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버스*

세계관 설명은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gnwW&fldid=LG19&datanum=197446의 두 번째 설명을 참조했습니다.

 

 

아흔아홉 번째 만남

 

 

다니엘은 스티븐 앞에서 피우는 아흔여덟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와 담배 두 개피분 이상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으므로 계산은 확실했다. 보통 누군가와 만날 때 태웠던 담배 개수에 대해서 일일이 기억하진 않는다. 다만 이번 경우는 평범한 상황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다니엘은 샤워 실에서 어깨 언저리에 새겨져 있던 숫자를 외출하기 전에 분명히 상기하고 나왔다. 물기에 젖은 숫자는 아흔여덟 이었는데 이제는 아흔아홉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으로 스티븐과 만난 지 아흔여덟 번째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이 꺼내기 껄끄러운 화제에 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미루고 미뤄왔던 결정을 해야 할 시기가 왔군.”
그래.

주변이 시끄러웠다. 오늘은 평범하고 아담한 술집에서 둘 다 사복차림으로 만났다. 마침 비번이 겹친 우연도 있었지만 이 일만큼은 두 사람 모두 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복을 입은 스티븐은 양복을 입고 있을 때만큼이나 사무적이다. 사실 다니엘은 사무적이지 않은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무적이라는 판단을 내릴 기준은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았지만 종종 곤란하다는 듯 웃는 표정을 보면 사무적인 태도가 그의 본질은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다니엘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도 좋을 상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담배가 맛이 없었다.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일이 되기 전에 파트너의 정체를 알아낸 건 행운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 계산해보자고. 헬사렘즈 로트에서 경찰로서, 라이브라로서 살면서 앞으로 단 한번이라도 너랑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클까, 아니면 너나 내가 인간, 이계인, 혈계의 권속, 오발된 총기류, 교통 법규를 무시한 차량, 자연 재난, 아니면시발, 정말 뭣같이 많네. 어쨌든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연쇄 작용으로 너나 내 머리위에 떨어지는 불행한 모든 사건사고로부터 모두 생존해서 자연사할 확률이 클까?”

경위, 아니 이제 경감님이지. 내 머리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우리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아흔아홉과 둘이 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그 중 몇 번은 우리가 자초해서 만난 만남이었고 상당수는 의도하지 않은 조우였는데. 과연 헬사렘즈 로트 바깥에서라도 앞으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스티븐은 술잔에 담긴 맥주를 의미 없이 흔들었다.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제약이 지켜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눈을 치켜뜨고 스티븐을 노려보았다.

네 놈이 사무실에 처박혀서 서류만 본다면야.”

미안하지만 나는 인력이 모자라는 라이브라의 중요한 전력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그냥 경감님이 내근으로 돌리는 건 어때?”

거절한다. 나도 구멍 많은 HLPD의 경감이라서 말야.”

그리고 어차피 서로 실내에 박혀있더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걸 통제하는 건 불가능해. 게다가 난 평생 실내에 있을 생각은 없어. 사생활을 희생하고 각자 경보기가 달린 위치추적장치를 달아서 접근반경 안에 들어오면 경보음이 울리게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도 재수 없으면 마주칠 수도 있겠지. 지금 여기서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 백퍼센트 확실한 방법은 없고 저번처럼 각자 손님 대동하고 음식점에서 마주쳤다가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거야.”

스티븐의 마지막 말에 다니엘은 다시 눈을 치켜떴다.

, 그러고 보니그런 방법이 있었군.”

뭐야, 설마 고려해보지 않은 거야?”

아니, . 평소라면 분명 생각해봤을 텐데-잠깐, 그럼 설마 네 놈 그것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단 거냐?”

다니엘이 살짝 의자에 비켜 앉으며 거리를 두었다. 스티븐은 그런 다니엘을 보며 특별히 변명하진 않았다.

생존이 걸린 문제잖아. 어쨌든 중요한 건 그 방법은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단 거지.”

다니엘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티븐과 얘기할수록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를 파트너로서 인정하고 합당한 신체 접촉을 통해 숫자를 오십으로 만들어 균형을 되찾는 것. 그렇게 되면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은 멈추는 대신 죽음 자체를 공유하게 된다. 파트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 되고 남겨진 한 쪽은 사십구일 동안 과거의 죽음과 미래에 올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억울하기는 했다. 물론 파트너가 죽는다면 죽을 만큼 슬퍼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 실제로 다가오는 죽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죽는 것도, 자신이 죽어서 다른 누가 죽는 것도 그는 달갑지 않았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였다. 다니엘이 고민하는 사이 스티븐도 고민했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는 맞은편 양복점 쇼윈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만약 정말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둘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면 된다. 그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힘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쪽이 뭘 고민하는지 알아. 자기가 죽는 게 가장 걱정이긴 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겠지. 나도 이해해. 니가 네 상사를 두고 죽을 수 없듯이 나는 내 부하를 두고 죽을 수 없단 말이지. 난 내가 절대 대체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모르겠군. 어쨌든 여태까지 보고 판단한 바로는 네 놈이 죽는 모습은 너무 쉽게 상상이 되는데 이상하게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아.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태까지 살아남았고 치사하지만 확실하게 몸을 사릴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알고 있지.”

그 때까지 쇼윈도를 보고 있던 스티븐이 다니엘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방법을 아는 거랑 쓰는 건 꽤 차이가 크다고.”

어차피 헬사렘즈 로트다. 억울하게 죽을 이유야 수없이 많아.”

그렇군.”

스티븐은 마음을 굳힌 듯 자주 쓰던 손으로 탁자를 둔탁하게 두드렸다. 다니엘도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스티븐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파트너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 스치는 것조차 조심했다.

"파트너로 인정하기 전에, 흡연량 좀 줄이는 게 어때. 죽음의 원인은 통제할 수 없다지만 피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피해보기로 하지."

"젠장."

스티븐은 반대편 손으로 다니엘의 손을 세게 잡았다. 둘 다 거칠기 짝이 없는 손바닥이었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지나가고 둘은 서로의 어깨에 새겨진 숫자가 같아진 것을 확인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잔을 집어 들었다. 죽음을 공유한 상대 앞에서 건배를 하기 전에 적절한 축사를 고민하거나 의논할 필요는 없었다. 아흔여덟 번째 만남의 끝에서 약속할 것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다니엘과 스티븐은 서로를 마주보며 망설임 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아흔아홉 번째 만남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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