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군들, 오늘부터 우리는 더 이상 NYPD가 아니다."

-3년전 가이저 뉴욕 경찰 청장 연설문 첫 문장-

 

미싱 링크 0. 그 남자의 지원 동기

 

뉴욕 경찰에는 8번 관할구역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맨 처음에는 남부 맨해튼 15번 관할구역으로 출발했다가 16번 관할구역으로 넘어가고 31년이 지나 8번 관할 구역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9년이 더 지나가고 8번 관할구역은 다른 지역과 통폐합되었으며 지부를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떠나간 뒤 건물은 허물어졌다. 지금은 그 자리가 남아있는지 아니면 다른 건물로 흔적이 메워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누군가는 알고 있을 테지만 사람들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뉴욕 경찰 8번 관할 구역이 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은 3년 전 대붕락 때였다.

"오늘부터 이계와의 게이트가 연결된 지역을 중심으로 8번 관할구역을 다시 창설하고 이 지역을 관할하는 경찰은 HLPD라고 명명한다."

청장의 공식적인 발표문이 나간 뒤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눈부신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전세계로 생중계 됐다. 그 선언을 모르는 뉴욕 경찰은 이제 별로 없을 테지만청장의 연설문 첫 문장에 담긴 진짜 의미를 간파한 경찰도 별로 없을 것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아니라 오늘부터 저들은, 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HLPD로 자원할 사람은 내일 정오까지 지원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모두, 신중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말의 방점은 뒷 부분에 있었던 것 같다. 다니엘은 상사가 그의 앞에 늘어선 부하들을 죽 둘러보면서 말을 끝맺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과 갓 태어난 딸 하나 그리고 LA 해변가에서 만났던 매력적인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부장이었으니까.

"이봐, 다들 그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마치 전염병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한다구?"

"제대로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 안이 어떤 진 들어가봐야 아니까."

"대니, 그러면 역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이미 지원서 다 썼는걸."

다니엘은 서 앞에 있는 식당에서 동료이자 선배인 존이 그를 상대로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는 것을 한마디로 저지했다. 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입을 딱 벌렸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갈림길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을 저렇게 고민 하나 하지 않고 질러버리다니. 질려버렸다. 그런 표정을 하고서.

", 에스메랄다랑은 어쩌고?"

울컥, 하고 다니엘의 표정에 변화가 온 것은 존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다니엘은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금연석인데요, 라고 말하는 주인과 옆에 있는 동료이자 선배인 존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라이터를 점화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마지못해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면서 투덜거렸다.

"그 이름은 꺼내지도 마."

"뭐야, 설마 헤어져-"

"아 진짜."

다니엘은 참다 못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스메랄다와 헤어진 것은 바로 그저께 아침이었다. 그 여자가 정말 지독했던 부분은 아침에 이별 통보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인들이 다 보는 경찰서 바로 앞에서. 야근하느라 전날 밤을 꼴딱 세웠던 다니엘은 덕분에 뭐라고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 그녀를 보냈다. 경찰서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거나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후에는 더 분했다. 그냥 그 때 경찰로서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줄걸. 헤어진 뒤에 남은 것이 저릿한 후회도 아름다운 추억도 아닌 수치스러운 분노라는 게 그의 가슴 깊숙이 상처를 입혔다. 그 분노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향했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존은 그 자리에 없었나 보다. 멍청한 표정으로 불쾌한 질문을 해대는 걸 보니 틀림없다. 존은 사려 깊고 온순한 사람이었으니까 전말을 알았다면 다니엘 앞에서 그런 질문을 했을 리 없었다.

다니엘은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경찰서 입구 앞에 섰다. 5년 넘게 슬픔도 행복도 같이 나눠온 연인이었는데, 떠나갈 땐 그렇게 한 순간이더라. 모든 정보를 종합해 봐도 그녀가 헤어지자고 한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속되는 사건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미싱 링크, 다니엘은 불현듯 어릴 때 자주 봤던 경찰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중얼거렸던 단어를 떠올렸다. 실종된 중간 과정, 사라진 진실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린 시절 자신의 영웅이 다시 고뇌에 휩싸였다. 진실을 붙잡을 새도 없어서 꿈을 꾸었나 했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전화를 해봤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앞으로 찾아가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함께 웃고 떠들었던 장소에서 혼자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니엘은 마음을 굳혔다.

"이런 곳, 더 있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먹었던 다음 날 아침, 부장에게서 8번 관할 지역에 관한 자원 소식을 들은 지 1시간만에 다니엘 로 경부보는 이별을 통보받았던 입구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며 모두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무를 마음도 먹지 못할 테니까. 다니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절대 자신에 대한 유치한 반항같은 게 아니다. 이건 앞으로 자신의 여생동안 기리고도 남을 숭고한 희생이었다.

"다니엘 로, HLPD에 자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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