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설정과 코믹스 내용 있습니다
*한글자막을 토대로 했습니다(존대/반말).
최초의 미지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는 지정 룸메이트를 허용하고 있지 않았으며 자체 개발한 무작위 배정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숙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룸메이트에 대한 아무런 인적사항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방식으로 암암리에 있을 수 있는 소외를 최소화시킬 것이라고 믿었지만 생활 방식 차이로 인한 불만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실제로 스타플릿 기숙사는 첫 2주 동안 룸메이트 변경 신청을 하는 비율이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았지만 아카데미는 이러한 방식을 계속 고수할 것이라고 고지했다.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보안 시스템도 정기적으로 관리했다.
일부 혈기왕성한 생도들은 여태까지 룸메이트 정보를 미리 입수하는데 성공한 전적이 없다는 소문에 자극받아 해킹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보를 입수하고 데이터를 조작하려는 기발한 시도가 연례행사처럼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보안망을 뚫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이번 학기에도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정보를 얻는데 감수해야 할 위험에 비해 효용성이 크지 않아 애초에 시도하는 생도가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오래 사귄 친구나 심지어 연인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룸메이트가 될 진 알 수 없다며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입학생들도 룸메이트가 누군지는 미리 알 수 없었고 처음으로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흥미진진한 화젯거리로 소비되었다. 미지를 탐구하게 될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들어오면서 조우하게 되는 최초의 미지는 바로 같은 방을 쓰게 될 룸메이트였다.
최초의 미지는 무슨. 이미 미지의 요소는 수송선을 탈 때부터 수없이 있었는데. 레너드는 이런 과장된 관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면 동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어디든 기저에 깔려있는 심리는 비슷해 보였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레너드의 경우에는 그 최초의 미지가 시시하게 풀렸다. 지정받은 호실 방문 앞에서 재회한 제임스는 레너드를 보자마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마치 레너드가 자기 룸메이트일 줄 알았다는 것처럼 시큰둥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제 속은 완전히 괜찮아졌나 보네요.”
“그러게.”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제임스는 여전히 존대를 했다. 분명히 수송선에 탔을 때 처음부터 반말을 했지만 꼬박꼬박 존대로 화답하는 상대도 간만이었다. 이런 상황도 이것대로 난감하긴 했다. 레너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할 말을 덧붙였다.
“말은 편하게 해도 돼. 내가 먼저 반말을 했다는 건 얼마든지 네가 나한테 편하게 대해도 된단 뜻이라고.”
물론, 존대가 편하다면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레너드가 말하자 제임스는 전혀, 라고 말하며 다시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을 해서 언제 우리 만난 적 있었나 했었다니까.”
말로 내뱉지 않은 속뜻이 있는 것 같았지만 레너드는 묘한 느낌은 속으로 삼켰다. 혹시 일부러 일일이 예의를 차려 대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났지만 과한 추측은 그만두기로 했다. 방금 전에 웃을 땐 얌전해보였던 눈매가 이제는 좀 더 눈빛에 장난기가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너드는 제임스가 아무런 짐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짐은? 아직 안 찾아왔나? 수송선 아까 떠나던데?”
“내 짐은 내 몸 뿐이야.”
설마. 레너드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반문하자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로 가져온 짐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스타플릿 기숙사에는 기본적인 생활용품은 다 구비되어 있어서 굳이 개인용품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문제는 없었지만 누구나 낯선 곳에 갈 때는 이유 없이 간직하고 싶은 낡은 물품 하나씩은 있지 않던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할지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안전선을 설정했고, 혹시 딱히 가져올 물품이 없을 만큼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너드도 그렇게 많은 물품을 싸들고 오진 않았다. 그는 앞서 보였던 반응을 무마하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뭐, 제일 무거운 건 챙겨왔네.”
“나 그렇게 안 무거운데.”
“여기 오면서 자기 체중보다 많이 나가는 걸 가져올 일이 뭐가 있겠어? 들어가자고. 언제까지 문 앞에 서 있을 순 없잖아.”
기숙사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쾌적했다. 하얗고 위생적으로 보이는 방이었다. 뾰족한 모서리가 없는 매끈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막 분사된 탈취제 냄새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레너드가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하학적인 구조를 한 가구들이 있었고 문 앞에 설치된 자동 센서등이 새로운 거주민을 환영하듯 깜박 켜졌다. 제임스는 들어오자마자 한 쪽 침대에 드러누웠기 때문에 레너드도 그 반대편 침대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이제 정말 스타플릿에 와버렸다. 돌아갈 기회는 항상 제공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다가 들었는데, 여기 지상직 근무도 가능하대.”
“응?”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아 딱딱해 보이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레너드가 고개를 들자 건너편 침대에 누워서 이쪽을 보고 있는 제임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말 편하게 침대에 파묻혀 있어서 레너드도 한 번 침대에 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들게 만들었다. 레너드는 곧 제임스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깨닫고 입으로 비죽 웃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 스타플릿이 우주에서 주로 활동하는 건 맞지만 지구에서도 할 일은 여전히 많겠지. 그래도 교과과정 동안 훈련도 하고 망할 비행선을 탈 확률은 일반인보다 확실히 올라가겠지만.”
“근데 왜 비행하는 게 왜 무서운 거야?”
제임스는 레너드라면 초면에 묻지 않았을 질문을 망설임 없이 했다. 레너드는 이미 못 볼 꼴은 충분히 보여 버렸으니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대답하는 게 차라리 나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다쳤었어. 얼마나 아팠는지 그 뒤로 높은 곳은 질색하게 됐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제일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졌단 사실이었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올라탔던 가지가 말이야.”
그는 나무에서 한 번 떨어지고 나서부터 두 가지 공포를 떨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와 어떤 안전장치도 믿을 수 없는 공포는 서로를 견고하게 해주었다. 어렸을 때 이야기를 지금 상태에 맞춰 청승맞게 각색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다음 말까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 나뭇가지를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게 멍청했다는 결론은 냈지만. 그게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높은 곳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안전해 보이는 것도 서서히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게.”
애초에 확실한 게 있었던가. 감상에 젖은 레너드는 자신이 나무에서 떨어진 날 세상에 대한 순진한 믿음도 어느 정도는 같이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비슷한 과정을 경험했을 테다. 커가면서 그가 배운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믿음을 가장해서 최악의 결과를 피해가는 요령이었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고 점차 현재 의료기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을 맡으면서 그 믿음도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애초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은 우주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커가면서 배운 요령을 쓰는 방법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레너드는 굳이 사명감이라는 거창한 감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고 고민했다. 과감하게 나아가야 할 사명감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명감인지 실패에 대한 반항심인지도 헷갈렸다. 세세한 것까지 과민하게 쏘아붙이는 배우자에게 질린 파멜라가 떠나가고 그는 고민을 속 깊게 털어놓을 친구도 여태 없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 남아있는 지지대는 의사로서의 레너드뿐이었고 거기에 집착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만큼은 여태까지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해져야 했다.
“그럼 여기 오게 된 계기는 뭔데?”
레너드는 거침없이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제임스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복잡하고 긴 이야기야.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나만 얘기하는 기분인 걸?”
레너드의 말에 제임스는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건 사실이니까 그만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자기 얘길 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너드는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점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제임스가 입고 있던 웃옷의 목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피냐?”
레너드가 묻자 제임스도 방금 전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러면서 제임스는 이미 지워지기에는 늦은 핏자국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 이거. 그냥, 별 거 아냐. 코피가 좀 자주 나서.”
“눈 밑이랑 코 주변에 보이는 건 타박상 같은데.”
그가 계속 캐묻자 제임스는 누운 채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는 시늉을 냈다.
“알았어. 알겠다고. 사실 어제 술집에서 좀 싸웠어. 주먹이 오갔지만 잘 해결됐지.”
“꽤 맞았나보군.”
아마 지금 표정을 살짝 바꾸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레너드가 덤덤한 표정으로 진단을 내리자 제임스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멋진 싸움이었어.”
제임스가 하는 말을 듣고 레너드는 미간을 구겼다. “멋진 싸움이라는 게 무슨 뜻인데?” 라고 그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팔짱을 낀 채 씨익 웃으며 말했다.
“멋진 싸움이었다는 건 즉, 난 지지 않은 싸움이었다는 뜻이지. 지는 건 멋지지도 않고 재미도 없잖아. 난 지는 게 죽어도 싫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 레너드는 한층 더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느니 죽는 게 낫다, 라. 마음속으로 룸메이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레너드는 그제야 아직 최초의 미지가 완벽하게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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