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협상하는 하는 법

~빅터편~

 

명망이 높고 고루한 학술지에서 그 논문을 처음 봤을 때 홀린 듯이 내뱉었던 탄식을 아직도 기억한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편집장이 사체를 재활용해서 산 사람의 신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나열하고 있는 논문을 실을 생각을 하다니.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빅터는 전쟁이라는 것이 한 개인이 다져놓은 자아의 방어선을 어디까지 아슬아슬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흥미로웠다. 대체 이 앙리 뒤프레라는 작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 논문을 학술지에 실을 수 있었으며 그 이전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는지. 적어도 앙리 뒤프레는 이 학술지에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고상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에게 당연하다는 듯 인격을 부여하곤 했다. 그래서 이 파격적인 방법론을 학계 일선에 제시한 남자에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삿대질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이 갔다. 하지만 자신들을 고상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도덕적인 거부감이 처음으로 거추장스러워질 만큼 앙리의 논문은 완벽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천재는 이 논문이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겸허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겸허한 태도 덕분에 압도적으로 실용적인 장점이 묻히지 않고 고집스러운 노학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빅터는 또한 앙리라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인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킬 돌파구를 제시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앙리의 신체 접합술은 진전이 없던 빅터의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해주었고 신기루일까 불안감이 들 만큼 완벽했다.

여태까지는 머리와 인체의 다른 장기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시신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빅터의 연구에 커다란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전쟁은 그에게 대량으로 시신을 공급해주었지만 온전하게 보존해주진 못했다. 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순전히 전쟁터에서 나오는 가장 신선한 재료를 공급받기 위해서였지만 거리를 좁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많았다. 빅터는 참전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나오는 시신을 공수해왔다. 거기서는 생명을 구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던 시신들이 실려 나왔다. 그것도 어떤 경우에는 충분히 참혹했지만 전쟁터에 오고 나서 그는 살릴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다. 시신이 부패해서 미약한 악취가 난다든가 사지가 불완전한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애초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들이 무기 연구소 실험실에 들렀다가 퇴짜를 맞았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었다. 실험에 쓸 수 없는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면서 빅터가 올려다 보던 하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지와는 다르게 평온하고 초연해보였다. 전쟁으로 임박해 온 죽음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많은 이들이 신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만 저런 하늘이나 그 너머에 있는 신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쓰기는 할까. 되살릴 잔해조차 남지 않아 황량한 이곳에서 앙리의 논문은 신보다 가치를 지닌다. 논문에 나오는 신체 접합술을 사용한다면 불완전하게 보존된 시신끼리 이어 붙여 활용할 수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잔해가 한데 모여 생명을 품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시신의 범위는 획기적으로 넓어지며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시행착오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앙리 본인이 아닌 사람이 직접 시술하기에는 논문에 소개된 신체 접합 기술이 너무나 복잡하고 섬세했다는 점이었다. 몇몇 부분은 글로 쓰인 설명만으로는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비교적 눈에 띄는 혈관을 제대로 잇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논문을 참고하며 혼자서 몇 번이나 연습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어설프게 봉합한 부분은 제대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채 흉하게 썩어 들어갔다.

“제기랄!”

분한 외침과 함께 이번에도 실패했다. 빅터는 그의 손에 의해 비로소 쓸데없는 잡동사니로 전락한 시신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죽은 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밤을 지새운 탓에 눈이 뻑뻑했다. 그는 구석에 놓여있는 간이 의자로 비척비척 걸어가 주저앉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차라리 눈을 감았다. 빅터의 관심사는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는 방법이었다. 앙리와 달리 살아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 없었다. 애써 살려놓아도 그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사람들은 죽음을 되돌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위태로운 생명에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는 일에만 매달리는지. 이에 관해 따져 물으면 그들은 죽음이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단정 지었다. 빅터는 애초에 신을 믿지 않았고 왜 신이 그 영역을 독식해야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겸허하고 무력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혼자 죽은 자를 되살리는 연구를 시작했다. 제대로 성공시킨다면 그에게서 등 돌렸던 이들도 다시 돌아볼 것이다. 실패한다면-빅터는 아직 이에 관해서 제대로 생각해보진 않았다.

소동물을 대상으로 했던 실험에선 사체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되살렸을 때 근력이 증가하고 다소 난폭해지는 현상이 관찰되었지만 야생에서 동물들은 원래 사나웠다. 통쾌하고 흡족해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과가 나왔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동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을 되살리는데 도전했지만 여태까지와 다르게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근력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부각시켰더니 군대 무기 연구소에서 자리를 하나 내주었지만 실험 일지에 실패만 기록하는 해가 거듭될수록 윗선에서는 독촉이 심해졌다. 빅터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화를 내는 것에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실험이 실패로 끝난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일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한들 그게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죽을 땐 다들 혼자 떠난다. 나쁘진 않았는데 조금 두려웠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두려움이 엄습할 때면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연구에 매달렸고 다시 실패했다.

“앙리…….”

언제부턴가 빅터는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앙리라는 사람은 누군가가 절박하게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빅터는 포기하기 직전에 앙리의 논문을 발견했다. 논문을 읽고 난 날 밤에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믿지 않았던 신을 저주하며 벼랑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던 그였다. 살려달라고 외쳐보고 애원해 보지만 아무도 그가 추락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위험한 곳까지 오지 않는다. 손을 놓으면 편해지겠지. 피투성이가 된 손에서 힘을 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 사람이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전한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이곳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올바른 미소였다. 그를, 만나봐야겠어. 시신으로 가득찬 연구실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진 않았다. 그래서 빅터는 언성을 높여 사람을 불렀다.

“룽게! 외출할 테니 바로 준비해!”

“아이고 도련님. 간만에 외출하시는군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빅터는 룽게가 더 쓸데없이 기대에 부풀기 전에 허물어버리는 게 그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러나가는 게 아냐. 제 3사단으로 간다.”

이 날씨좋은 날에 거기는 왜? 생각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마뜩찮게 바라보는 룽게를 향해 빅터는 눈을 치켜떴다. 허겁지겁 준비하러 사라지는 늙은 집사의 뒷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뿌듯한 앞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최단시간에 외출 준비를 마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준비 다 됐습니다. 가시죠!”

“느려.”

“이 정도면 거의 인간의 영역이 아닌 속도인뎁쇼? 도련님도 참, 어디 다른 집사들 보십쇼.”

“빨리 안 오고 뭐해? 시간이 없어!”

갑니다 가요. 룽게가 툴툴거리면서도 말고삐를 잡으려고 하자 빅터가 물었다. 여정이 길어질 텐데 그냥 마부한테 맡기지 그래. 룽게는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빅터의 말에 자신 있게 고삐를 쥐었다.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체력은 젊은이 못지않습니다. 좋은 바람을 쐬지 못하는 도련님이 더 불쌍하다고요. 타시죠!”

“뭐, 굳이 그러겠다면.”

빅터는 자신을 동정하는 룽게의 대담함에 삐딱하게 웃어보였다. 마차에 타도 바깥도 볼 수 있고 바람도 쐴 수 있는데 그 말은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달리면서 스치는 풍경을 보니 어느새 볼 것 없던 황무지에도 생명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계절이 변하는 동안 쉬지 않고 연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회생을 자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공시키고 있었다. 푸릇하게 살아나는 경관이 그를 비웃는 것 같아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리고 커튼을 쳤다. 그는 막히지 않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시체같이 창백해진 손등을 비춰보며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매일 시신과 같이 있다 보니 죽음이 점점 전염되는 것일지도. 완전히 죽음에 잠식되기 전에 어서 앙리를 만나야 했다.

앙리 뒤프레는 제 3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군의관이었다. 빅터가 상주하고 있는 제 1사단 무기 연구소와는 중간에 격전지로 분단된 곳이었지만 우회해서 가면 못갈 곳도 아니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빅터는 그 동안 앙리를 설득할 방법에 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은 그가 자신의 연구에 협력할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빅터는 앙리 뒤프레라는 인물에 관해 조사해보았다. 앙리의 논문을 읽으면서 그가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느꼈으므로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가치관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의사니까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만을 살려낸다. 아직 살아있는 자를 일으켜 세우며 살려낸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방만한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역으로 죽은 자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그들에게 살려낸다는 말은 아까웠다. 명의 소리를 듣던 빅터의 아버지도 어머니가 죽음에 굴복하자 쉽사리 불길 속으로 던져버렸다. 만약 그 때 아버지가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우지 않고 잘 보존만 했어도 살려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을 한동안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반복했지만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나약한 그들과 달리 상대가 신이고 자연이라는 모습을 빌려 사방에서 그를 비웃는다 해도 도전할 생각이었다. 과연 앙리도 그럴까?

“난리 통은 피해서 가야겠죠?”

“그러는 게 낫겠지. 설마 실험 재료가 될 셈이야?”

빅터는 당연한 걸 물어보는 룽게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면박을 주고나니 앙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여서 룽게가 평소와 다르게 물어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미 말은 뱉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이든 되돌리긴 어렵다. 여태까지 죽음을 되돌리고 생명을 찾아오겠다는 그의 주장에 관해 반은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였고, 나머지 반은 불경하다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밤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의 이상을 비웃는 방법으론 꽤나 질척했지만 그가 대위로 임관한 뒤로는 그런 사람도 없어졌다. 앙리는 여태까지 만나본 사람들과는 또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에게서는 죽은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위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철저히 사체를 고깃덩어리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생명을 다시 불붙이기 위한 연료 정도로 여기고 인격은 부여하지 않는다. 앙리가 고안해 낸 신체 접합술에는 오직 생명만을 구하기 위한 냉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빅터는 아직 앙리가 의사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앙리는 훌륭하게 넘지 말라는 선을 하나 넘었다. 죽음을 터부시하고 공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은 자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해 외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죽음과 삶을 완전히 다른 상태로 보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해버렸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사체를 재활용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해낸 것이리라.

빅터는 앙리와 생각이 달랐다. 죽음은 머리가 온전하게 보존되는 한 다른 심각한 질병을 앓는 상태와 다를 게 없었다. 난치병이지만 적절하게 치료만 해주면 그 질병은 나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앙리가 빅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사체를 재활용하지 못할 거라는 지점이었다. 사체도 잠재적인 생명을 품고 있는, 말 그대로 환자와 같은 개념이 되므로 그것을 훼손하면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반대로, 죽음은 삶과 완전히 다른 상태이며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한다면 죽음을 되돌리는 연구에 관해서도 회의적일 테니 마찬가지로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즉, 어떤 경우의 수로 상황이 흘러가든 앙리가 빅터에게 협력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성가시군. 빅터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앙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치기어린 젊은 의사가 창안해 낸 신체 접합술만이 멈춰선 연구를 다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빅터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룽게.”

“예, 도련님.”

“마차 돌려. 쭉 직진해서 전장 근처로 간다.”

“예. 아니, 예?”

말에 꼬투리를 잡으면 빅터가 쉽게 짜증낸다는 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체득한 룽게였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에는 가급적 반사적으로 긍정해주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모시는 사람은 유쾌해하지 않을 테지만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했다. 연구에 오랫동안 실패만 해서 빅터가 지쳐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전장은 위험한데요? 돌아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전장 근처로 가자고 했지 전장으로 가자는 말은 안 했어. 어차피 3사단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고.”

“위험한 건 마찬가지인데요?”

“내 말 들어, 룽게.”
룽게는 여태까지 멈추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온 마차를 처음으로 세웠다. 말들은 간만에 취하는 휴식이 반가운지 금방 멈춰 섰다. 빅터는 마차를 멈춘 뒤에도 별다른 말은 없었고 단지 이제는 선명해진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도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도련님을 위험한 곳으로 이유도 모르고 모실 수는 없으니까요.”

룽게는 빅터가 짜증낼 것을 각오하고 이유를 따져 묻기로 했다. 안 그래도 전방 가까이에 위치한 제 3사단이 가까워지면서 룽게도 신중해지고 있었다. 포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화약 냄새도 미약하지만 바람에 실려 먼 곳까지 당도했다. 아마 그만큼 현장은 치열할 것이다. 적군이 어디까지 포진해있는지도 알 수 없고 도망친 잔병에게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총이 있었지만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곧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를 다그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빅터는 의외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난 어떻게든 앙리를 데려와야 겠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진 중요하지 않아.”

“도련님 맘이야 이해가 갑니다만, 거절하면 그 사람을 납치라도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리고 그게 지금 전장으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주 상관이 있지. 룽게, 아주 중요한 상관이 있어.”

룽게가 떠보듯이 제안한 노골적인 방법에 빅터는 픽 웃어버렸다.

“내가 지지부진한 이 연구에 예산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으로 협상하면서 깨달은 건데 중요한 건 상황이야. 봐봐 개인의 뜻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앙리의 졸업 논문도 통과시켜주고 내 실험에도 돈을 대주고 있잖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상황이지.”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빅터는 룽게에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아돌지는 않을 군의관을 다른 부대에서 억지로 빼 가면 사단 간에 심각한 분쟁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이 지점은 중요했다. 만약 앙리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연구를 같이 하기로 해도 사단에서 거부하면 마찬가지로 데려올 수 없었다. 반대로 앙리가 거부해도 사단에서 그를 보내버린다면 일단 데려올 수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부대에서는 개인의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주는 소중한 군의관을 제3사단에서 보내버릴 이유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인가. 간단했다. 그들을 살려주는 사람이 소중하다면 그들을 죽이는 사람은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을 테니. 물론 앙리는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죽이게 할 수는 있었다.

“난, 앙리 뒤프레가 적군을 치료하게 만들 거야.”

빅터는 제3사단을 지휘하는 중위가 상당히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적군을 몰살하고 포로조차 잡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잔인함이 전쟁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빅터의 계획은 이랬다. 그는 전장에서 적군의 제복 한 벌을 얻어서 제3사단의 생존자에게 입혀놓을 것이다. 실험실에 적군의 제복이 몇 벌 있었지만 돌아가기에도 다시 만들기에도 시간이 허비된다. 지휘관의 성향으로 보건대 적군 부상자가 부대 안으로 운반될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아군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다. 되도록 반항할 힘조차 없이 생명이 꺼져가는 부상자를 택하고 그를 나르던 운반책에게는 직위를 내세우며 특별한 기밀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압박할 것이다. 앙리 뒤프레라는 군의관이 적군과 내통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그를 시험해 볼 생각이라고 하며 부상자의 옷을 갈아입힌다. 이 임무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길 것이며 일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더라도 발설하면 불명예스럽게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넌지시 해둔다. 상대가 고민할 틈 없이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 부상자를 앙리 뒤프레에게 데려가 달라는 부탁도 곁들이면 완벽했다. 빅터는 룽게를 시키든지 아니면 직접 3사단 내에 앙리에 관한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그가 적군을 은밀히 치료해주고 있다고 말이다.

앙리는 이 덫에 걸려들 것이 확실했다. 그는 부상자를 치료할 테고 중위는 멋대로 적군을 살려내려는 군의관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아마 중위의 성격이 소문대로라면 분명 앙리가 치료하려던 아군은 중위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앙리가 아군을 치료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될지라도 중위는 부정할 것이다. 아군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을 인정하는 것과 군의관 한 명을 잘라내는 것. 그 중에 어떤 게 더 쉬울지는 뻔했다.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세계에서 사는 자들이었으므로 빅터는 이 방법이 먹힐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운반책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설사 그가 죽음을 담보로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증명해 줄 사람은 없었고 앙리가 적군을 치료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일이 저질러진 상태에서는 그것을 되돌리기 어렵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룽게에게서 눈을 감고 웃어보였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상관없어. 후회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어 버려. 그게 죽음으로 협상하는 방법이야.”

죽음을 되돌리려고 하는 사람이 떠올린 방법 치고는 자조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빅터는 더 이상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간/혈계전선 통합온리전/The Hell 'Salem's Lot Times KOREA]

* 클립은 티스토리에서 제공되는 액자 효과입니다

스티븐과 다니엘은 오로지 필요한 정보만 거래만 하는 관계였다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협력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어느 날 둘의 관계에 사소한 변덕이 발생했고, 그 결과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과연 스티븐 스타페이즈와 다니엘 로는 다시 악몽처럼 찾아 온 붕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신간 정보-

소설본/전연령가/스팁다니/83p/8000원

 

목차

 

1. 다니엘 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2. 스티븐 스타페이즈가 이해할 수 없는 것 

3. 베뎃씨의 헬사렘즈 로트 탈출 계획 

4. 거짓말 계산기 

5. 일중독 남자의 변명

6. 성공적으로 실패한 탈출 계획

7. 블러드 브리드 체인 리액션 

 

에필로그: 일주일에 한 번 최후의 보루까지 밀리는 도시, 헬사렘즈 로트

 

* 스티븐과 다니엘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이며 날조 및 개인 설정, 자작 인물이 등장합니다.

* 커플링 성향이 약합니다

부정의 특이점

 

 

그는 내게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거래처 전화번호부에서 한 열 서너 번째쯤 위치한 인물이었다. 비교적 리스트 상단에 위치하긴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자, 다니엘 로. 섬유탈취제를 뿌려서 가려보려고 하지만 담배 냄새가 눅눅하게 묻어나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관리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드세게 뻗쳐있는 앞머리가 한쪽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형사님이다. 입이 험해서 섬세한 비즈니스와는 연이 없을 사람이지만 그의 욕설이 쫓아내는 재난과 사고 덕분에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별안간 모욕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조히스트로 돌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하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사람 같아 보이긴 했다.

그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도 아니다. 현실적이고 사법 체계 내에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내게는 지나치게 올곧은 사람이었다. 라이브라와 손을 잡고 뒤를 봐주는 형사 나리를 올곧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념은 겉으로 보이는 모순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올곧다. 만약 라이브라가 헬사렘즈 로트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우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어떻게 보면 크라우스와도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런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며 그들이 내뿜는 강력한 에너지를 오히려 동경하지만 설득해야 하는 상대라면 피곤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가끔은 내가 역으로 설득당하기도하기 때문에. 게다가 그는 생각보다 촉도, 머리도 좋다. 적당히 굴려먹기에는 부적절한 상대였다.

그는 그다지 재밌는 사람도 아니다. 경찰공무원 같은 말을 잘하는 점과 별개로 그는 유머에는 재능이 없다. 형사 일을 너무 오래한 나머지 그가 하는 농담은 일반인들이 웃기에는 지나치게 진지한 문제를 다룬다. 반대로 일반인이 하는 농담은 그에게는 너무 진지한 주제를 가볍게 넘기는 것 같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는 경찰들과 있을 때만 자주 웃는다. 나와 있을 때는, 그의 좁은 미간에서 주름이 없어진 적이 없다. 나 역시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웃진 않았지만. 추가로 그는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당신은 왜 그런 사람이랑 자꾸 얽히려고 하는 거예요?”

얽히려고 해? 내가?”

부드러운 손길이 한 쪽 뺨을 쓸었다. 공격적인 향기가 훅 끼쳐 들었고 잠시 침대가 흔들리더니 아름다운 청년이 나를 내려다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접근해 오는 사람 널리고 널렸잖아. 오히려 선택권은 그 쪽이 가진 거 아니었어요?”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럼 쳐내면 되는 거죠. 정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결국 쳐내지 않는 건 당신이 선택한 거 아닌가요?”

그 말도 맞다. 그가 현재 HLPD의 경감이고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 몇 개를 꿰차고 있는 건 맞지만 원한다면 정보를 빼내기 더 쉽고 다루기 쉬운 상대로 갈아치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간단하게는 거래 상대를 바꿀 수도 있었지만 현재 헬사렘즈 로트처럼 변덕스러운 현장에서 가장 기동력이 좋은 위치는 역시 경감 정도였다. 그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경찰을 관두게 하거나 타 부서로 전근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작업이긴 했다.

내 리더는 그런 식으로 일하진 않아.”

나는 청년을 살짝 밀어서 옆으로 넘어뜨렸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쉽게 넘어가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요?”

그 물음에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난 그의 부하야. 그렇게 답하자 청년이 비리게 웃으며 내 목을 끌어당기고는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 약하게 차오르는 숨소리에 섞여 나른한 음성이 귓가에 은밀하게 젖어들었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식이 있잖아요. 아주 어둡고 잔혹하고-편견이 없어서 내 맘에 드는 그거. 예를 들면 혈계의 권속인 나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한다든가.”

거래는 거래일뿐인걸. 그 쪽도 우연히 내게 진명을 노출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붙잡힌 거나 다름없잖아? 혈계의 권속인 주제에.”

나는 청년을 밀치고 가느다란 팔목을 세게 눌렀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뼈가 바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청년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뼈도 부러지지 않았다. 괴물 같은 녀석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다. 주제라는 말은 사실 그들보단 인류에게 어울렸다.

청년의 진명을 알아냈을 때 평소에 하던 것처럼 바로 크라우스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간만에 약점을 잡힌 혈계의 권속을 잘 이용해보기로 했다. 만약 청년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힌다거나 허락 없이 피를 사용하는 경우 그의 진명은 곧장 크라우스에게 전송되며 그의 혈액 속에 심어놓은 얼음 씨앗이 모세혈관에 흐르는 적혈구까지 응결시켜버릴 것이다. 아마 크라우스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사태에 관해 크라우스에게 설명할 거리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엘더 클래스는 아니지만 혈계의 권속이기 때문에 이만큼 제어 장치를 해놔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는 거래에는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 인상 안 좋은 경감과의 거래는 들인 노력만큼의 효용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주는 게 받는 것보다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금 웃고 있네요. 뭐 재밌는 생각 떠올랐어요?”

청년은 항상 내 웃음에 관심이 많았다. 이렇게 침대에서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내 표정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마치 연인처럼. 혈계의 권속 주제에. 침대에서 내키는 대로 청년을 안는 것은 순전히 그가 먼저 내 건 별난 조건 때문이었다. 무슨 속셈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자리에서 그는 지나치게 상냥했다. 인간이었다면, 괜찮은 관계로 발전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볼 정도로. 그리고 그 생각은 대부분, 약점을 잡힌 존재는 고분고분해진다는 것 정도로 끝났다.

너처럼 경감님도 약점이나 잡아볼까 하고.”

그래요?”

청년이 쓰게 웃는 게 눈에 보였다. 왜 그렇게 웃는 지는 잘 모르겠다. 진명이나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인간에게조차 이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일까. 묘하게도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심술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까지 읽어낼 순 없었지만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됐어. 그 사람한텐 그런 짓은 안 해.”

사실 그럴 가치도 별로 없거든. 나는 흥이 식어서 침대에서 내려와 옆에 있던 커피 잔을 들었다. 그는 단지 헬사렘즈 로트의 현장 사정에 조금 밝은 일반인일 뿐이고 경찰 수뇌부에 아는 사람은 널렸다. 청년이 미약하게 신음하며 방금 전까지 잡혀있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울혈조차 남지 않은 청년의 손목에는 여전히 매끈하고 창백한 광택이 흘렀다. 마치 포르말린이 가득 담긴 표본병에서 방금 탈출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부정할 점 밖에 없는 관계를 당신이 유지하는 건 신기하네요. 특이해요.”

매번 귀찮도록 질문하던 주제에 이번에는 물어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그 말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신간/덕질삼분지계 : 삼2/침착해 수경쌤의 함정이다]


수경 선생이 간만에 외출한 사이, 처음 보는 남자가 수경 삼인방을 찾아온다

남자는 수경 선생이 돌아오는데 드는 노자를 깜박하여 자신에게서 돈을 빌렸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거로 제시한 수경 선생의 친필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단 한 줄

최근에 노쇠해진 스승에 대한 믿음이 제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수경 삼인방은 남자와 스승 사이에 이루어진 단 한 줄의 거래에 관한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인가


 

 

 

목차

믿음의 부재

줄 글의 행간을 읽는 사람 

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만드는 사람

을 감고 나아가는 사람

믿음의 귀환

A5/소설본/중철/20-25p/논커플링/전연령가

가격: 2,500~3,000 원

덕질삼분지계에서 판매하며 재고가 남으면 통판을 진행합니다

*아래는 샘플입니다. 퇴고 시 문장이 바뀔 수 있습니다.

 

*타임 버스*

세계관 설명은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gnwW&fldid=LG19&datanum=197446의 두 번째 설명을 참조했습니다.

 

 

아흔아홉 번째 만남

 

 

다니엘은 스티븐 앞에서 피우는 아흔여덟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와 담배 두 개피분 이상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으므로 계산은 확실했다. 보통 누군가와 만날 때 태웠던 담배 개수에 대해서 일일이 기억하진 않는다. 다만 이번 경우는 평범한 상황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다니엘은 샤워 실에서 어깨 언저리에 새겨져 있던 숫자를 외출하기 전에 분명히 상기하고 나왔다. 물기에 젖은 숫자는 아흔여덟 이었는데 이제는 아흔아홉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으로 스티븐과 만난 지 아흔여덟 번째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이 꺼내기 껄끄러운 화제에 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미루고 미뤄왔던 결정을 해야 할 시기가 왔군.”
그래.

주변이 시끄러웠다. 오늘은 평범하고 아담한 술집에서 둘 다 사복차림으로 만났다. 마침 비번이 겹친 우연도 있었지만 이 일만큼은 두 사람 모두 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복을 입은 스티븐은 양복을 입고 있을 때만큼이나 사무적이다. 사실 다니엘은 사무적이지 않은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무적이라는 판단을 내릴 기준은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았지만 종종 곤란하다는 듯 웃는 표정을 보면 사무적인 태도가 그의 본질은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다니엘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도 좋을 상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담배가 맛이 없었다.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일이 되기 전에 파트너의 정체를 알아낸 건 행운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 계산해보자고. 헬사렘즈 로트에서 경찰로서, 라이브라로서 살면서 앞으로 단 한번이라도 너랑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클까, 아니면 너나 내가 인간, 이계인, 혈계의 권속, 오발된 총기류, 교통 법규를 무시한 차량, 자연 재난, 아니면시발, 정말 뭣같이 많네. 어쨌든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연쇄 작용으로 너나 내 머리위에 떨어지는 불행한 모든 사건사고로부터 모두 생존해서 자연사할 확률이 클까?”

경위, 아니 이제 경감님이지. 내 머리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우리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아흔아홉과 둘이 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그 중 몇 번은 우리가 자초해서 만난 만남이었고 상당수는 의도하지 않은 조우였는데. 과연 헬사렘즈 로트 바깥에서라도 앞으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스티븐은 술잔에 담긴 맥주를 의미 없이 흔들었다.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제약이 지켜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눈을 치켜뜨고 스티븐을 노려보았다.

네 놈이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만 본다면야.”

미안하지만 나는 인력이 모자라는 라이브라의 중요한 전력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그냥 경감님이 내근으로 돌리는 건 어때?”

거절한다. 나도 구멍 많은 HLPD의 경감이라서 말야.”

그리고 어차피 서로 실내에 박혀있더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걸 통제하는 건 불가능해. 게다가 난 평생 실내에 있을 생각은 없어. 사생활을 희생하고 각자 경보기가 달린 위치추적장치를 달아서 접근반경 안에 들어오면 경보음이 울리게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도 재수 없으면 마주칠 수도 있겠지. 지금 여기서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백퍼센트 확실한 방법은 없고 저번처럼 각자 손님 대동하고 음식점에서 마주쳤다가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거야.”

스티븐의 마지막 말에 다니엘은 다시 눈을 치켜떴다.

, 그러고 보니그런 방법이 있었군.”

뭐야, 설마 고려해보지 않은 거야?”

아니, . 평소라면 분명 생각해봤을 텐데-잠깐, 그럼 설마 네 놈 그것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단 거냐?”

다니엘이 살짝 의자에 비켜 앉으며 거리를 두었다. 스티븐은 그런 다니엘을 보며 특별히 변명하진 않았다.

생존이 걸린 문제잖아. 어쨌든 중요한 건 그 방법은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단 거지.”

다니엘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티븐과 얘기할수록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를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합당한 신체 접촉을 통해 숫자를 오십으로 만들어 균형을 되찾는 것. 그렇게 되면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은 멈추는 대신 죽음 자체를 공유하게 된다. 파트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 되고 남겨진 한 쪽은 사십구일 동안 과거의 죽음과 미래에 올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억울하기는 했다. 물론 파트너가 죽는다면 죽을 만큼 슬퍼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 실제로 다가오는 죽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죽는 것도, 자신이 죽어서 다른 누가 죽는 것도 그는 달갑지 않았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였다. 다니엘이 고민하는 사이 스티븐도 고민했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는 맞은편 양복점 쇼윈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만약 정말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둘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면 된다. 그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힘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쪽이 뭘 고민하는지 알아. 자기가 죽는 게 가장 걱정이긴 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겠지. 나도 이해해. 니가 네 상사를 두고 죽을 수 없듯이 나는 내 부하를 두고 죽을 수 없단 말이지. 난 내가 절대 대체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모르겠군. 어쨌든 여태까지 보고 판단한 바로는 네 놈이 죽는 모습은 너무 쉽게 상상이 되는데 이상하게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태까지 살아남았고 치사하지만 확실하게 몸을 사릴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알고 있지.”

그 때까지 쇼윈도를 보고 있던 스티븐이 다니엘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방법을 아는 거랑 쓰는 건 꽤 차이가 크다고.”

어차피 헬사렘즈 로트다. 억울하게 죽을 이유야 수없이 많아.”

그렇군.”

스티븐은 마음을 굳힌 듯 자주 쓰던 손으로 탁자를 둔탁하게 두드렸다. 다니엘도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스티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파트너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 스치는 것조차 조심했다.

"파트너로 인정하기 전에, 흡연량 좀 줄이는 게 어때. 죽음의 원인은 통제할 수 없다지만 피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피해보기로 하지."

"젠장."

스티븐은 반대편 손으로 다니엘의 손을 세게 잡았다. 둘 다 거칠기 짝이 없는 손바닥이었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지나가고 둘은 서로의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같아진 것을 확인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잔을 집어 들었다. 죽음을 공유한 상대 앞에서 건배를 하기 전에 적절한 축사를 고민하거나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아흔여덟 번째 만남의 끝에서 약속할 것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다니엘과 스티븐은 서로를 마주보며 망설임 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아흔아홉 번째 만남을 기약하며.”

솜사탕 효과

:잡을 수 없던 것을 진득하게 잡을 수 있도록

 

맥의 양 손은 모두 총이 차지하고 있다. 두 손으로 번갈아가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빈틈도 빈손도 없었다.  냉정하면서도 사납게 전투하는 그는 한 손으로 사격한다고 다른 손을 놀리진 않았다. 한발을 쏠 때 이미 다음 발을 준비하는 준비성에 힘입은 속사는 맥의 사격술에서 가장 빛나는 강점이었다. 목표물이 쓰러지는 것 외에 다른 결과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준비되었던 결과가 드러날 때 쯤 희미하게 미소 짓곤 했다. 전투가 종료된 뒤 한가해진 두 손은 주머니에 넣고 좀처럼 빼지 않는다. 그런 자세는 전장에서처럼 그를 외로운 멋쟁이로 보이게 해주지만 톰은 아쉬웠다. 맥의 손은 매번 눈앞에서 나긋하게 아른거리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둘이 가을 정취가 느껴지는 낙엽수를 감상하며 나란히 길을 걸을 때조차도 그렇다. 톰은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맥의 손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그가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편안하게 울렸기 때문에 도리어 울림을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봐 투수. 넌 손에 쥘 수 있는 건 다 원하는 궤적으로 던질 수 있다던데.”

맞아요. 연습도 어느 정돈 필요하지만요. 왜요?”

야구에 몸담고 있었을 때도, 불가피한 선택이긴 했지만 제구력에는 자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야구공 말고 다른 물체를 던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솜사탕 같은 건 어때?”

솜사탕이요?”

톰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가느다란 사탕 실이 잡는 대로 손바닥에 녹아드는 것 말고는 톰의 머릿속에 생각나는 장면이 없었다. 성긴 솜사탕을 뭉쳐서 단단하게 만들면 손에 좀 더 확실하게 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뭉치는 속도가 빠를지 체온에 녹아내리는 속도가 빠를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손바닥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면서 톰은 다른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맥은 왜 하필이면 솜사탕을 던질 수 있는 것인지 물어봤던 것일까? 그가 그렇게 특별한 소재를 거론하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도 껄끄러웠다. 이런 말은 본인에게 하지 않을 테지만 솜사탕과 맥은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톰의 시야에 솜사탕 장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거리감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톰은 비로소 상황을 납득하고 웃으며 맥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거 보고 지금 물어본 거예요?”

맥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 말을 하진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본인도 화제가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고 멋지게 시야를 수놓을 수 있는 광경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하지만 붉게 부스러져가는 가을 풍광 속에서 상큼한 색으로 힘차게 흔들리는 솜사탕은 생각보다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맥은 어느새 다시 솜사탕 장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톰도 솜사탕 장수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솜사탕을 던질 수 있을지 실험해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고 에이스가 최적의 시기를 놓친다는 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한번 실험해보지 않을래요? 진짜 던질 수 있는지.”

?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어.”

이번엔 제가 궁금하다고요!”

톰은 맥이 말리는 것을 마다하고 솜사탕 장수에게 뛰어갔다. 솜사탕을 한 개 사고 나니 맥이 마지못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톰은 솜사탕을 한 움큼 쥐어보았지만 손에는 끈적끈적한 실타래들만 묻어났다. 녹기 전에 좀 더 많은 양을 재빨리 압축하자 조그마한 덩어리 같은 사탕 공이 만들어질 것 같긴 했는데 이젠 남은 실타래가 없었다.

안 됐나보군.”

맥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도 그는 마치 준비되었던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톰은 주먹 쥔 손을 맥의 앞으로 내밀었다.

확인해볼래요?”

뭉치는데 성공한 거야?”

맥은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점잖게 놀라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톰에게 내밀었다. 톰은 웃으면서 주먹 쥔 손을 펴 맥의 손을 잡았다. 맥은 사탕이 눌어붙은 톰의 손에서 덩어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 실패예요.”

맥은 넉살좋게 웃는 톰을 보며 왜 그렇게 웃고 있는 건 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맥의 손을 꽉 쥐었다.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솜사탕처럼,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손처럼. 하지만 신기하게도 솜사탕이 묻은 그 사람의 손은 쉽게 쥘 수 있었고 눅진하게 감겨오는 솜사탕 효과 덕분에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대가

 

헬사렘즈 로트에서 살면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마치 원래 목표에서 빗맞히기라도 한 것처럼 죽음이 난데없는 경로로 그를 찾아왔다. 무엇을 맞히려고 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헬사렘즈 로트에서 인과관계는 너무 많이 흐려져서 죽음이 휘어진 경로를 추적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고통은 없었고 오직 죽음만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닥에 흩뿌려진 식료품들과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가 차갑게 굳어가는 자신의 손을 세게 부여잡고 있었다. 죽지 말아요. 그 존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고 소음처럼 들렸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죽고 싶지 않아요. 남자가 내뱉은 말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소음이 되어 흩어지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한 뒤 남자는 눈을 감았고 다니엘이 눈을 떴다.

아프다, 인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쉰 목소리가 나갔다. 불필요한 소음이 뒤섞여서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은 뻣뻣하게 굳어있던 고개를 힘겹게 돌려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과 그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안 볼 때도 되었는데 어쩐지 계속 보게 되는 존재가 되살아난 온기로 다시 유연해진 다니엘의 손을 세게 부여잡고 있었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지.”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프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얘기하는 게 더 들어맞는 것 같았지만 사소한 사항은 둘째 치고 그다지 맘에 드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아픈 건 좋아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아직 가시지 않은 어지럼증을 쫓아내며 스티븐과 좀 더 대화를 주고받았다. 제대로 대답하고는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대화를 이어가며 나른한 느낌이 얼른 가시기를 기다렸다. 되살아난 것은 오랜만이라 부활에 따르던 대가가 무엇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음으로 왕왕대는 귓가에서 스티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면 그 셔츠 입고 업무로 복귀하는 건 좀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괜찮다면 내 집에 들렀다 가지. 셔츠는 충분히 있으니까. 코트는 없지만.”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셔츠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못 입게 되었으니 부하더러 사오라고 하면 되고 아니면 옆에서 계속 말을 시키는 이 남자를 옷가게로 보낼 수도 있었다. 자신을 위해 뛰어들어 목숨을 바쳤으니 셔츠 정도는 사다줄 테지. 사실 지금은 옷이고 뭐고 그냥 어딘가에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좋아. 근데 그냥 사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군. 사이즈가 맞는 걸로, 흰 색이면 좋겠어.”

다니엘은 대충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상할 것 없이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스티븐은 왠지 좀 곤란한 눈치다.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판단을 다시 할 시간이 충분히 지났지만 끝까지 다니엘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자 스티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위님 사실 이 말은 할까 말까 했지만. 셔츠랑 코트만 갈아입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아랫도리를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 다니엘은 스티븐의 말을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랬다. 죽음은 살아생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놓아버린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배변 실수를 다시 하게 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아무리 오랜만에 죽었다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죽는 무언가를 보는 도시에서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 보면 간과했다기 보다는 나른한 정신 상태 때문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뛰어들기 전에는 이 점을 계산했던가 분명하진 않았다. 젠장. 망할. 이 상황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하필 이런 실수를 한 것이 스티븐 앞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이 말이 없자 스티븐이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것처럼 웃으며 늘씬한 팔을 휘저었다.

괜찮아. 내 집은 여기서 가까워서 걸어갈 수 있고 HL에 사는 아주 민감한 존재들 눈에 띄지 않고 갈 수 있는 길도 있지.”

……얼른 안내해.”

다니엘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이 쪽. 스티븐이 손가락으로 어두침침한 골목길을 가리켰다. 평소라면 시야가 좁아지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게 불편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밝은 빛을 받으며 걷는 것보다 안전하게 느껴졌다. 골목길로 들어선 후 몇 번인가 짜증날 정도로 길을 틀며 한 명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너비의 샛길로 들어섰다. 방향 감각에는 자신이 있는 다니엘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곳이 어디 인지,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에 관한 느낌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스티븐을 따라나설 때 속으로, 집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적이나 다름없는 경찰한테 알려주는 건 무슨 배짱인가 싶었지만 곧 스티븐이 그렇게 빈틈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도착했다며 발걸음을 멈추는 스티븐을 보고서야 그의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주변 풍경은 익숙했지만 아직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말끔한 원룸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이 어딘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스티븐은 그런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여긴 본가는 아니고 일이 있을 때 비즈니스용으로 쓰는 곳 중 하나긴 하지만. 일단 오피스텔 같은 곳이니 시설은 다 갖춰져 있지. 씻고 있으면 옷은 사올 테니까. 참고로 욕실은 저 쪽.”

알았어, 알았다고. 그 정돈 나도 알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저 남자 입으로 굳이 말하게 하는 것이 싫어서 다니엘은 짜증스럽게 말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스티븐이 나가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재빨리 코트를 벗고 목만 남아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버렸다. 양복 안에 입고 있던 셔츠는 너덜너덜해져서 굳이 단추를 풀 필요가 없었고 웃옷을 벗을 때 이미 반쯤은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바지를 벗고 옷은 전부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샤워부스와 욕조가 모두 갖춰져 있었는데 다니엘은 부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었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물줄기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한번 죽으면서 배출해낸 것들은 손쉽게 씻어 내릴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나중에 찾으러 가봐야겠다.”

다니엘은 샤워기가 뿜어내는 소음 속에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직 눈을 감고 있을 때 단 한 번만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다니엘을 빗나간 죽음이 애꿎은 목표물에 처박히는 순간이다. 죽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대신 죽음만 튕겨내는 능력은 언뜻 보면 부활하는 듯 보이지만 실속은 야비하다. 살아나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은 다른 이의 목숨이었다.

다니엘은 뉴욕이 붕괴되었을 때 한번 죽었고 그 때 능력을 얻었다. 그 때 죽기 직전까지 살아나려고 버둥댔던 기억이 지금은 희미하다. 다른 누군가와 목숨이 교환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세 번째 죽음에서였다. 그 이후로 다니엘은 절대로 능력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헬사렘즈 로트에서 경찰로 근무하면서 그는 부하와 스티븐이 보는 앞에서 또 한 번 죽었다. 시야가 사라지기 직전에 부하를 봤었는지 스티븐을 봤었는지 기억이 애매했다. 어쨌든 그 때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은 죽기 싫다는 게 아니라 혹시 둘 중 한 명이라도 죽게 된다면-이었다.

HL로 온 이유도 능력을 믿고 온 건가?

아까 스티븐이 물었던 질문에 다니엘은 노코멘트, 라고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건 대단해서 다니엘은 나중에 자신이 자연사라도 할 수는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면 굳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필요가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내기에서 기회를 두 번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사기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세상에는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균형이라는 게 존재해서 한 명이 두 번 기회를 가지면 누군가는 한 번조차 선택할 수 없게 되고 두 번 기회를 쓴 사람이 버린 길을 가야한다. 다니엘은 죽음으로 죽음을 막아내는 이 능력을 남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헬사렘즈 로트에 경찰로 남아있는 이유에 관해서 묻는다면 과연 그 능력을 심리적인 방패막이로 삼지 않았는지는 모호했다. 사명감이라고, 자신이 남아있는 이유는 그렇게 규정하고 싶었고 그것은 확실하게 진실의 일부일 것이지만.

오래 걸리는군.”

시끄러. 옷이나 내놔.”

다니엘은 욕실 문을 조금 열고 손만 내밀었고 스티븐이 옷걸이에 옷을 걸 듯 그가 내민 손에 쇼핑백을 걸어주었다. 다니엘은 욕실 안에서 옷을 전부 입고 나왔다. 물론 받았던 쇼핑백 안에는 죽음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옷가지들이 들어있었다. 생각보다 품격이 느껴지는 쇼핑백이어서 담기 전에 동작을 멈추긴 했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다니엘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뜨이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죽음이 남기고 간 피로감과 뜨거운 물에 녹아내린 몸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었다. 욕실에서 잠들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엄청 자연스러운걸. 몇 번 와봤던 곳도 아닐 텐데.”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웃는다. 저 남자를 살린다고 사람 한 명을 죽였는데 지금은 안락한 침대에 누워서 안도감에 휩싸여 있다. 왜 저 남자를 살리려고 했을까 생각해보았다. 현장에서 나누었던 대화에 이미 답은 세 가지나 제시해 놓았다. 그가 죽으면 곤란하니까. 지독하게도 이기적이라서 다니엘은 그냥 잠시 눈을 다시 감고 싶었다. 그가 방금 했던 행위와 무차별적인 살인의 다른 점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그래도 잠들기 직전까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었다.

다시는 내가 보는 앞에선 죽으려고 하지 마라.”

그렇군. 죽음의 대가 앞에서 어설픈 죽음을 선보이는 건 부끄럽지.”

진심은 아닐 테지만 차분한 어투를 빌려 빈정대는 것처럼 찔러보는 스타일은 스티븐다웠다.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나중에 일어나서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길 테다. 다니엘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죽음의 대가라는 건 있을 수 없어. 대가는 끊임없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탄생하지. 하지만 죽음은 반복할 수가 없어. 그렇게 하기 싫어. , 죽음의 대가는 정말 사양 한다…….”

죽음은 반복할 수가 없다.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불가능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언약이다. 어떤 언약이냐 하면,

이건 경고다. 빗나간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수 없다. 나는 책임질 수 없어. 그러니까 알아서 도망치도록. 다음번에 혹시라도 내가 살아날 때 또 누군가는 죽을 테니까, 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한 약속이다. 그건 헬사렘즈 로트의 거리에서 방송해대는 걸로도 충분했다. 이 이상 기록을 늘릴 생각은 없었고 고작 다섯 번으로 대가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까.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다니엘의 이마에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차가운 손이 닿았고 다른 쪽 차가운 손이 부드러운 온기를 선사했다. 푸근한 이불을 덮고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그는 스티븐의 말소리를 들었다.

알아.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푹 자.”

 

- 에필로그: 다니엘 경위의 사소한 궁금증 하나 -

 

눈을 떠 보니 여전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가에 드리워진 새카만 어둠 속에서 거리를 밝히는 불빛이 더욱 빛나보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고 업무 복귀를 선언하기에는 데드라인이 너무 지나가버렸다.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것은 그 동안 배터리를 방전시킬 만큼 연락이 왔었다는 과거를 함축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옆에서 누가 중얼거리듯 말을 걸었다.

연락은 해 뒀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다니엘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핸드폰을 거의 떨어뜨렸다. 핸드폰을 사수한 후 보지 않았던 쪽을 돌아보니 스티븐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붉은 입술이 휘어지는 경로가 보였다. 밤거리를 밝히는 눈부신 불빛에 적응했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자다 깬 것처럼 평소보다 머리가 좀 더 부산스러워 보이는 스티븐이 보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야 볼 수 있는 그의 면전에 대고 다니엘이 속삭이듯이 소리쳤다.

, 깜짝 놀랐네. 뭐야, 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

내 집인데 그럼 어디서 자? 어차피 오늘은 여기 머무를 생각이었고, 생각보다 오래 자길래 소파에서 잘까 했는데 침대에 남아있는 공간이 거부하기에는 참 넓더라고.”

스티븐이 말한 대로 침대는 이인용이니까 두 명이서 자도 상관은 없긴 했다. 다만 뭐랄까. 저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서 잔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침대에 남아있는 공간을 두고 소파로 옮기기에는 뭔가 지독히 아쉬웠다. 침대는 한껏 안락하게 장만해놓고 소파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재질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이 집에 들어오면 소파보다는 침대에 앉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까운 공간이 남으니까 두 명이 누워서 잔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누웠지만 절대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문득 떠오른 의문에 다니엘은 등 너머로 스티븐을 불렀다.

근데 왜 혼자 사는 집에 침대가 이인용이냐?”

넓은 침대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공간을 십분 활용하는 스티븐이 괜히 남아나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다는 게 이상했다. 그가 묻자 스티븐이 잠결에 부스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코멘트.”

 

죽음의 대가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대가는 끊임없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탄생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반복할 수가 없다.

 

죽음의 대가 上

 

이 공격을 정면으로 맞았다간 죽는다. 스티븐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스티븐은 가능성에 도박을 걸 각오를 다졌다. 혈동을 최대한 발동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모든 걸 걸기로 하고 그는 버틸 자세를 취했다. 만약 버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 그걸 생각할 능력조차 사라지겠지. 스티븐은 최대한 잡생각을 배제하고 공격을 막아내는데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 아주 짧은 순간 뒤에 결판이 나리라-여전히 스티븐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 때, 충격파와 대면하기 바로 직전에 누군가 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스티븐은 무의식중에 그가 크라우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고 크라우스가 달려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뛰어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스티븐은 매서운 흙먼지 속에서 보이는 음영의 정체를 가려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뛰어드는 것은 순식간이어서 이번에는 막을 새조차 없었다. 그는 무사할까?

어째서……?”

스티븐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 대부분은 말로 내뱉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랜 습관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속말을 가감 없이 육성으로 뱉어낸 이유는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관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니엘 경위가 등을 보이며 자신의 앞을 막아섰는가에 관해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계의 존재는 일반인으로서 막아낼 수 없는 상대였고 막아섰다가는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죽을 거란 걸 알 텐데도. 그래서 경찰이면서도 매번 그들과의 싸움에서만큼은 라이브라를 눈감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의 목숨도 소중했고 스티븐은 그것을 탓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생명유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다니엘의 상태는 심각했다. 한눈에 봐도 저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처였다. 그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대량의 혈흔은 하얀 바탕의 셔츠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였다. 다가오는 죽음만큼이나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멍청아! 빨리 끝장을 내라고!”

목구멍에서 피가 끓어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이미 스티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 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속도와 무게를 실어 힘껏 돌려 찬다. 이미 한 번 치명상을 입은 이계의 존재는 스티븐의 발차기를 견디지 못하고 길게 울부짖었다.

마무리로군.

좀 더 일찍 마무리 지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스티븐이 속으로 단호하게 부르짖은 외침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음 속에 묻혀갈 무렵 붉은 빛이 번쩍이고 빠르게 사그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계의 존재 대신 날카로운 얼음의 창들이 남았다. 깔끔한 마무리를 자축하는 것은 생략하고 스티븐은 방향을 틀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뛰어갔다. 그 곳에는 옷자락까지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사람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평소 표정과 별다를 게 없어서 고통 때문인지 그저 눈을 감은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경위! 이봐! 이미늦었나.”

스티븐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냉기 속에서 더 느끼기 쉬울 다니엘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뛰고 있었을 심장도 멈췄다. 죽음을 말해주는 모든 신호가 그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무모했어.”

스티븐은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무모한 경찰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고 주변을 이용할 줄 알았다. 방금 전에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판단은 정확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변에 이용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다니엘은 다시 한 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스티븐은 힘없이 바닥에 떨궈져 있는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스티븐은 맞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있는 힘껏, 만약에 살아있다면 아프다고 칭얼댔을 정도로. 다니엘은 살아생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발화점이 낮았다.

아프다, 인마.”

가까운 곳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쉬어있었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스티븐은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던 사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기쁘지만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지.”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소릴 하네. 설마 지금 내가 살아있는지 보려고 그렇게 손을 뭉개는 거냐?”

쏘아붙이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다. 스티븐은 순순히 손을 놔주고 다니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두 번째로 보는 거지만 역시 신기하단 말이지. HLPD 불사의 형사. 죽지 않는 능력이라니. 아니, 죽지 않는 게 아니라 부활하는 거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죽긴 죽었으니까.”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어쨌든 특히 이곳에서 유용한 능력이지.”

“HL로 온 이유도 능력을 믿고 온 건가?”

노코멘트.”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니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고 스티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는 부축을 받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가슴팍에 남은 대량의 혈흔과 찢어진 셔츠를 제외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가 했던 희생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구해준 상대가 누구인지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직접 지켜봤기 때문에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설마 그 능력을 날 위해 쓸 줄은 몰랐는데.”

스티븐은 의구심을 솔직하게 입에 담았다. 여태까지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다니엘은 코트에 묻은 흙먼지를 털면서 잇새로 웃었다. 피가 튀어서 옷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흙먼지를 터는 게 효과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는 옷을 최대한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첫째, 그 쪽이 죽어버리면 라이브라의 활동이 축소될 테고 그건 이쪽도 곤란해. 괴물들을 상대해 줄 괴물은 잘 확보해놔야 하니까. 둘째, 그 쪽 보스한테는 빚진 게 있어. 셋째,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방관하는 건 경찰로서 직무유기다. 이상.”

명확한 이유들이로군. 바로 생각나는 반론의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스티븐은 계속 옷을 털고 있는 다니엘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셋째 항목은 조금 걱정이 돼. 경위가 막을 수 있는 죽음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티븐은 이 말은 속으로만 읊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구해낼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목숨들은 훨씬 많아진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잃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눈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했을 때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면죄부가 없다. 하지만 정말 그가 잃는 것이 없을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다니엘은 말하자면 죽는 행위에 관해서는 대가다. 그와 같은 죽음의 대가는 치러야 할 대가조차 면제되는 것일지에 관해서 스티븐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지는 않지만 죽음의 고통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이번에도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에 뛰어드는 순간까지 그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이것도 아무런 증거는 없었고 단지 스티븐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 능력, 나랑 그 부하 말고 또 본 사람이 있나?”

아니, 아직.”

그렇다면 그 셔츠 입고 업무로 복귀하는 건 좀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괜찮다면 내 집에 들렀다 가지. 셔츠는 충분히 있으니까. 코트는 없지만.”

찢어지고 피로 물든 셔츠는 그의 희생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다. 셔츠를 갈아입는다면 그는 헤진 죽음을 한 꺼풀 벗고 완전하게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로써 죽음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위해 다시 한 번 죽을 수 있다. 스티븐이 제안한, 어딘지 미심쩍은 선심에 다니엘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그냥 사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군. 사이즈가 맞는 걸로, 흰 색이면 좋겠어.”

웃는 경찰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형사들 사이에서 내기를 하는 건 생각보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만성적인 긴장감으로 날카로워져 있는 분위기를 풀어주기는 윤활제 역할로 적격이기 때문이고 그 이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 때로는 으슥한 뒷골목에서 마약이라도 거래하는 것처럼 서로 낄낄거리다가 지나가던 행인의 미심쩍은 시선을 의식하고 짐짓 근엄한 척 하느라 매번 표정을 험악하게 굳힌다. 그래서 사실, 일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경찰들이 웃는 걸 보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경찰들은 언제나 위협적인 눈초리를 하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경부보, 내기 하나 할까?"

으슥한 뒷골목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내가 웃으면서 제안을 한다. 웃지 않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기란 사실상 힘들다. 그는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기? 그런 건 믿을 수 있는 사람하고만 한다."

그리고 나는 사내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아마 경찰로서 그를 믿을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라이브라와 경찰의 관계는 그랬다. 서로 믿지 않고 협력을 한다. 내기를 제안한 상대는 거절을 당했는데도 여전히 여유로운데 그것은 상대를 믿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었다. 서로 기대하는 것이 없기에 거절당해도 별다른 타격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 미소에 기분나쁜 느낌이 감돌았다.

"내가 이겼군."

"?"

"경부보가 과연 내기를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일지에 관해 내기를 했거든. 나는 하지 않는다, 에 걸었지."

나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사내와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바로 그의 주변을 가득 메웠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기에.

"설마 그 반대에 거는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널 믿거나, 널 잘 모르거나, 아니면 널 잘 모르니까 믿는 사람이군."

"그럴지도."

스티븐이 웃었다. 스티븐은,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과는 두 번째 내기도 했어. 경부보에게 다시 내기를 하자고 한다면 받아들일까? 나는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에 걸었지."

대체 저 스티븐과 내기를 하는 사람은 누굴까. 라이브라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혹은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즉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보아하니 그에게 꽤나 휘둘리는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질 게 뻔한 내기를 두 번이나 하는 걸 보면. 어쨌든 스티븐이 이 쪽을 보고 웃고 있었고 그건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경부보 내기 하나 할까?"

"이봐 이봐, 지금 아주 비굴해 보이는 거 아나? 난 이미 안 한다고 했어."

"또 이겼군."

. 묘한 압박감이었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인물이 내가 스티븐이 제안해오는 내기를 거절할 때마다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크게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경찰인 내가 자꾸 거북한 느낌을 부추겼다. 그 사람은, 내기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여전히 스티븐은 이 쪽을 보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과 세 번째 내기도 했어. 그 쪽이 내기를 받아들일지 아닐지에 대해서. 그래서, 경부보.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대체 이 인간은 뭘 원하고 있는 걸까? 그는 도통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남자다. 그리고 이런 남자와 이런 수상쩍은 내기를 시작한 사람도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 사람은 나와 스티븐의 관계를 알긴 아는걸까? 경찰과 라이브라의 내기라니 성립하기 힘들지 않은가. 아니면 가능성이 적은 쪽에 습관적으로 내기를 거는 사람인가. 그런 유형의 인물이라면 라이브라 내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내기 상대가 라이브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미적지근한 죄책감이 자꾸 성가시게 굴었다. 혹시 그는 불리한 내기에 계속 응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무슨 내긴데 자꾸 그러는 거지? 이상한 거면 체포해 버린다."

"그럼 내기에 응하는 건가?"

내기의 내용을 듣게 되면 내기에 응해야 한다. 그건 높은 확률로 전제되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내용을 듣고 판단하겠다고 물러서면 비겁한 사람으로 몰리곤 한다. 그렇지만 저 남자에게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그다지 마음 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상한 내기라면 가차없이 발을 뺄 수 있다. 물론 거짓말을 곁들이는 것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그래."

"내가 이겼군."

. 어째서? 내가 동요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스티븐이 슬며시 웃는다.

"나는 세 번째 내기에는 응할 거라는데 걸었거든. 완승이로군."

아차, 그러고 보니 세 번째 내기에서 그가 어느 쪽에 걸었는지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무심결에 이번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다고 넘겨짚어 버렸다. 분했지만 좀 더 신경쓰이는 것은 내기에서 완패한 상대의 안위였다. 어쩌면, 저 남자라면. 그런 생각이 맴돌면서 나는 조금 다급하게 언성을 높여버렸다. 어쩌면 내가 그와의 내기에서 이긴다면 상대를 구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뭐에 관해 내기를 걸고 싶은건데? 그거나 얘기해보라고."

", 사실 생각해놓은 건 없어. 내가 뭘 믿고 그 쪽이랑 내기를 하겠어?"

그래. 더 이상 아무래도 참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실 상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자리에서 스티븐을 체포하는 거였으니까. 그를 구속할 이유에 관해서는 수십가지라도 댈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싶다. 당황하는 그를 서로 연행하는 생각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어느샌가 나는 웃고 있었다. 아주 아주 기분 좋게.

"경부보는, 내 앞에서 자주 웃는 것 같아. 특별해진 느낌이로군."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웃으니까 훨씬 나은걸. 앞으론 자주 웃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아 잠깐만-여보세요? 아 예. 오랜만입니다."

스티븐은 여전히 나는 모르는 누군가와 기분좋게 통화를 했다. 그가 통화를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절대로 그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와 통화하는 상대를 위해서-그 때 스티븐이 여전히 통화를 끝내지 않은 채 이 쪽을 바라본다.

"미안. 지금 일이 생겨서 가봐야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고."

그렇게 그는 조촐한 회담을 열기로 했던 뒷골목을 미련 없이 떠났다. 그 곳에 휑하게 남은 것은 마침 바닥으로 낙하한 담배 꽁초 하나와 나였다. 담배 꽁초는, 앞에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남학생들이 떨어뜨렸다. 그들은 으슥한 뒷골목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그 쪽을 쳐다보는 나를 발견하고 뜨끔한 것 같았다. 현장 검거는 간만이다. 바닥에 떨어진 꽁초는 주워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렸다.

"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면 벌금인 거 알지?"

"-하필."

그래. 아마 너희한텐 재수가 없는 날일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도. 아주 재수가 없었다.

"다음부턴 제대로 버려."

벌금 딱지를 떼면서 생각해 보니 오늘도 그들에게 경찰은 언제나 위협적인 눈초리를 하고 노골적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투덜거리면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니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실 경찰은, 좀처럼 웃기 힘들었다.

 

미싱 링크 4. 울지 않는 새 논리의 반례

 

반쯤 열려있던 대문을 박차고 뛰쳐나오자마자 굉음이 들렸다. 막 점심 식사를 끝낸 인부들이 다시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투박한 장착용 유압 브레이커로 보도블록에 박힌 정체불명의 돌을 깨부수느라 분주했다.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용의자를 찾을 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목격담이다. 다니엘은 무심코 지나쳤던 인부들에게로 다시 뒷걸음질 쳤다.

"이봐!"

다니엘이 크게 팔을 휘저으며 소리치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인부 한 명이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그를 흘겨보았다. 대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큼지막한 암석이 잘 부서지지 않아서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뭔 일이슈! 공사 중이니까 저리로 가요!"

"혹시 키 크고 검은 머리에 양복 입은 남자 어디로 갔는지 못 봤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사람이 어디 한 둘이야!"

노파랑 같이 있었고 얼굴 한 쪽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 부연설명을 끝내자마자 말을 걸었던 인부의 옆에 있던 사람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건너편에 있는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던데."

넓은 대로를 놔두고 왜 저런 곳으로 사라졌을까. 이제 남자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수상해보였다. 다니엘은 속으로 의혹을 키우며 골목으로 달려갔다. 양 쪽이 모두 건물에 가려 한낮이지만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그 곳은 완벽하게 그림자로 녹아든 길이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머리를 두드리던 공사판 소음이 여기서는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고요하고 어두운 골목은 어딘지 그 남자와 닮아있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특이한 점 때문에 다니엘은 곧 그 골목길이 마음에 들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평범한 골목길처럼 여러 갈래로 길이 어지럽게 갈리면서 구획이 나뉘었겠지만 이 골목길은 한쪽 길은 막혀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골목길 한 쪽을 막아서고 있는 건물의 정체는 다른 구획에서 이쪽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덕분에 다니엘은 고민 없이 단 하나 남은 길로 방향을 틀었지만 행운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고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했다.

"제길, 어디로 가야되지."

이럴 때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형사의 직감이라는 게 있어서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남자를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찾지 않던 신을 찾으며 제일 그럴듯하게 감이 오는 길을 택해 끝까지 가 보았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놓쳤나. 다니엘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찰 신분증은, 절차가 성가시긴 하지만 잃어버려도 재발급 받을 수 있다. 이대로 가망 없는 추격을 포기하고 그냥 호출에 응답해 서로 출동하는 게 나을지도. 그 남자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먹을 것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나중에 그것을 빌미로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일을 기약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다른 한 편에서 다시 굉음이 들렸다. 공사장과는 이미 충분히 멀어졌기 때문에 그 곳에서 이렇게 큰 소리가 들려올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 들린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파괴적이었다. 도로를 잡아 비트는 것 같은 소리는 한 번으로 끝이었지만 마치 잡아끌린 것처럼 다니엘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조금 늦을 것 같아.”

모서리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다! 다니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니엘은 골목길 모서리에 몸을 기댄 채 슬쩍 상황을 엿보았다. 남자에게 접근해가는 와중에 그는 이상할 정도로 한기를 느꼈는데 모서리 너머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지만 그 남자의 주변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지열에도 녹지 않는, 에메랄드처럼 단단한 얼음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앞에는 평생에 처음 보는 괴상한 생물체가 머리만 남겨놓고 얼어붙은 채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각질로 뒤덮인 몸체가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곤충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생김새는 훨씬 기괴했다.

, 그러니까 클라우스에게는 먼저 가라고-”

갑자기 남자가 하던 말을 멈췄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다니엘은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위험하다. 다니엘은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훈련생 시절에도 체격 차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제외하고는 매번 첫 번째로 결승 라인을 끊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겁에 질리지도 않았고 쥐가 난 것도 아니고 몸은 움직일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는데도 다리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 발목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다니엘이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것인지 남자는 여유롭게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관찰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능숙한 다니엘이었지만 남자의 표정에서는 무언가를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큰 키로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내려다보는 가운데 표정은 여전히 온화해서 몸과 표정이 서로 다른 단서를 그에게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하시는 걸까, 형사님.”

네 놈이야말로 뭘 하고 있는 거냐.”

남자는 곤란에 처한 것처럼 웃었다. 다니엘은 이번에도 마치 잘못한 것은 그 쪽이라는 인상을 주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내 경찰 신분증은 왜 가져갔지?”
신분증?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군.”

모르는 척 하지 마!”

좀 더 위압감을 줄 수 있는 거리만큼 다가가 남자를 위협해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얼어붙어서 땅바닥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엉뚱하게도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몸을 의지하고 말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엉거주춤하게 안겨버린 상황을 받아들이느라 다니엘은 정신이 없었다. 약하게 향수 냄새가 났고 상쾌한 향에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체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남자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황급히 상대의 가슴팍을 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쪽에서 다니엘의 팔을 잡고 도리어 끌어당겼다.

무슨……?”

당황한 다니엘에 비해 별달리 당황한 것 같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일단 경찰 신분증을 가져간 건 내가 아니야.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 광경을 목격해버린 이상 적절한 조치도 취해야겠지.”

무슨 조치를? 다니엘은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남자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남자에게서 웃음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할까, 예를 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존재를 말소한다거나.”

다니엘은 비로소 남자가 팔을 잡고 잡아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은 움직일 수 없었고 팔은 잡혀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칼을 경동맥에 들이대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엉덩이를 씰룩이는 정도일 것이다. 위험해. 정말 위험하다. 다니엘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탈출해야 한다. 손과 발이 모두 자유롭지 않을 때 상대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남자의 눈동자가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아이고, 이미 늦었나.”

마담.”

남자가 다니엘의 어깨 너머로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노파가 키우던 보더 콜리가 이쪽으로 혀를 내밀며 달려왔고 그 주인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의 경찰 신분증을 손에 쥐고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는 새가슴을 할딱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노파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불러도 듣질 못 해 이 사람아. 하필 공사판도 벌어지고 해서 더 안 들렸던 것 같지만. 발은 엄청 빨라요. 이거 소파 구석에 박혀있던데.”

흐응-그런 거였나.”

남자가 상황을 납득하는 것처럼 콧소리를 냈지만 다니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러면 남자가 가져갔다고 생각했던 신분증은 사실 그냥 어제 노파와 이야기하느라 앉아있던 소파에 끼어있었고 자신이 의심했던 남자는 결국 무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 이 상황은 대체.

그러길래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야지. 이미 늦었어, 총각.”

? 으앗, 뭡니까, !”

노파가 쯧쯧 혀를 차며 항상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로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다니엘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노파가 다시 지팡이를 거두어들이고 나서도 다니엘은 한동안 그녀를 경계했다. 노파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다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더 콜리가 오늘 따라 유독 충성스럽게 보였다.

내가 보더라고 불리는 건 가명을 쓰는 게 아니고 그냥 별명 같은 거야. 내가 키우는 개 말야. 그게 보더 콜리거든. 맨날 끌어안고 있으면서 그것도 몰랐어?”

.”

다니엘은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힌 것 같았다. 노파가 키우는 개의 견종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부인의 호칭과 연관 지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노파는 지팡이를 휘휘 돌리면서 다시 혀를 찼다.

토니는 경찰견 출신이야. 보더 콜리는 영리해서 경찰견으로 자주 쓰이지. 한 때는 초동수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는데. 그래도 뭐,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신분증 냄새 한번 맡고 냅다 달려가는 게 순간 예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어. 중간에 불행한 사고를 당해서 은퇴한지는 벌써 오래됐지만. 어디보자, 나랑 같이 했으니까 벌써 십삼 년이지?”

?”

, 얘기 안 했던가. 나도 예전에는 경찰이었어. NYPD 맨해튼의 가르시아 경부라고 하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이번에는 후두부를 가격당한 것 같은 혼미함을 느꼈다. 다니엘은 그제야 노파에게서 느껴졌던 부자연스러운 평온함과 어딘지 익숙하게 공감이 갔던 감정의 경험담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지옥의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마담. 저도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렇지. 그래, 그래. 이렇게 일이 꼬여버렸으니 어떡한다.”

다니엘은 이쪽을 지그시 노려보는 노파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침묵이 자리 잡은 골목길에서 토니가 그의 주변을 맴돌며 연신 낑낑댔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둘이 협력해보는 건 어떤가?”

?”

순간 머리 위의 남자와 목소리가 겹쳤다. 다니엘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남자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다니엘이 남자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만큼 그 남자도 다니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노파는 둘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대충 보니까 HLPD는 지금 체계 하나 잡히지 않은 것 같고 라이브라는 쓸데없이 적이 너무 많아. 자네, 지금도 일이 그렇게 많은데 나중에 HLPD가 자리 잡고 나면 인간에게도 쫓길 셈이야?”

그건확실히 좀 성가시겠군요.”

남자는 성가시다고 표현했다. 다니엘은 그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가신 것 이상은 아니라는 것에서 남자가 은근히 우월감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노파가 이번에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네는, 최연소로 승급을 하긴 했다는데 내가 보기엔 아직 부족한 게 태반이야. 일단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익혀야겠어. 그런 의미에서 라이브라가 자네의 보청기가 되어줄 수 있을 거야.”

보청기라니. 다니엘은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다니엘은 라이브라라는 것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 접한 브랜드의 제품을 신용할 수 없다는 느낌에 휩싸여 남자를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싫다면요?”

그럼 여기서 죽겠지.”

단호하게 말을 끊는 노파를 보건데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다니엘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그는 어딘지 못미덥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데요. 무엇보다 지역 경찰은 신용할 수가 없어서요. , 가끔 마담 같은 분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군.”

, 아니 잠깐만.”

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다니엘은 어느새 남자가 다시 그의 팔을 세게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젠장. 다니엘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 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남자는, 뭔 진 모르겠지만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을 가졌다. 다니엘은 초능력이라는 걸 믿지는 않았지만 일부 비밀 결사 같은 곳에서는 실제로 운용되고 있다는 음모론들이 경찰 내부에서는 심심치 않게 돌고는 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형사 한 명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 아닐까. 그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이봐.”

뭐야,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길 건가? 참고로 살려달라는 유언은 기각.”

아주 그냥. 두 팔이 남자에게 잡혀있지만 않았다면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다니엘이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 비해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느끼는 압박감이 줄어들진 않았다.

이봐, 스티븐.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때?”

스티븐이라는 이름은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탐색하는 듯 보이는 그에게 다니엘은 명함 하나를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오랫동안 남자에게 기대어 있었고 팔은 붙잡혀 있었지만 팔꿈치 아래로는 자유로웠다. 그리고 자유로운 부분을 움직여 남자의 주머니를 몰래 뒤지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티븐 A. 스타페이즈. 라이브라.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고 존재를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들은 지옥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괴물들과 대적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도시에서 살아남는 법도 알고 있다.

싫다면?”

그럼 그 쪽 조직에 관한 정보를 지금 당장 세상에 뿌려버리겠어. 라이브라인지 뭔지, 어쩌면 우리 쪽 윗대가리들과도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조직원의 정보가 마구잡이로 세상에 새어나간다면 그건 좀 곤란하겠지?”

이번에 남자는 웃고 있지 않았고 대신 다니엘이 웃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 종이 쪼가리를 그대로 믿겠다는 건가?”

그럼 이건 어때? 아까 통화한 상대 이름이 클라우스던가.”

클라우스라는 이름을 꺼내든 순간 스티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그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처음 들었다. 여태껏 울지 않고 않던 새의 울음소리가 지금에서야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붙잡고 있던 팔을 놓고 그를 확 밀쳐냈다. 어느 틈에 얼어붙어 있던 다리도 녹아서 다니엘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숨 돌릴 새도 없이 그의 옆으로 남자의 다리가 메다 꽂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니엘은 눈을 멀뚱하니 뜨고 남자를 바라보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의 다리가 꽂힌 곳은 충격으로 바닥이 움푹 파였다. 대체 어느 정도의 각력이 있어야 저렇게 되는 것인지 짐작조차하기 힘들었다.

좋아. 그 정도의 비열함이라면 한번 손을 잡아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보청기정도라면 되어주지. 이곳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는 지불해야 될 거야.”

다니엘은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새가 울지 않는 이유는 새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생각해봐야할 것은 정말 새가 울지 않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새는 울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새가 울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날 불현 듯, 지옥의 거리에서 새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느낀다. 새가 없었을 때와 있었을 때, 그 사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을 발견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지만 처음부터 미싱 링크 같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가 듣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에스메랄다와의 이별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야 했을 만남도.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지. 이름은?”

……다니엘, .”

무슨 뜻으로 내민 것인지 불확실한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 다니엘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새 한 마리가 명랑하게 지저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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