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특이점

 

 

그는 내게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거래처 전화번호부에서 한 열 서너 번째쯤 위치한 인물이었다. 비교적 리스트 상단에 위치하긴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남자, 다니엘 로. 섬유탈취제를 뿌려서 가려보려고 하지만 담배 냄새가 눅눅하게 묻어나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관리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드세게 뻗쳐있는 앞머리가 한쪽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형사님이다. 입이 험해서 섬세한 비즈니스와는 연이 없을 사람이지만 그의 욕설이 쫓아내는 재난과 사고 덕분에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별안간 모욕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조히스트로 돌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하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사람 같아 보이긴 했다.

그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도 아니다. 현실적이고 사법 체계 내에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내게는 지나치게 올곧은 사람이었다. 라이브라와 손을 잡고 뒤를 봐주는 형사 나리를 올곧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념은 겉으로 보이는 모순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올곧다. 만약 라이브라가 헬사렘즈 로트의 치안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우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어떻게 보면 크라우스와도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런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며 그들이 내뿜는 강력한 에너지를 오히려 동경하지만 설득해야 하는 상대라면 피곤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가끔은 내가 역으로 설득당하기도하기 때문에. 게다가 그는 생각보다 촉도, 머리도 좋다. 적당히 굴려먹기에는 부적절한 상대였다.

그는 그다지 재밌는 사람도 아니다. 경찰공무원 같은 말을 잘하는 점과 별개로 그는 유머에는 재능이 없다. 형사 일을 너무 오래한 나머지 그가 하는 농담은 일반인들이 웃기에는 지나치게 진지한 문제를 다룬다. 반대로 일반인이 하는 농담은 그에게는 너무 진지한 주제를 가볍게 넘기는 것 같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는 경찰들과 있을 때만 자주 웃는다. 나와 있을 때는, 그의 좁은 미간에서 주름이 없어진 적이 없다. 나 역시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웃진 않았지만. 추가로 그는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당신은 왜 그런 사람이랑 자꾸 얽히려고 하는 거예요?”

얽히려고 해? 내가?”

부드러운 손길이 한 쪽 뺨을 쓸었다. 공격적인 향기가 훅 끼쳐 들었고 잠시 침대가 흔들리더니 아름다운 청년이 나를 내려다보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접근해 오는 사람 널리고 널렸잖아. 오히려 선택권은 그 쪽이 가진 거 아니었어요?”

그건 맞는 말이야.”

그럼 쳐내면 되는 거죠. 정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결국 쳐내지 않는 건 당신이 선택한 거 아닌가요?”

그 말도 맞다. 그가 현재 HLPD의 경감이고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 몇 개를 꿰차고 있는 건 맞지만 원한다면 정보를 빼내기 더 쉽고 다루기 쉬운 상대로 갈아치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간단하게는 거래 상대를 바꿀 수도 있었지만 현재 헬사렘즈 로트처럼 변덕스러운 현장에서 가장 기동력이 좋은 위치는 역시 경감 정도였다. 그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경찰을 관두게 하거나 타 부서로 전근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작업이긴 했다.

내 리더는 그런 식으로 일하진 않아.”

나는 청년을 살짝 밀어서 옆으로 넘어뜨렸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쉽게 넘어가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요?”

그 물음에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난 그의 부하야. 그렇게 답하자 청년이 비리게 웃으며 내 목을 끌어당기고는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 약하게 차오르는 숨소리에 섞여 나른한 음성이 귓가에 은밀하게 젖어들었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식이 있잖아요. 아주 어둡고 잔혹하고-편견이 없어서 내 맘에 드는 그거. 예를 들면 혈계의 권속인 나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한다든가.”

거래는 거래일뿐인걸. 그 쪽도 우연히 내게 진명을 노출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붙잡힌 거나 다름없잖아? 혈계의 권속인 주제에.”

나는 청년을 밀치고 가느다란 팔목을 세게 눌렀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뼈가 바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청년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뼈도 부러지지 않았다. 괴물 같은 녀석들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다. 주제라는 말은 사실 그들보단 인류에게 어울렸다.

청년의 진명을 알아냈을 때 평소에 하던 것처럼 바로 크라우스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간만에 약점을 잡힌 혈계의 권속을 잘 이용해보기로 했다. 만약 청년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힌다거나 허락 없이 피를 사용하는 경우 그의 진명은 곧장 크라우스에게 전송되며 그의 혈액 속에 심어놓은 얼음 씨앗이 모세혈관에 흐르는 적혈구까지 응결시켜버릴 것이다. 아마 크라우스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사태에 관해 크라우스에게 설명할 거리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엘더 클래스는 아니지만 혈계의 권속이기 때문에 이만큼 제어 장치를 해놔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는 거래에는 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 인상 안 좋은 경감과의 거래는 들인 노력만큼의 효용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주는 게 받는 것보다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금 웃고 있네요. 뭐 재밌는 생각 떠올랐어요?”

청년은 항상 내 웃음에 관심이 많았다. 이렇게 침대에서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내 표정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마치 연인처럼. 혈계의 권속 주제에. 침대에서 내키는 대로 청년을 안는 것은 순전히 그가 먼저 내 건 별난 조건 때문이었다. 무슨 속셈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자리에서 그는 지나치게 상냥했다. 인간이었다면, 괜찮은 관계로 발전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볼 정도로. 그리고 그 생각은 대부분, 약점을 잡힌 존재는 고분고분해진다는 것 정도로 끝났다.

너처럼 경감님도 약점이나 잡아볼까 하고.”

그래요?”

청년이 쓰게 웃는 게 눈에 보였다. 왜 그렇게 웃는 지는 잘 모르겠다. 진명이나 흘리고 다니는 바람에 인간에게조차 이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일까. 묘하게도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심술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까지 읽어낼 순 없었지만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됐어. 그 사람한텐 그런 짓은 안 해.”

사실 그럴 가치도 별로 없거든. 나는 흥이 식어서 침대에서 내려와 옆에 있던 커피 잔을 들었다. 그는 단지 헬사렘즈 로트의 현장 사정에 조금 밝은 일반인일 뿐이고 경찰 수뇌부에 아는 사람은 널렸다. 청년이 미약하게 신음하며 방금 전까지 잡혀있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울혈조차 남지 않은 청년의 손목에는 여전히 매끈하고 창백한 광택이 흘렀다. 마치 포르말린이 가득 담긴 표본병에서 방금 탈출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부정할 점 밖에 없는 관계를 당신이 유지하는 건 신기하네요. 특이해요.”

매번 귀찮도록 질문하던 주제에 이번에는 물어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그 말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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