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와 빅터의 대사의 일부는 http://ganggang.postype.com/post/83137/를 참고하였습니다

* 기반 페어: 형은

* 자작 인물: 이본, 아멜리, 니콜라

 

 

앙리는 이본 할머니가 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움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수의로 싸인 상체가 조금 들썩였는데 어린 앙리의 눈에는 마치 일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 잘 대해주었던 할머니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뻐 앙리는 유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예상치 못했던 생존을 알렸다. 높다란 그의 목소리는 묘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깡마른 시신을 두툼한 석관 속에 넣은 후 그 위에 흙을 덮어버렸다.

앙리,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단다.”

하지만 움직였어요!”

보육원 생활지도와 교육을 담당하는 아멜리는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잘못 봤을 수도 있고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신은 움직이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앙리는 사실 할머니가 죽지 않아서 움직인 거라고 왜 생각하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말도 들었지만 앙리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날 묘지를 파헤치고 땅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할머니를 구해냈다. 집념어린 소년이 잘 묻어둔 묘지를 파헤치는 데는 꼬박 하룻밤이 걸렸다. 이튿날 앙리가 벌인 일을 목격한 보육원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본 할머니는 사실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앙리가 그 말을 했던 날 내내 침착했던 아멜리가 결국 화를 냈고 아이들은 모두 좁은 강당에 모여 목사님께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죽음으로 협상하는 법

~앙리편~

 

 

생명은 신이 정한 자연의 섭리였으므로 태어나서 죽는 것은 거스를 수 없다. 앙리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죽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렸을 적에 호흡과 심박이 멈춘 채 반응하지 않던 이본 할머니가 까딱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고 살아계실지도 모른다고 외쳤다. 할머니는 그 두 가지만 빼면 살아있던 시절과 완전히 동일해보였지만 아무도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앙리는 혼자서 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답을 얻었던 것은 보육원이 속해있던 교회에서 목사님의 추천을 받아 의대에 진학한 뒤였다. 그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은 학과장만 알고 있었다. 생리학과 해부학 강의를 들으면서 호흡과 심박이 멈춘 뒤 사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장례식에서 유족이 고인과 대면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염습 과정을 배운 뒤에도 앙리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단지 몸이 움직이기만 한다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거겠네?”

첫 해부학 실습이 끝난 뒤 동기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해부학 실습은 의대 정식 교육과정으로 승인받은 지 오래였지만 아직 세간에선 장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진 않았다. 기증된 시신이나 사형수의 시신을 실습에 사용하는데 공급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직접 해부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최선을 다해 임했지만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앙리는 전자였고 단순한 근육 경련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려 애썼지만 보라는 듯 실패했다.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처음 마시는 술을 과감하게 들이켰고 자신을 변호하고픈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 바람에 푸념처럼 늘어놓은 고민에 답해준 것은 스물이 훨씬 넘어서 의대에 들어온 니콜라라는 학우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 외부에서 신경계에 전기 자극을 줘서 그 사람이 살아있었을 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기계적인 존재인 걸까? 인체를 구성하는 화학적, 물리적 요건만 충족되면 생명이 탄생하는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물론, 생명활동이 일어나려면 일단 몸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야 해. 그건 필요조건이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자연과학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힘과 다른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 그거에 관해 연구한 학자도 있는데 읽어볼래?”

니콜라가 추천해준 것은 폴-조제프 바르테즈와 스위스의 생리학자 할러의 논문이었다. 본문에서는 근육 활동과 신경 활동의 관계에 관해 기술했고 생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독특한 힘을 활력이라고 지칭했다. 활력은 자연과학적인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미지의 힘이었다. 논문을 다 읽고 난 뒤 앙리는 비록 이본 할머니의 몸이 움직였지만 활력은 이미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앙상하게 남아있는 근육으로 몸이 들썩일 수는 있었지만 시들해진 신경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본 할머니의 활력은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 후 앙리는 활력을 잡아두기 위해 인체를, 특히 신경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고안해내는데 전력을 다했다. 활력이 사라지는 것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었지만 몸이 무너진다면 그 근본적이고 신비한 힘도 사라진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몸을 추스르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실습 시간에 환자들과 만나본 뒤로는 사무치도록 실감할 수 있었다. 고장 나기 시작한 그들의 육체는 물이 새기 시작한 댐처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댐을 보수하는 것처럼 아예 새로운 재료를 무너진 곳에 공급해주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든 자연적으로든 머리만 손상된 인체, 예를 들어 단두대에서 형을 집행했지만 집행인의 부주의로 머리가 굴러 떨어진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체 내부에 있는 장기와 사지는 멀쩡하지만 활력의 근간이 되는 뇌는 지켜보던 사람들의 발에 밟혀 으스러졌기 때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결한 의지로 시신을 기증한 분들도 계시죠. 이런 특별한 경우로 인해 보존된 인체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에게 이식한다면 아직 인간 스스로 인체를 만들어낼 수 없는 지금, 그 사람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앙리는 인체 접합술을 개발해 사체를 재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졸업할 때 제출했다. 그의 논문은 학회에서 발표하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사체를 재활용한다는 것은 신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주장에서부터 새로운 신체에 수혈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인 부작용, 인위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불길한 신체를 붙이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우려까지 한 데 뒤섞여 회장을 소란스럽게 했다. 앙리는 논문을 발표하는 현장에서 개인의 윤리성과 도덕심 뿐 아니라 그의 재능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질문을 연속해서 받았다. 가장 신랄하게 그를 비판했던 인물 중 한 명은 그의 동기였던 니콜라였다.

그런데 잘도 그런 논문을 실어줬군 그래. 그렇게 비난해도 결국 사람들은 인정했다는 거 아니겠나?”

그건 인정해서 실어준 것보단 낙인 같은 거였습니다. 싣지 않을 수도 있었고 졸업을 철회할 수도 있었지만 인정해준 걸 보면, 편집장이나 일부 사람들은 속으로 인정해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속은 저도 잘 모르겠고 실제로 나타난 효과는 달랐죠. 이 자는 이런 논문을 발표한 전적이 있고 학술지에 게재했으니 앞으로 변명하거나 철회할 수 없다는 겁니다.”

1사단 무기연구소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앙리는 빅터의 물음에 무덤덤하게 답했다. 실제로 앙리는 그 뒤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거나 논문을 쓸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빅터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앙리는 설마 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것만으로 세상이 인정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빅터가 놀란 표정을 짓자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앙리가 웃는 것을 본 빅터는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보다 순진하구나 싶어서요. 앙리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웃어버리긴 했지만 그의 논문을 읽고 순수하게 감탄해 준 사람은 빅터가 처음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기적처럼 나타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감미로운 관계를 독점할 수 있는지 앙리는 처음 알았다.

먼 미래를 열자는 게 아니야. 지금 당장을 바꾸자는 거지. 죽음, 지옥, 운명, 저주. 이 미신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좀 더 훌륭한 인간의 세계관을 만드는 거야!”

전쟁터 한복판에서 끌어 모은 명분과 자본으로 사체를 활용한 무기를 개발하면서 그런 말로 앙리를 설득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전쟁을 생명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오만해 보이는 그의 발상을 거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감을 찾지 못하고 군의관으로 자원한 뒤 경험한 전장은 매일 밤 악몽을 꾸게 할 만큼 참혹한 죽음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에도 신의 의지가 개입한 것일까? 앙리는 매일 밤 질문했다. 인간은 서로를 더욱 치명적으로 죽이는 기술들을 개발하는데 그것은 신이 의도하지 않은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도치 않은 죽음을 막기 위해 살리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생태계를 유지하는 일이 된다.

과학은 살인 도구로 변질됐어. 무지한 인간들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지.”

앙리는 빅터의 연구를 돕는 것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살아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눈뜨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죽음을 다시 정의하는 연구였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갇힌 뇌에 아직 활력이 남아있다면 빅터가 고안한 기술로 나머지 신경계를 다시 활성화시켰을 때 비로소 살아있었다고 외칠 수 있을 테니. 그래도 난 살아있다고 외치지 못한다면 그 때 그 사람을 죽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앙리는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관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물음에 드디어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랜 억울함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 빅터의 손을 맞잡고 세게 흔들었다.

신체 접합술은 머리 부분이 손상된 사체만 사용했다. 앙리가 생각하기에 머리가 없는 사체만이 정말 죽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머리만 나머지 신체에 접합할 때도 있었다. 머리가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아직 그 속에 활력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사람을 살려내는데 중요한 부분은 머리였고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도 머리였다. 단단한 두개골 속에서 보호받고 있던 연한 뇌 조직은 근육까지 전달되어야 하는 강렬한 전기 자극을 견뎌내지 못하고 타버렸다. 겨우 뇌 조직 손실 없이 전류를 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웰링턴 장군도 빅터도 연구가 명분을 다했다며 아쉬워했지만 앙리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 무기로 쓰는 게 아니라 활력을 다시 이끌어내는 기술은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 미래에 닥쳐올 수 있는 비극에 대비해야했다. 하지만 비극은 앙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찾아왔다.

장의사는 이미 뇌가 손상됐지만 월터는 아직 희망이 있어.”

장의사가 살해된 직후 앙리는 빅터에게 그렇게 말했다. 빅터가 순간 분을 못 이겨 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바람에 장의사는 완전히 죽었다. 그에 비해 월터의 머리는 아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신체 접합술을 이용해 월터의 머리를 다른 몸에 이어 붙인 뒤 활력이 발산될 수 있는 길을 터준다면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되살아난 월터는 장의사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귀족 가문인데다가 빅터를 동경했으므로 재판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장의사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월터를 살려내는 것도 결국 실패했다. 긴장한 빅터가 지나치게 강한 전류를 흘려주는 바람에 뇌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는 긴장하면 일을 그르치는 경향이 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앙리는 이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터 에센과 장의사 프란츠 코프카는 제가 죽였습니다.”

거짓으로 자백을 한 뒤 앙리는 스스로 사형수가 되었다. 뒤늦게 면회를 온 빅터는 자백을 번복하라고 했지만 앙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단두대에 올라가면서 빅터가 애걸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네가 죽이지 않았다고. 제발 사실대로 이야기해!”

너와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죽는대도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린 앙리는, 죽은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빅터는 반드시 실험을 성공시켜 생명의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 자신의 머리와 몸을 전부 이용해서. 빅터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자신이 3사단에서 빅터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상황을 되돌려야만 하게 만드는 것. 이건 앙리가 죽음으로 협상하는 방법이었다.

난 너의 꿈에, 살고 싶어.”

앙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단지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며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빅터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고 죽음을 다시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그는 죽음을 최후의 활력이 사라져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태, 즉 머리가 완전히 손상된 상태로 정의하고 있었다. 만약 이 정의를 한 번 더 번복할 수 있다면. 뇌를 넘어서서 생명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이 완성될 수 있다면 모든 상황을 되돌릴 수 있다. 일평생 탐구해 온 오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게 다시 미뤄진 느낌이었지만 앙리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단두대가 그의 목을 가르는 순간, 앙리는 이본 할머니가 다시 일어나 그에게 미소 짓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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