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협상하는 하는 법
~빅터편~
명망이 높고 고루한 학술지에서 그 논문을 처음 봤을 때 홀린 듯이 내뱉었던 탄식을 아직도 기억한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편집장이 사체를 재활용해서 산 사람의 신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나열하고 있는 논문을 실을 생각을 하다니.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빅터는 전쟁이라는 것이 한 개인이 다져놓은 자아의 방어선을 어디까지 아슬아슬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흥미로웠다. 대체 이 앙리 뒤프레라는 작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 논문을 학술지에 실을 수 있었으며 그 이전에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는지. 적어도 앙리 뒤프레는 이 학술지에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고상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에게 당연하다는 듯 인격을 부여하곤 했다. 그래서 이 파격적인 방법론을 학계 일선에 제시한 남자에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삿대질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이 갔다. 하지만 자신들을 고상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도덕적인 거부감이 처음으로 거추장스러워질 만큼 앙리의 논문은 완벽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천재는 이 논문이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겸허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겸허한 태도 덕분에 압도적으로 실용적인 장점이 묻히지 않고 고집스러운 노학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빅터는 또한 앙리라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을 방식으로 인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킬 돌파구를 제시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앙리의 신체 접합술은 진전이 없던 빅터의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해주었고 신기루일까 불안감이 들 만큼 완벽했다.
여태까지는 머리와 인체의 다른 장기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시신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빅터의 연구에 커다란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전쟁은 그에게 대량으로 시신을 공급해주었지만 온전하게 보존해주진 못했다. 군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순전히 전쟁터에서 나오는 가장 신선한 재료를 공급받기 위해서였지만 거리를 좁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많았다. 빅터는 참전하기 전까지는 병원에서 나오는 시신을 공수해왔다. 거기서는 생명을 구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던 시신들이 실려 나왔다. 그것도 어떤 경우에는 충분히 참혹했지만 전쟁터에 오고 나서 그는 살릴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다. 시신이 부패해서 미약한 악취가 난다든가 사지가 불완전한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애초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신들이 무기 연구소 실험실에 들렀다가 퇴짜를 맞았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었다. 실험에 쓸 수 없는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면서 빅터가 올려다 보던 하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지와는 다르게 평온하고 초연해보였다. 전쟁으로 임박해 온 죽음 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 많은 이들이 신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만 저런 하늘이나 그 너머에 있는 신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쓰기는 할까. 되살릴 잔해조차 남지 않아 황량한 이곳에서 앙리의 논문은 신보다 가치를 지닌다. 논문에 나오는 신체 접합술을 사용한다면 불완전하게 보존된 시신끼리 이어 붙여 활용할 수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잔해가 한데 모여 생명을 품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시신의 범위는 획기적으로 넓어지며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시행착오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앙리 본인이 아닌 사람이 직접 시술하기에는 논문에 소개된 신체 접합 기술이 너무나 복잡하고 섬세했다는 점이었다. 몇몇 부분은 글로 쓰인 설명만으로는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비교적 눈에 띄는 혈관을 제대로 잇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논문을 참고하며 혼자서 몇 번이나 연습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어설프게 봉합한 부분은 제대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채 흉하게 썩어 들어갔다.
“제기랄!”
분한 외침과 함께 이번에도 실패했다. 빅터는 그의 손에 의해 비로소 쓸데없는 잡동사니로 전락한 시신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죽은 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밤을 지새운 탓에 눈이 뻑뻑했다. 그는 구석에 놓여있는 간이 의자로 비척비척 걸어가 주저앉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차라리 눈을 감았다. 빅터의 관심사는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는 방법이었다. 앙리와 달리 살아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 없었다. 애써 살려놓아도 그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 그런데도 어째서 사람들은 죽음을 되돌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위태로운 생명에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는 일에만 매달리는지. 이에 관해 따져 물으면 그들은 죽음이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단정 지었다. 빅터는 애초에 신을 믿지 않았고 왜 신이 그 영역을 독식해야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겸허하고 무력한 세상에 등을 돌리고 혼자 죽은 자를 되살리는 연구를 시작했다. 제대로 성공시킨다면 그에게서 등 돌렸던 이들도 다시 돌아볼 것이다. 실패한다면-빅터는 아직 이에 관해서 제대로 생각해보진 않았다.
소동물을 대상으로 했던 실험에선 사체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되살렸을 때 근력이 증가하고 다소 난폭해지는 현상이 관찰되었지만 야생에서 동물들은 원래 사나웠다. 통쾌하고 흡족해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과가 나왔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동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을 되살리는데 도전했지만 여태까지와 다르게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근력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부각시켰더니 군대 무기 연구소에서 자리를 하나 내주었지만 실험 일지에 실패만 기록하는 해가 거듭될수록 윗선에서는 독촉이 심해졌다. 빅터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화를 내는 것에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실험이 실패로 끝난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일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한들 그게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죽을 땐 다들 혼자 떠난다. 나쁘진 않았는데 조금 두려웠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두려움이 엄습할 때면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연구에 매달렸고 다시 실패했다.
“앙리…….”
언제부턴가 빅터는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앙리라는 사람은 누군가가 절박하게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빅터는 포기하기 직전에 앙리의 논문을 발견했다. 논문을 읽고 난 날 밤에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믿지 않았던 신을 저주하며 벼랑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던 그였다. 살려달라고 외쳐보고 애원해 보지만 아무도 그가 추락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위험한 곳까지 오지 않는다. 손을 놓으면 편해지겠지. 피투성이가 된 손에서 힘을 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 사람이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전한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이곳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올바른 미소였다. 그를, 만나봐야겠어. 시신으로 가득찬 연구실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진 않았다. 그래서 빅터는 언성을 높여 사람을 불렀다.
“룽게! 외출할 테니 바로 준비해!”
“아이고 도련님. 간만에 외출하시는군요.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빅터는 룽게가 더 쓸데없이 기대에 부풀기 전에 허물어버리는 게 그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러나가는 게 아냐. 제 3사단으로 간다.”
이 날씨좋은 날에 거기는 왜? 생각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마뜩찮게 바라보는 룽게를 향해 빅터는 눈을 치켜떴다. 허겁지겁 준비하러 사라지는 늙은 집사의 뒷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뿌듯한 앞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최단시간에 외출 준비를 마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준비 다 됐습니다. 가시죠!”
“느려.”
“이 정도면 거의 인간의 영역이 아닌 속도인뎁쇼? 도련님도 참, 어디 다른 집사들 보십쇼.”
“빨리 안 오고 뭐해? 시간이 없어!”
갑니다 가요. 룽게가 툴툴거리면서도 말고삐를 잡으려고 하자 빅터가 물었다. 여정이 길어질 텐데 그냥 마부한테 맡기지 그래. 룽게는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빅터의 말에 자신 있게 고삐를 쥐었다.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체력은 젊은이 못지않습니다. 좋은 바람을 쐬지 못하는 도련님이 더 불쌍하다고요. 타시죠!”
“뭐, 굳이 그러겠다면.”
빅터는 자신을 동정하는 룽게의 대담함에 삐딱하게 웃어보였다. 마차에 타도 바깥도 볼 수 있고 바람도 쐴 수 있는데 그 말은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달리면서 스치는 풍경을 보니 어느새 볼 것 없던 황무지에도 생명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계절이 변하는 동안 쉬지 않고 연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회생을 자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공시키고 있었다. 푸릇하게 살아나는 경관이 그를 비웃는 것 같아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리고 커튼을 쳤다. 그는 막히지 않은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시체같이 창백해진 손등을 비춰보며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매일 시신과 같이 있다 보니 죽음이 점점 전염되는 것일지도. 완전히 죽음에 잠식되기 전에 어서 앙리를 만나야 했다.
앙리 뒤프레는 제 3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군의관이었다. 빅터가 상주하고 있는 제 1사단 무기 연구소와는 중간에 격전지로 분단된 곳이었지만 우회해서 가면 못갈 곳도 아니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빅터는 그 동안 앙리를 설득할 방법에 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은 그가 자신의 연구에 협력할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빅터는 앙리 뒤프레라는 인물에 관해 조사해보았다. 앙리의 논문을 읽으면서 그가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느꼈으므로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가치관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의사니까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만을 살려낸다. 아직 살아있는 자를 일으켜 세우며 살려낸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방만한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역으로 죽은 자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그들에게 살려낸다는 말은 아까웠다. 명의 소리를 듣던 빅터의 아버지도 어머니가 죽음에 굴복하자 쉽사리 불길 속으로 던져버렸다. 만약 그 때 아버지가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우지 않고 잘 보존만 했어도 살려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을 한동안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반복했지만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나약한 그들과 달리 상대가 신이고 자연이라는 모습을 빌려 사방에서 그를 비웃는다 해도 도전할 생각이었다. 과연 앙리도 그럴까?
“난리 통은 피해서 가야겠죠?”
“그러는 게 낫겠지. 설마 실험 재료가 될 셈이야?”
빅터는 당연한 걸 물어보는 룽게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면박을 주고나니 앙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여서 룽게가 평소와 다르게 물어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미 말은 뱉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이든 되돌리긴 어렵다. 여태까지 죽음을 되돌리고 생명을 찾아오겠다는 그의 주장에 관해 반은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였고, 나머지 반은 불경하다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밤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의 이상을 비웃는 방법으론 꽤나 질척했지만 그가 대위로 임관한 뒤로는 그런 사람도 없어졌다. 앙리는 여태까지 만나본 사람들과는 또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에게서는 죽은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위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철저히 사체를 고깃덩어리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생명을 다시 불붙이기 위한 연료 정도로 여기고 인격은 부여하지 않는다. 앙리가 고안해 낸 신체 접합술에는 오직 생명만을 구하기 위한 냉랭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빅터는 아직 앙리가 의사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앙리는 훌륭하게 넘지 말라는 선을 하나 넘었다. 죽음을 터부시하고 공허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은 자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해 외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죽음과 삶을 완전히 다른 상태로 보는 기존의 체제에 순응해버렸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사체를 재활용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해낸 것이리라.
빅터는 앙리와 생각이 달랐다. 죽음은 머리가 온전하게 보존되는 한 다른 심각한 질병을 앓는 상태와 다를 게 없었다. 난치병이지만 적절하게 치료만 해주면 그 질병은 나을 수 있었다. 문제는 앙리가 빅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사체를 재활용하지 못할 거라는 지점이었다. 사체도 잠재적인 생명을 품고 있는, 말 그대로 환자와 같은 개념이 되므로 그것을 훼손하면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반대로, 죽음은 삶과 완전히 다른 상태이며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한다면 죽음을 되돌리는 연구에 관해서도 회의적일 테니 마찬가지로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즉, 어떤 경우의 수로 상황이 흘러가든 앙리가 빅터에게 협력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성가시군. 빅터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앙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치기어린 젊은 의사가 창안해 낸 신체 접합술만이 멈춰선 연구를 다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빅터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룽게.”
“예, 도련님.”
“마차 돌려. 쭉 직진해서 전장 근처로 간다.”
“예. 아니, 예?”
말에 꼬투리를 잡으면 빅터가 쉽게 짜증낸다는 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체득한 룽게였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에는 가급적 반사적으로 긍정해주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모시는 사람은 유쾌해하지 않을 테지만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했다. 연구에 오랫동안 실패만 해서 빅터가 지쳐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전장은 위험한데요? 돌아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전장 근처로 가자고 했지 전장으로 가자는 말은 안 했어. 어차피 3사단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고.”
“위험한 건 마찬가지인데요?”
“내 말 들어, 룽게.”
룽게는 여태까지 멈추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온 마차를 처음으로 세웠다. 말들은 간만에 취하는 휴식이 반가운지 금방 멈춰 섰다. 빅터는 마차를 멈춘 뒤에도 별다른 말은 없었고 단지 이제는 선명해진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도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도련님을 위험한 곳으로 이유도 모르고 모실 수는 없으니까요.”
룽게는 빅터가 짜증낼 것을 각오하고 이유를 따져 묻기로 했다. 안 그래도 전방 가까이에 위치한 제 3사단이 가까워지면서 룽게도 신중해지고 있었다. 포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화약 냄새도 미약하지만 바람에 실려 먼 곳까지 당도했다. 아마 그만큼 현장은 치열할 것이다. 적군이 어디까지 포진해있는지도 알 수 없고 도망친 잔병에게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총이 있었지만 애초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곧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를 다그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빅터는 의외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난 어떻게든 앙리를 데려와야 겠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진 중요하지 않아.”
“도련님 맘이야 이해가 갑니다만, 거절하면 그 사람을 납치라도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리고 그게 지금 전장으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주 상관이 있지. 룽게, 아주 중요한 상관이 있어.”
룽게가 떠보듯이 제안한 노골적인 방법에 빅터는 픽 웃어버렸다.
“내가 지지부진한 이 연구에 예산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으로 협상하면서 깨달은 건데 중요한 건 상황이야. 봐봐 개인의 뜻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앙리의 졸업 논문도 통과시켜주고 내 실험에도 돈을 대주고 있잖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상황이지.”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빅터는 룽게에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아돌지는 않을 군의관을 다른 부대에서 억지로 빼 가면 사단 간에 심각한 분쟁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이 지점은 중요했다. 만약 앙리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연구를 같이 하기로 해도 사단에서 거부하면 마찬가지로 데려올 수 없었다. 반대로 앙리가 거부해도 사단에서 그를 보내버린다면 일단 데려올 수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부대에서는 개인의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주는 소중한 군의관을 제3사단에서 보내버릴 이유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인가. 간단했다. 그들을 살려주는 사람이 소중하다면 그들을 죽이는 사람은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을 테니. 물론 앙리는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죽이게 할 수는 있었다.
“난, 앙리 뒤프레가 적군을 치료하게 만들 거야.”
빅터는 제3사단을 지휘하는 중위가 상당히 호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적군을 몰살하고 포로조차 잡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잔인함이 전쟁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빅터의 계획은 이랬다. 그는 전장에서 적군의 제복 한 벌을 얻어서 제3사단의 생존자에게 입혀놓을 것이다. 실험실에 적군의 제복이 몇 벌 있었지만 돌아가기에도 다시 만들기에도 시간이 허비된다. 지휘관의 성향으로 보건대 적군 부상자가 부대 안으로 운반될 가능성이 희박했으므로 아군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다. 되도록 반항할 힘조차 없이 생명이 꺼져가는 부상자를 택하고 그를 나르던 운반책에게는 직위를 내세우며 특별한 기밀 임무를 수행중이라고 압박할 것이다. 앙리 뒤프레라는 군의관이 적군과 내통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그를 시험해 볼 생각이라고 하며 부상자의 옷을 갈아입힌다. 이 임무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길 것이며 일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더라도 발설하면 불명예스럽게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넌지시 해둔다. 상대가 고민할 틈 없이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 부상자를 앙리 뒤프레에게 데려가 달라는 부탁도 곁들이면 완벽했다. 빅터는 룽게를 시키든지 아니면 직접 3사단 내에 앙리에 관한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그가 적군을 은밀히 치료해주고 있다고 말이다.
앙리는 이 덫에 걸려들 것이 확실했다. 그는 부상자를 치료할 테고 중위는 멋대로 적군을 살려내려는 군의관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아마 중위의 성격이 소문대로라면 분명 앙리가 치료하려던 아군은 중위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앙리가 아군을 치료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될지라도 중위는 부정할 것이다. 아군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을 인정하는 것과 군의관 한 명을 잘라내는 것. 그 중에 어떤 게 더 쉬울지는 뻔했다. 죽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세계에서 사는 자들이었으므로 빅터는 이 방법이 먹힐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운반책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설사 그가 죽음을 담보로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증명해 줄 사람은 없었고 앙리가 적군을 치료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일이 저질러진 상태에서는 그것을 되돌리기 어렵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룽게에게서 눈을 감고 웃어보였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상관없어. 후회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어 버려. 그게 죽음으로 협상하는 방법이야.”
죽음을 되돌리려고 하는 사람이 떠올린 방법 치고는 자조적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빅터는 더 이상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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