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교환의 법칙

~피를 부르는 네메시스의 케첩~

 

0.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 햄버거를 사러가는 길에는 예상치 못하게 비탈진 장애물을 만났지만 그 후로는 죽 내리막이었다. 가는 길 보다는 돌아오는 길이, 그리고 돌아오는 길보다는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일이 훨씬 수월했다. 여기까지는 내리 활주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진행됐으니 식사 후 뒷정리는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는 여정이 될 것이다. 레오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햄버거 봉지와 감자튀김을 담아두었던 네모난 종이 곽을 봉투에 담았다.

부탁하네, 레오나르도군.”

탁자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큼지막한 손 안에 있던 봉지와 종이 곽을 조심스럽게 봉투 안으로 떨어뜨렸다.

착하네, 소년.”

스티븐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마쳤다. 봐야할 서류가 있었지만 일거리를 놓아둘 탁자가 잔뜩 사온 패스트푸드로 점령당했기 때문이었다. 레오가 앞에서 봉투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자 그가 웃으면서 서류 너머에 널브러져 있던 봉지를 건넸다. 그 사이에 소닉은 레오가 들고 있던 봉투에 자신의 몫을 골인시켰다. 나이스. 레오가 엄지를 치켜들자 소닉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레오의 어깨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뒷정리라는 건 버겁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수고가 필요한 오르막길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해져서 남의 자전거 뒷자리에 편승해가는 느낌이었다. 봉투에 넣어줄 필요까진 없는데 다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왠지 쑥스러웠던 레오는 다른 곳에 떨어진 쓰레기가 없다는 것을 괜히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재프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조금 조심해야할지도 모른다. 레오는 그의 앞에 서서 봉투를 흔들었다.

, 재프씨도 쓰레기 주세요.”

, 니가 치우는 거냐?”

아까부터 봉투에 쓰레기를 담으러 다녔지만 상대는 영 모르는 척이다. 어차피 보란 듯이 생색내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지만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재프의 표정은 마음에 걸렸다. 레오는 다시 한 번 봉투를 흔들었다. 스스로 쓸어 담아도 되지만 도통 무게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재프의 앞에서는 매번, 일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지워주고 싶어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 못마땅해 하고 있던 건 매번 자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을 무렵, 재프가 잠시 기다리라며 그가 앉아있던 자리 앞에 그득하게 쌓여있는 봉지며 곽들을 레오가 들고 있던 봉투 안에 몽땅 담았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쓰레기를 버려주는 재프를 보며 레오는 어쩌면 자신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뭘 그렇게 쳐다 봐? 이제 쓰레기 없는데.”

.”

혼자 감상에 빠져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었나. 레오는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어둠을 응시했다. 이대로 더 이상 바라보고 있다가는 어쩌면 다큐에서 나왔던 대로 마음이라는 게 교환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증명된 것이 없는 법칙이었지만. 옳지 못한 오해로 인해 느껴지는 죄책감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숨기고 싶은 감정이었고 더군다나 앞에 있는 상대는 치부를 드러내기에는 제일 부적절한 상대였다. 레오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그에게서 돌아섰다.

아 잠깐만. 이거 까먹었다.”

레오가 쓰레기를 잔뜩 먹고 배가 불러온 봉투를 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 재프가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서자 재프가 케첩이 들어있던 것 같은 플라스틱 용기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매장에서는 일회용 케첩만 주기 때문에 사무실 어디엔가 있을 조미료 찬장을 뒤진 게 틀림없었다. 허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스나 스티븐이 아무런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괜찮을 건가 싶었다. 어쩌면 딱히 밤낮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사무실에 당연히 구비되어야 할 물품일 수도 있겠고, 숱한 야근을 버텨내며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라이브라의 케첩이 바닥난 모양이라고 레오는 판단했다. 하지만 재프가 건네주는 케첩이 생각보다 묵직해서 이질감이 들었다. 좀 더 찬찬히 관찰해보니 생각보다 케첩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용기 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것도 아니고 힘을 주면 그대로 새빨간 케첩이 새어나올 정도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케첩을 담고 있는 용기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이걸 버리기엔 아까울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재프가 씨익 웃었고 레오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뿌직.

캬하하 음모에 케첩이 묻었네!”

으으…….”

지금 상황은 잠시나마 방심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 맞았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레오는 문득 재프가 케첩이 남아있는 용기를 자신에게 건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인간 실수했군. 레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개방된 입구를 재프에게로 돌렸다.

빠직.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복수라는 겁니다.”

당당하게 복수를 선언하는 레오를 보며 재프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가 은근히 의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나 보여서 레오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재프는 입술 근처에 묻은 빨간 케첩을 혀로 핥았다. 마치 맹수가 사냥 전에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오냐, 그 도전 받아주지. 피의 복수다.”

그래봤자 케첩은 제 손에 있거든요!”

레오는 재빨리 소파 뒤로 돌아가 재프를 향해 케첩을 있는 힘껏 발사했다. 그렇게 라이브라의 사무실은 붉은 케첩 빛으로 물들었고 무작정 수월해지기만 할 것 같던 여정도 끝이 났다. 그리고 예고된 오르막길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1.

재프씨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에요.”

, 너도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솔직히 니가 그렇게 정확도 없이 뿌려대지만 않았어도 사무실이 이 꼴이 되진 않았어.”

재프씨가 괜히 케첩 뺏겠다고 능력만 안 썼어도 병이 터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나는 내 혈류를 조절하는 건 자신 있어. 니가 무식하게 세게 잡아당겨서 그렇지!”

그건-”

그럼 그렇게 자신 있다는 기술을 쓸 때 제가 힘을 줄 것까지 계산에 넣으셨어야죠! 라고 반박하는 게 반박이 되는 건가 잠시 망설이던 레오가 입을 막 열었을 무렵 서늘하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속사포처럼 그칠 줄 모르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멈췄을 때를 맞춰 일부러 문을 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기가 적절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렇게 시기를 맞춰 문을 열었을 것 같은 인물이 그 앞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스티븐은 항상 신고 다니는 구두 끝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린 다음 둘을 바라보았다.

그럼 나랑 클라우스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

잘 다녀오세요, 라고 적절한 인사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겨진 뒤였다. 비록 임무로 인해 사무실을 비우는 것이었지만 재프와 레오는 스티븐의 마지막 말에서 왠지 모를 복선을 느꼈다. 복선이라는 게 그렇듯이 결과가 닥치고 난 뒤에야 그 존재가 의미 있어지겠지만 지금 그 복선의 존재 의미를 실감하고 싶진 않았다.

, 나갔다 올 때까진 사무실을 원상복구 해놔야 한다는 거군.”

그러네요.”

하필 이럴 때 길베르트씨가 없다니.”

불평은 하지만 먼저 신속하게 행동에 나선 것은 재프였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사무실 벽과 천정에 묻은 케첩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전력을 다하기 시작하자 레오도 바닥에서 케첩과의 2차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있는 힘껏 세게 문질러도 케첩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붉은 잔병들이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게 저항하자 재프와 레오는 전략을 바꿔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후속 전략의 출처는 접근성이 용이한 통신망이었다.

찾아보니까 식초가 케첩 지우는데 좋다네. 야 음모머리 나가서 식초 좀 사와라.”

여긴 없어요?”

없어.”
사무실에 구비되어 있던 식료품 중 식초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티븐과 클라우스는, 임무를 맡으러 나간 이상 일찍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식초를 이용해 케첩을 제거하면 그 뒤로는 식초의 시큼한 냄새를 제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라 레오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다녀올게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레오는 길을 나섰다. 머리카락과 옷에 묻어있던 케첩을 아직 제대로 닦아내지 못했다는 게 맘에 걸렸지만 헬사렘즈 로트가 머리와 옷에 케첩 묻히고 다니는 정도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곳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건 그랬지만 스스로의 몰골은 알아야겠다 싶어 길가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에 붙어 있는 사이드 미러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점검해보았다. 그런데 예상 외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줄 알았던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어두운 갈색이었다.

이상하네. 케첩이 그렇게 잔뜩 묻었는데.’

손으로 닦아내긴 했지만 묻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재프가 처음에 뿌렸던 양도 만만치 않았지만 힘 씨름을 하다가 공중에서 케첩이 터졌을 때 한바가지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케첩이 흩뿌려졌던 옷을 보니 머리카락에서 묻어나온 것 같은 진한 갈색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혹시나 해서 머리카락을 슥 만져보니 시큼한 냄새가 여전히 진하게 풍겼다. 다만 그 냄새가 방금 전과 좀 달라진 것 같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냄새가 기분 나쁘게 후각을 자극했다.
이상하네. 케첩도 색깔이 변하나?’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봤던 케첩에 한해서라면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헬사렘즈 로트, 다른 곳과는 상식의 기준이 달라서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면 오히려 상식이라는 경계선 바깥으로 나가떨어지는 곳이다. 경계선 바깥으로 밀려나 눈에 띄는 것만 이라면 견딜 만 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상황에 대응하는데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였다. 레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빨리 식초를 사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붉은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2.

이건, 엄청난 광경이로군요.”

, 길베르트씨.”

재프는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길베르트를 맞이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에서는 바라마지 않았던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험이 많은 집사라면 케첩 얼룩 정도는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내는 것보다 쉬울 것이고 재프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식초로 케첩을 제거한다고 쳐도 그 다음이 더 문제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사의 표정은 재프가 예상했던 것보다 수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무슨 일이야, 길베르트씨?”

이 자국들은 빨리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재프는 길베르트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지만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긴장감은 케첩이 아니라 피로 물든 사무실에서 느껴지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재프는 어느덧 사무실에서 나는 냄새가 미묘하게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룩에서 풍기는 냄새는 더 이상 케첩이 아니라 피에 가까웠다. 자국을 지우는데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묻은 케첩은 벌써 기분 나쁘도록 칙칙한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이건?”

네메시스의 케첩입니다. 맛이 뛰어난 조미료로 거래되지만 못지않게 위험하죠. 특히 종류 불문하고 피와 접촉하면 그 자체가 아주 강력한 주술의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 무슨 주술?”

피를 부르는 주술이죠. 사실 저주에 가깝습니다만 케첩이 피를 흡수하고 거기에서 풍기는 진득한 피 냄새가 경계선 너머에 닿으면 이계에서부터 복수를 하기 위해 복수자가 소환됩니다. 주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공격적인 존재들로 아주 오래된 복수가 성공하기를 꿈꾸죠. 네메시스라는 복수의 여신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도 이런 점 때문입니다.”

아니, 무슨 그런 게 조미료야?”
재프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그에 비해 길베르트씨는 여전히 평온했다.

위험한 만큼 맛은 일품이니까요. 예로부터 인간들은 쾌락적인 보상을 위한 위험을 무릅쓰곤 했습니다. 그래도 위험한 건 맞으니 원래대로라면 제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쓰기 위해 찬장 안 쪽에 숨겨뒀습니다만. 그리고 피와 접촉했다는 것도 좀 놀랍군요. 케첩이 피와 접촉할 가능성은 희박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프는 찔리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길베르트는 무언가의 전말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는 재프가 했던 것처럼 사무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자상하게 웃으면서 상대를 안심시켰다.

, 괜찮습니다. 라이브라의 사무실은 여러 가지로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라 아직 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한 같으니. 이 정도 양이라면 사실 이미 나타나고도 남았어야 했죠. 하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빨리 제거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만.”

재프는 길베르트의 말을 듣는 순간 여태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로 밀폐된 사무실이라지만 어찌됐든 이 사악한 냄새가 그 틈을 비집고 나갔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럼에도 아직 복수자가 소환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다른 곳에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재프는 문득, 터진 케첩을 뒤집어쓴 채 바깥으로 나간 레오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방비하고 평범한 소년 한 명을.

제기랄!”

제발 늦지 않았기를. 복수라니, 비록 얼빠진 녀석이긴 하지만 그 녀석이 무엇 때문에 복수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부조리했다. 재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길베르트를 무시하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3.

레오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넘쳐나는 헬사렘즈 로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넘쳐나는 일상에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특히 엄청난 분노를 자신에게 표출하고 있는 존재와 맞닥뜨리는 일에 관해서는 더욱. 여태까지는 주로 주변의 분노와 광기에 휘말리는 식이었지 자신에게 그 살기가 집중되는 일은 없었다. 살기라는 것은 명확한 목표가 존재했고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이유가 존재해야 했다. 그 이유가 없다면 굳이 살기의 목표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굳이 말하자면 최초의 사건이 없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과 비슷했다. 레오는 헬사렘즈 로트에서도 아직 그 인과관계가 유지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오늘부로 그 안도감도 깨지게 되었다.

…….”

갑자기 일어난 일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다는 것은 자명했다. 헬사렘즈 로트에서는 이해하기 전에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레오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다리가, 안 움직여.’

여태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꽤 많이 겪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군가의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적대감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굳이 신들의 의안을 쓰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강렬한 감정이 레오를 짓눌렀고, 동공 너머로 그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아무리 그렇게 속으로 소리쳐도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레오는 소닉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소닉 너라도 도망쳐. 아니 너는 도망치는 게 아냐. 가서 재프씨를 불러와. 왜 하필 그 사람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스도 스티븐도 길베르트도 없는 마당에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소닉이 전속력으로 재프를 부르러 가고 레오가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복수를 위해 이를 갈던 존재는 벌써 준비를 마쳤다.

복수.”

죽는다. 복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기능을 회복한 다리가 달릴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복수를 부르짖는 존재들이 잇몸이 버거워 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온 어금니로 목표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레오는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눈에 관한 비밀을 풀고 미셸라와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전 까지는. 레오의 소망과 달리 어금니는 그의 발치에 까지 도달했지만 이대로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여정을 끝낼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

레오는 괴물의 어금니를 박차고 내달렸다. 요행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신들의 의안을 개방해 복수자의 움직임을 읽어냈고 그 움직임에 맞춰 어금니를 박차고 뛰쳐나간 것이다. 하지만 신들의 의안을 개방하면서 부작용이 뒤따랐다. 복수자들이 뿜어내는 증오와 분노가 여과 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엄청난 감정의 파고가 밀려왔다. 한순간 기지로 육체적으로 말살당할 위기는 넘겼지만 이제는 정신적으로 말살당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은 고장 날 것만 같이 뛰어댄다. 잔뜩 활성화된 신경이 머리부터 손끝까지 저릿하게 만든다. 다음번 공격도 피할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막아야 할 텐데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모처럼 끈 시간이 의미가 없어진 상태에서 복수자가 다시 공격해왔다.

!”

그 때 였다. 레오의 앞에 갑자기 거대한 존재가 불쑥 솟아올랐고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복수자들은 예기치 못한 방벽에 튕겨져 나갔다. 레오는 그의 눈앞에서 익숙한 벽을 볼 수 있었다.

너희는-”

레오는 벽을 만들어준 것이 아까 햄버거를 사러 갈 때 봤던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조그마한 존재들이 서 있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레오의 팔과 다리를 끌어당겼다. 되도록 저 사나운 존재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나운 운전자들을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던 거대한 벽은 복수자 앞에서는 속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복수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 때문에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레오는 그 느리고 작은 존재들이 절대 제 때 공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모두를 지키고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 레오는 알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복수할 상대는 제대로 골라야지.”

.”

레오는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그림자를 느꼈다. 하나는 소닉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눈앞에서 붉은 실들이 춤을 추더니 이내 모여들어 하나의 칼을 만들어냈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레오가 상황을 이해했을 무렵에는 벌써 핏빛 칼날이 복수자들을 관통했다. 복수자들은 몸부림치더니 끓어오르던 기포가 터지듯 소멸했다. 그 바람에 그 안에 품고 있던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재프가 앞을 가로막아서고 있던 덕분에 레오는 추가로 붉은 액체를 뒤집어쓸 일이 없어졌다.

재프씨, 등이…….”

레오는 재프의 등에서 타는 것처럼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재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붉은 액체가 묻은 옷을 레오가 보는 앞에서 벗어 던져버렸다.

바지에 안 튀어서 천만다행이네.”

재프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며 핏빛 검을 거둬들이자 비로소 상황이 종료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레오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이, 설마 다쳤냐?”

재프가 급하게 손을 내밀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팔까지 꽉 잡아버렸다. 그 바람에 재프도 같이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리게 되었다. 막상 받아낼 때는 그 감정에 압도되어 마비되어 있던 감각들이 풀리면서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모습을 재프의 앞에서 보여 버렸다.

……우냐?”

,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눈물이 나오는 거라고요!”

계속해서 넘치듯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떻게든 그쳐보려고 했지만 매정한 눈물은 그럴수록 주룩주룩 쏟아질 뿐이었다. 최악이다. 이 사람 앞에서 울어버리다니.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던 레오는 재프가 어느덧 꿇어앉아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두 사람을 횡단보도를 건넜던 작은 존재들이 둘러쌌다. 마치 두 사람을 지켜주려는 것처럼.

그냥 울어. 운다는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이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듣는 기분은 이상하다. 그런 말을 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더없이 어울리게 느껴졌다. 여전히 한쪽 팔을 잡힌 채 조심스럽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재프에게 레오는 끅끅거리면서 말했다.

, 재프씨한테 복수한다는 말, 취소할래요.”

?”

그 말은, 너무무서운 것 같아요.”

복수라. 레오는 재프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괜찮아. 니 복수는 그다지 무서울 것도 없고…….”

어딘지 엇나간 언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 것처럼 재프는 말끝을 흐렸다. 어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한숨을 쉬더니 바닥에 아예 주저앉았다. 하얀 옷이 더러워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레오의 머리에 손이 하나 푹하고 얹혔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의 손은 이상하게 더 무거운 것 같았다. 레오는 어느덧 재프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을 교환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는 것. 그 사실에 굳이 실험까지 해 볼 필요는 없었다. 오랜 시선교환 끝에 재프는 툭 던지듯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네게는, 적어도 너에게만은 복수당할 만한 짓,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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