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임 문답
가끔은 빛보다 빠른 물질이란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 지 의문을 품어요. 그리고 그렇게 회의하는 것보다 더욱 자주, 그것이 존재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을 품죠.
-한 물리학자의 말-
“너는 참 소박한 사람이로군.”
벨져는 릭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릭은 아무런 맥락도 없는 벨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사실은 직접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입 안에서 도넛을 우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잔망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벨져는 어딘지 지루하게도 보이기도 하는,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가한 티타임이었다.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 능력을 고작 여행이나 다니는데 썼다니.”
“손님,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아, 고맙소.”
릭은 때마침 나온 커피를 받아들며 웨이트리스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웨이트리스는 살짝 눈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다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티타임은 커피브레이크가 아니다.”
벨져는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커피를 마시면 뭔가 마음이 급해져서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그래서 느긋한 오후를 즐기기 위한 티타임에 커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벨져였다. 릭은 갈색의 멀건 음료에 각설탕을 한 조각 넣고 휘저으며 밀린 대답을 했다.
“하하, 미국에 있을 때는 주로 커피를 마시다보니. 그런데 여행 다니는 거 말인데, 여기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니 이상하게 다들 그 말을 하더군. 여행을 다니는 게 이상하오?”
“그런 건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능력의 운용 가능성에 비해 스케일이 작다는 거지. 내가 그 능력을 가졌다면 아마…너와는 다른 방식으로 썼을 거다. 좀 더,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벨져는 자신의 생각을 딱 잘라 말했다. 릭은 각설탕이 잘 녹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한 개로는 부족한지 아직 커피는 썼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라. 릭은 겸연쩍게 웃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떤 식으로 능력을 쓰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거요?”
벨져는 릭의 물음에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릭은 햇빛에 비쳐 하얗게 빛나는 새하얀 백발이 언제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하얀 게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게-릭과 벨져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잠시간 말이 없었지만 작은 참새들이 날아들어 그 어색한 침묵을 메워주었다. 벨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 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는 릭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벨져가 되묻자 릭은 빙그레 웃었다.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되묻는 방식은 다소 자존심이 강한 그가 답을 모를 때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묻는 질문에 답은 안하고 다른 소리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릭은 그게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그는 모르는 답에 대해 되묻기는커녕 당혹감을 선사한 것에 대해 역정을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되묻는다는 건 아직, 자신에게 완전히 갇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릭은 생각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되물었을 때 그에 대한 답을 릭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 정도였다.
“나도 모르오.”
릭은 그 대답에 벨져가 얌전하게 내리고 있던 나머지 한 쪽 눈썹까지 치켜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이건 좀 심했나 싶었던 릭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사실, 그걸 찾으려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것도 있었다오.”
아마도. 릭은 벨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사족을 붙이고는 말을 마쳤다. 벨져는 그런 릭을 가만히 바라보며 차를 휘젓고 있었다. 릭은 급하게 지어낸 말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임기응변이었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별 거 아닌 것이라고 깎아내리던 벨져의 먼젓번 말에 대해 은근히 반격하는 동시에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릭은 괜하게 뿌듯함이 밀려왔지만 그걸 내색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대는 답을 찾았소?”
이번에는 벨져가 릭의 대답에 답을 차례였다. 릭은 벨져가 앞에서 대답하기 망설였던 만큼 이 질문으로 꽤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찾았다.”
하지만 벨져의 대답은 짧고 굵었고 빠르기까지 했다. 릭은 단답형으로 즉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진땀을 뺐다. 그렇다면 찾았다고 대답을 끝낸 사람에게 다시 어떤 답을 찾았느냐고 물어봐야 할까? 보통은 찾은 답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기 마련이지만 일부러 짧게 끝냈다는 건 그다지 자세히 밝히고 싶지 않다는 심중을 말없이 드러낸 것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곤란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답을 못 찾았는데 찾았다고 했다든지, 그런 상황 말이다. 릭은 입에서 쓴 맛을 없애기 위해 달달한 도넛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계피향이 기분 좋았다. 상대의 말마따나 느긋하게 즐기기 위한 티타임에 나누는 담소로는 터무니없이 무거운 주제였지만 벨져 홀든이라는 사내는 항상 그랬다. 가볍고 날랜 그의 검과 달리 무겁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군.”
결국은 릭도 똑같이 짧게 대답했다. 이 뒤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릭은 가벼운 화제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예를 들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화창한 오늘의 날씨라든가. 하지만 날씨 이야기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끌지 못할 것 같았고 아직 차와 커피는 많이 남아 있었다. 고민하던 릭은 벨져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모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귀여운 소녀가 길바닥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간만에 화창한 날을 맞이해 햇빛을 머금고 적당히 따뜻해진 돌바닥이 좋았던 고양이는 손짓하는 아이가 귀찮은 듯 홱 돌아누웠고 아이는 고양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아이를 말리는 부모를 보며 릭은 슬며시 웃었다. 그의 주변에서 자식은 언제나 부모에겐 걱정거리였는데 그건 어딜 가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능력을 어떻게 쓸까 처음 고민을 시작했던 시기가 있었다오.”
결국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벨져는 다행히 릭의 말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릭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커피에 각설탕 하나를 더 빠뜨렸다.
“능력이라는 게 처음 나타나고 일주일이 지난 뒤 수업시간에 어떤 물리학자가 초청되어 왔소. 예전에 학교를 졸업한 선배라서 진로 상담도 해줄 겸 찾아왔던 건데 여러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오. 물리학이 무엇을 연구하는지,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지…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라 재밌게 들었다오.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건 그 농담이 전부라 미안하긴 하지만.”
릭은 그 대목에서 혼자 웃었다. 벨져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박하게 시작하는 릭의 서론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그렇게 말하더군. 물리학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빛의 속도란 것이 있고 과연 그 속도를 초월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해서는 더 뜨거운 논란이 있다고. 그는 일부 학자들이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을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고 말했소.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과연 그것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 이전에, 그것은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릭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물리학자는 다소 격해진 어조로 빛보다 빠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공간 이동은 둘째 치고 시간 여행으로까지 응용이 가능해질 것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연설했다. 그 변화는 세계에 가히 파괴적일 무수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고 종국에는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릭과 눈이 마주쳤다. 릭은 반신반의한 채 반쯤은 정신을 놓고 듣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학자는 그것을 감명 받았다는 표정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강연을 끝내면서 릭에게 이야기를 유난히 잘 들어줬다면서 칭찬까지 해주고 갔다. 혹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의례적인 말도 함께 남겼다. 하지만 릭에게는 가벼운 인사치레보다 더 많은 것들이 남았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빛보다 빠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종종, 공간 이동을 하고 나서 시계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오.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라서 시계가 고장 난 것일 수도 있소. 실제로 그럴 때도 있었고. 만약 시간도 거스르는 것이라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소.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왔던 시간과 세계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고 단지 궁금했을 뿐이오. 내가 정말 빛보다 빠른지. 그래서 나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시계를 차고 능력을 쓰기 시작했소. 만약 하나나 두 개 정도가 맞지 않는다면 단순히 시계의 고장이라고 봐도 되겠지만 모두가 맞지 않는다면 그건……시간을 역행했다고 봐도 되지 않겠소?”
“전부 다 맞지 않았을 때가 있었나?”
벨져는 어느덧 릭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대체 이 소박해 보이는 남자는 어디까지 거창하고도 대단한 존재인 것인지. 공간에 이어서 시간까지 넘나들 수 있다면 이제 이 남자가 가지 못할 곳은 어디도 없다.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존재라는 게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 학자의 말마따나 있어도 되는 것일까. 벨져는 어쩌면 릭이 정말 찾고 싶은 답은 올바른 능력 사용법 따위가 아니라 더 전제가 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능력이 있어도 되는지에 관한 질문.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진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에 대한 물음. 어쩌면 릭 톰슨이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여태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을까?
“아직은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인데, 괜히 말이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다 그대가 어려운 얘기를 해서 그런 거요.”
벨져는 괜히 상대 탓을 하는 릭을 바라보았다. 꽤나 대담하군. 벨져는 여태까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탓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겼다. 여전히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벨져를 릭은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리고 릭이 곤란해 하며 입맛을 다실 때 쯤 벨져는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선 후회해도 소용없다, 릭. 네가 존재하는 것도, 그리고 네가 이 이야기를 내게 한 것도.”
벨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마지막으로 들이켰다.
“그래서, 여행은 계속 할 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여행을?”
벨져의 말에 릭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릭의 말을 들은 벨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릭은 미처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졸지에 벨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서른 초반의 남자는 어딘지 여전히 잔망스러워 보였다. 이대로 혼자서 외로운 여행을 계속 하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벨져는 뒤를 돌았다.
“그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여행에 동행하지.”
“왜……?”
릭은 벨져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 것인지 헷갈리는 것 같았다. 벨져는 그런 그에게 확실히 매듭을 지어두기로 했다.
“착각하지 마라. 단지 네 능력에 흥미가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먼저 가겠다며 벨져는 쓰게 웃는 릭을 남겨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느긋하게 즐겨야 했던 티타임은 예상치 못한 문답 시간이 되었다. 같이 당분간 다녀주겠다고 한 그 대답이 다소 충동적이었던 것 같아 고민했지만 벨져는 이내 생각을 끝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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