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대가라는 건 있을 수 없다. 대가는 끊임없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탄생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반복할 수가 없다.

 

죽음의 대가 上

 

이 공격을 정면으로 맞았다간 죽는다. 스티븐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스티븐은 가능성에 도박을 걸 각오를 다졌다. 혈동을 최대한 발동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모든 걸 걸기로 하고 그는 버틸 자세를 취했다. 만약 버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 그걸 생각할 능력조차 사라지겠지. 스티븐은 최대한 잡생각을 배제하고 공격을 막아내는데 집중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 아주 짧은 순간 뒤에 결판이 나리라-여전히 스티븐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 때, 충격파와 대면하기 바로 직전에 누군가 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스티븐은 무의식중에 그가 크라우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고 크라우스가 달려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뛰어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스티븐은 매서운 흙먼지 속에서 보이는 음영의 정체를 가려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뛰어드는 것은 순식간이어서 이번에는 막을 새조차 없었다. 그는 무사할까?

어째서……?”

스티븐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 대부분은 말로 내뱉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랜 습관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속말을 가감 없이 육성으로 뱉어낸 이유는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관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니엘 경위가 등을 보이며 자신의 앞을 막아섰는가에 관해서.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계의 존재는 일반인으로서 막아낼 수 없는 상대였고 막아섰다가는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죽을 거란 걸 알 텐데도. 그래서 경찰이면서도 매번 그들과의 싸움에서만큼은 라이브라를 눈감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의 목숨도 소중했고 스티븐은 그것을 탓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생명유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다니엘의 상태는 심각했다. 한눈에 봐도 저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처였다. 그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대량의 혈흔은 하얀 바탕의 셔츠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였다. 다가오는 죽음만큼이나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멍청아! 빨리 끝장을 내라고!”

목구멍에서 피가 끓어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이미 스티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 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속도와 무게를 실어 힘껏 돌려 찬다. 이미 한 번 치명상을 입은 이계의 존재는 스티븐의 발차기를 견디지 못하고 길게 울부짖었다.

마무리로군.

좀 더 일찍 마무리 지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스티븐이 속으로 단호하게 부르짖은 외침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음 속에 묻혀갈 무렵 붉은 빛이 번쩍이고 빠르게 사그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계의 존재 대신 날카로운 얼음의 창들이 남았다. 깔끔한 마무리를 자축하는 것은 생략하고 스티븐은 방향을 틀어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뛰어갔다. 그 곳에는 옷자락까지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사람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평소 표정과 별다를 게 없어서 고통 때문인지 그저 눈을 감은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경위! 이봐! 이미늦었나.”

스티븐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냉기 속에서 더 느끼기 쉬울 다니엘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뛰고 있었을 심장도 멈췄다. 죽음을 말해주는 모든 신호가 그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무모했어.”

스티븐은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무모한 경찰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고 주변을 이용할 줄 알았다. 방금 전에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판단은 정확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변에 이용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다니엘은 다시 한 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스티븐은 힘없이 바닥에 떨궈져 있는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스티븐은 맞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있는 힘껏, 만약에 살아있다면 아프다고 칭얼댔을 정도로. 다니엘은 살아생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발화점이 낮았다.

아프다, 인마.”

가까운 곳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쉬어있었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스티븐은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던 사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기쁘지만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지.”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소릴 하네. 설마 지금 내가 살아있는지 보려고 그렇게 손을 뭉개는 거냐?”

쏘아붙이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다. 스티븐은 순순히 손을 놔주고 다니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두 번째로 보는 거지만 역시 신기하단 말이지. HLPD 불사의 형사. 죽지 않는 능력이라니. 아니, 죽지 않는 게 아니라 부활하는 거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죽긴 죽었으니까.”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어쨌든 특히 이곳에서 유용한 능력이지.”

“HL로 온 이유도 능력을 믿고 온 건가?”

노코멘트.”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 걸 보니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고 스티븐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곧 그는 부축을 받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가슴팍에 남은 대량의 혈흔과 찢어진 셔츠를 제외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직접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가 했던 희생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구해준 상대가 누구인지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직접 지켜봤기 때문에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설마 그 능력을 날 위해 쓸 줄은 몰랐는데.”

스티븐은 의구심을 솔직하게 입에 담았다. 여태까지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다니엘은 코트에 묻은 흙먼지를 털면서 잇새로 웃었다. 피가 튀어서 옷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흙먼지를 터는 게 효과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는 옷을 최대한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첫째, 그 쪽이 죽어버리면 라이브라의 활동이 축소될 테고 그건 이쪽도 곤란해. 괴물들을 상대해 줄 괴물은 잘 확보해놔야 하니까. 둘째, 그 쪽 보스한테는 빚진 게 있어. 셋째, 막을 수 있는 죽음을 방관하는 건 경찰로서 직무유기다. 이상.”

명확한 이유들이로군. 바로 생각나는 반론의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스티븐은 계속 옷을 털고 있는 다니엘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셋째 항목은 조금 걱정이 돼. 경위가 막을 수 있는 죽음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티븐은 이 말은 속으로만 읊었다.

스스로의 목숨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구해낼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목숨들은 훨씬 많아진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잃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눈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했을 때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면죄부가 없다. 하지만 정말 그가 잃는 것이 없을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다니엘은 말하자면 죽는 행위에 관해서는 대가다. 그와 같은 죽음의 대가는 치러야 할 대가조차 면제되는 것일지에 관해서 스티븐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지는 않지만 죽음의 고통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이번에도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에 뛰어드는 순간까지 그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이것도 아무런 증거는 없었고 단지 스티븐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 능력, 나랑 그 부하 말고 또 본 사람이 있나?”

아니, 아직.”

그렇다면 그 셔츠 입고 업무로 복귀하는 건 좀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괜찮다면 내 집에 들렀다 가지. 셔츠는 충분히 있으니까. 코트는 없지만.”

찢어지고 피로 물든 셔츠는 그의 희생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다. 셔츠를 갈아입는다면 그는 헤진 죽음을 한 꺼풀 벗고 완전하게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로써 죽음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를 위해 다시 한 번 죽을 수 있다. 스티븐이 제안한, 어딘지 미심쩍은 선심에 다니엘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좋아. 근데 그냥 사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군. 사이즈가 맞는 걸로, 흰 색이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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