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벨져. 오늘 티타임에 했던 말은 그냥 잊어 주시오.”
릭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은 릭의 강점이었다. 웃고 있는 릭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고 부담 없이 다가온다. 저 나이에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리라. 그런 추측이 어느덧 마음속에 사실처럼 자리 잡는다.
한편 벨져는, 그가 생각보다 쉬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릭은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의외로, 라는 말이 적당한지 벨져는 잠시 망설이긴 했다. 그가 부담 없이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그가 부담스러운 것은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는 사람은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지.
벨져는 좀 더 릭의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턱을 넘어 그의 우주에 들어가 보고 싶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것 역시 깨달았다. 벨져는 짓궂게 웃으면서 릭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 재밌던데. 오늘 밤 숙소에서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
사우전드 유니버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어서 저것들이 정말 모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주는 외롭기 보다는 꽤나 복작대는 북새통 같은 곳 일 텐데, 어째서 매번 볼 때마다 마냥 고독한 느낌만 드는 것인지. 마치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벨져는 지금 느낌이 딱 그랬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릭이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는 사실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 더 좋은 설명 방식을 찾고 있느라 머리 위로 향해 있는 그의 시선을 아래로 불렀다.
“네 설명은 뭔가 너무 두루뭉술하군. 실체를 모르겠다. 그래서, 이 우주와 다른 우주가 있다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수도 테니 어차피 시간을 재는 건 의미가 없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학자가 말하는 것도, 네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것도 다 가설일 뿐이잖나.”
그것도 확률이 낮은. 벨져는 그렇게 말하면서 릭의 팔목을 잡아 이리로 끌어왔다. 그의 팔목을 휘감고 있는 시계들은 마치 그를 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자발적인 속박이라는 것 정도일까. 여러 개의 시침과 분침이 같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일사불란한 군집을 보는 것 같았다. 세계 각 지역의 각기 다른 시간을 재고 있는 여러 개의 시계가 절박해 보인 이유는, 자신을 동일한 시간선상에 붙잡아놓기 위한 릭의 노력이 벨져에겐 강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세계 모든 곳에서 시간이 맞지 않을 때 릭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서 있게 될까.
“그야 그렇소만. 가설이라고 해서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니겠소?”
가능성이라. 벨져는 릭의 말에 턱을 괴고 있던 나머지 한 손을 들어 릭을 가리켰다. 릭은 뜬금없이 자신을 가리키는 벨져의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했다. 벨져는 그 느낌이 좋았다. 손가락으로 시선을 유도할 때 드는 느낌. 벨져는 말을 이었다.
“너는 머리가 좋아, 릭. 여러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볼 수 있지. 하지만 그러다보니 가능성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
“가능성에…짓눌리는.”
그래. 벨져는 아무생각 없이 릭의 이마에 그대로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의 손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릭이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능성에 짓눌리는 사람은 그 많은 가능성을 보면서 결국 스스로는 무엇도 불가능하게 돼. 아이러니지.”
“그보다, 벨져. 지금 난 그대의 손가락에 짓눌리는 것 같소. 너무 세게 누르는 거 아니오?”
“…….”
벨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릭의 이마를 좀 더 세게 눌렀다. 릭이 숨을 들이키면서 벨져의 손목을 잡았다.
“아니, 장난 아니고 정말 아프단 말이오.”
“안다. 아프라고 더 누르는 거지.”
릭은 사정없이 짓누르는 벨져의 손가락을 이마에서 떼어내기 위해 상대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지만 생각보다 밀리지 않았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손목에 비해 내리누르고 버티는 힘은 릭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곧 릭은 해결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버티는 대신, 뒤로 물러서는 방법을 택했다. 벨져의 손가락을 떼어낼 수는 없지만 굳이 자신이 그 힘을 받아내며 버틸 필요는 없다. 릭은 슬쩍 의자를 뒤로 끌어 탁자에서 멀어졌다. 벨져의 손가락이 릭의 이마에서 살포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릭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었다.
“재밌군, 릭 톰슨.”
벨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릭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앞뒤로 아무것도 걸칠 것이 없이 혼자만의 공간에 동떨어져 있는 릭과 그 의자를 다리를 사용해 슬쩍 뒤로 밀었다. 그대로 밀기만 했다면 릭은 바닥에 꼴사납게 뒹굴게 되었겠지만 벨져는 마지막 순간에 의자 다리 사이에 걸쳐져 있는 지지대를 발로 눌러 아슬아슬하게 무게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거기서 벨져가 발을 뗀다면 릭은 영락없이 그대로 뒤통수를 바닥에 찧을 것이다.
“어떤가. 이번에도 그만 떼어달라고 부탁해보시지.”
“너무하는군. 이건 정말 너무하오.”
“릭 톰슨,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어디 기발한 탈출 법으로 날 즐겁게 만들어 봐라.”
벨져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는 릭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릭은 긴장된 표정으로 벨져에게 웃어보였다.
“이보시오, 벨져. 내 능력을 잊고 있나본데 어차피 난 바닥에 닿기 전에 게이트를 만들어서 다른 곳으로 떨어지면 되오. 그 이외에도 탈출법은 얼마든지 있다오. 사실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어려울 정돈데-”
그때 릭은 그대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건 사실이었다. 벨져가 지지대를 누르고 있던 발을 뗀 것이다. 땅바닥에 닿기 일 초 전, 릭은 급하게 공간을 이동해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착지했다, 라기 보다는 그대로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릭. 난 니가 그 곳으로 게이트를 열 줄 알았다.”
벨져는 릭이 푹신하게 안착한 침대 앞에 섰다. 여독을 풀기 위해 잡은 숙소는 내부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좁은 방 안에 충격을 방지할 수 있는 푹신한 물체는 오로지 침대뿐이었으므로.
“하, 벨져. 그대는 정말이지.”
릭이 웃는 것이 보였다. 기가 차서 웃는 것 같았지만 글쎄. 그라면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벨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릭을 그대로 다시 침대에 파묻었다. 애매한 소리를 내며 릭이 몸을 뒤척였지만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한 것일 뿐 딱히 탈출하려고 하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의 뺨을 간질이고 있는 벨져의 긴 머리칼을 손가락에 휘감으며 그 감촉에 감탄하고 있었다. 벨져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것 같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릭은 자신의 손을 움켜쥔 벨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릭의 목소리가 바로 근방에서 들렸다. 한 공간에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져, 사실 가능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지금과 다른 세상으로 좌표가 어긋나버린다 해도 상관없소. 그 곳에서 또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면 되니까. 어차피 그 세상에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조금 방식이 다를지라도 존재하고 있을 거고, 그 사람들 역시 여러 명의 진짜 중 한 명이지 가짜가 아니라오. 다채로운 진짜를 만나볼 수 있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여태까진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그랬는데?”
벨져는 고개를 숙여 릭에게 입을 맞췄다. 둘의 입술은 약간 어긋난 채 부드럽게 물려 들어갔다. 벨져는 한번 혀를 섞고 바로 입을 떼었다. 짧은 입맞춤은 아쉬웠지만 그래서 항상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릭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는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다. 여러 개의 시계에서 느껴지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은 왠지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어쩌면 그 집착 덕분에 릭은 확실한 해답을 찾았을 수도 있다. 무엇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항상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 와중에 두려워하던 자신의 능력을 아예 봉인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자신의 능력을 고작 엉덩방아 찧는 것을 피하기 위해 쉽게 써버린다. 어째서. 여전히 그의 우주는 알기 힘들었다. 벨져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대를 만나고 나서는 그게 싫어졌소.”
릭은 벨져가 멀어져가는 게 아쉬웠는지 그의 뒷목을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대로 버티는 것은 쉬웠지만 벨져는 릭이 이끄는 대로 가주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내게서 탈출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안심하도록.”
“그런 것 같소. 아마 천 가지 다른 우주가 있다고 해도, 어디에 있든 내가 아는 그대가 다시 나타나 쫓아올 것 같은 악몽을 꿀 것 같아.”
벨져는 다시 릭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쉽게 놓아주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벨져는 누워있는 릭의 안으로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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