유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손가락으로 히카르도가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히카르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까미유는 모호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손가락을 한번 빙글 돌렸다.
“내 말 못 믿나본데, 요즘은 밖에 몇 시간 놔두면 바로 상한다고.”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말을 듣고 그제야 씹고 있던 샌드위치의 맛을 자각할 수 있었다. 평소에 먹던 것보다 맛이 시큼한 것 같아서 그 이유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조용히 그릇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입에서 씹고 있는 것도 뱉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고민스러웠다. 왠지 그 꼴이 상당히 웃길 것 같아서, 그리고 까미유가 여전히 웃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쓰였다. 하지만 괜히 체면처럼 같잖은 것에 신경 쓰다가 탈이라도 나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 같았다. 히카르도는 입에서 파슬리와 샐러리, 토마토, 베이컨과 함께 버무려지고 있던 빵조각을 뱉어내고 그릇 위에 올려놓았던 샌드위치도 조심스럽게 휴지로 싼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서 있는 식탁으로 다가와 손가락을 튕겼다. 샌드위치가 쓰레기통 모서리를 한번 툭, 치고 들어가는 동시에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고 히카르도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너는 속아 넘어간 거지.”
까미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빈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시큼한 향을 음미하다가 마지막에는 가벼운 입김으로 그릇 위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냄새를 몰아냈다. 아침에 뿌려놓은 머스터드소스가 좀 과했나본데. 까미유는 그렇게 말하며 선하게 웃었다. 히카르도는 이미 휴지로 둘둘 말려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손으로 이마 한쪽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어째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밖에 나와 있는 것인지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을 사실이었는데 떠올리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아마 까미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쳤던 장난 때문에 히카르도는 아침부터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속임수에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벌써 두 번이군.”
히카르도는 식탁에 올린 두 손에 무게를 싣고 이쪽을 보고 있는 까미유의 정면에서 그와 같은 자세로 식탁을 짚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같은 자세로 서 있는 게 재밌었는지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보고 웃었지만 상대는 표정에 웃음기 하나 없었다. 평소에도 잘 웃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히카르도를 향해 까미유가 물었다.
“화났나?”
“아니.”
“그럼 좀 웃어.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비웃고 화도 내란 말이지.”
“별로, 널 비웃고 싶진 않군. 화는 더더욱 내기 싫다.”
“널 이렇게 가지고 놀았는데도?”
“그다지. 어차피 샌드위치는 다시 사면되고.”
이건, 너의 방식으로 날 비웃는 건가. 까미유는 그렇게 말하고는 식탁을 짚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다지, 비웃은 건 아니다. 히카르도의 대답에 까미유는 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알아. 그래도 니가 나한테 화내는 모습도 한 번 보고 싶긴 한데. 까미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넌 믿을만한 친구지만 놀리는 재미가 없어. 누군가 네게 장난을 쳤을 때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장난을 친 상대에 대해 갖춰야 할 예의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침에 그렇게 당했는데 이번에 또 당하면 이젠 정말 화를 낼 시기가 온 것 아닐까. 그렇긴 하지. 히카르도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까미유가 일부러 그에게 화를 내라고 독촉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통은 그 반대이지 않던가. 어째서 상대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인지, 그게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히카르도는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일까. 정말로 그는, 화내는 상대를 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정말로, 괜찮다. 친구 사이니까-”
“사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 단지 필요해서 곁에 두고 있는 거지. 필요 없어지면 버릴 거야.”
히카르도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까미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도, 거짓말인가?”
“어떤 것 같아?”
까미유는 대답해주는 대신 질문을 히카르도에게 되돌려 주었다.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진 그는 녹색 눈동자를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라고 강하게 직감했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가 진지해 보였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이 접속사 뒤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까미유가 슬며시 웃을 때쯤에야 히카르도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속았을 때처럼 작게 신음하는 그를 보며 까미유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거짓말이었어. 축하해 줘야 하나. 이번 만우절에도 4월의 바보가 되었군. 가장 빠른 기록인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아니다. 4월의 바보는 총 네 번 속아야 되니까. 아직 세 번이다.”
그래? 그거 어차피 우리끼리 정한 거잖아 근데. 히카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 현관으로 향하는 까미유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럽지만 어딘지 묘하게 정중한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나가자. 아까 샌드위치 거짓말에 대해 사과하고 아침도 먹을 겸 샌드위치를 사지. 아, 이번에는 거짓말 아냐.”
까미유는 다시금 히카르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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