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커크의 삼촌)가 폭력적인 대사를 합니다.
*IDW 코믹스 #17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비기닝 시점
치사하고 필사적인 위로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
낮은 주파수로 흘러나오던 엔진 소음이 잦아들었고 몸이 약하게 뒤로 밀리는 느낌이 났다. 후보생과 붉은 옷을 입은 기존 생도들을 태운 수송선이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도착하면서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할 때 느껴지는 진동에 익숙한 생도들이 먼저 일어나더니 차례대로 줄을 섰다. 아직 사복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뒤를 쫓아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안전벨트 클립 부분이 문제없이 분리되었다면 제임스도 재빨리 우후라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는 아직 우후라의 이름이 뭔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녹이라도 슬었는지 클립은 물린 부분이 잘 빠지지 않았고 결국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무게로 분리해냈다. 그는 벨트가 풀리자마자 딱딱한 자리에서 튕겨나갔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스타플릿도 장비 손 좀 봐야겠는걸. 안전장치는 조금 과도한 정도가 좋지만 제 때 분리되지 않는 것도 문제니까."
힘을 주느라 벌게진 손바닥을 못마땅하게 들여다보던 제임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레너드가 아직 옆자리에 앉아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제임스는 안전벨트를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모습을 그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자 새삼스럽게 귀가 뜨거워졌다.
"아직도 안 내리고 뭐해요?"
"속이 안 좋아서 일어서면 토할 것 같아. 좀 있다 내리려고."
침이 가득 고여 있는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레너드는 그가 말한 만큼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잔뜩 흘러내린 식은땀이 그의 속눈썹에 맺히면서 성가시게 달랑거리자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세게 감았다. 그 바람에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마치 눈물을 흘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오와에서 수송선이 출발할 때도 그는 비행공포증이 있다며 승무원과 언성을 높이며 신경전을 벌였다. 비행공포증이 스타플릿에 지원하는데 결격 사유는 되지 않았지만 적절한 치료와 극복을 위한 상담을 받은 뒤에도 효과가 없다면 아마 중도에 그만두게 될 것이다. 레너드가 승무원과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제임스는 주변에 앉아있던 생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무언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표정으로 보건대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제임스는 레너드의 지원 동기는 알지 못했다. 수송선이 출발하면서 레너드가 명상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 말도 없었으므로 대화할 틈도 없었다. 하지만 우주에서 활동하는 함선에 승선하는데 가장 부적합한 공포증이 있음에도 온 것을 보면 분명 그도 절박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제임스의 생각이었다.
"신속하게 하선해 주십시오! 아니면 다시 돌아갑니다."
"곧 내려요!"
밖에서 승무원이 독촉하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레너드를 보았다. 그는 딱히 제임스와 동행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대로 두고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제임스는 승무원이 다시 보채기 전에 내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너드는 아직 미동도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일어서기 힘들면 부축이라도 해줄까요?"
"관둬. 그러다 정말 네 옷에 토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내려."
"그래도. 빨리 안 내리면 정말 돌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그냥 하는 말이야.”
레너드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미쳤던 걸지도 몰라. 내가 우주라니. 고작 지상에서 몇 피트 떨어지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데-"
"그래도."
중간에 레너드의 말허리를 잘랐다. 저지르고 보긴 했지만 제임스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 할 말은 금방 떠올랐다.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멋지기도 했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나가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우주에. 이렇게 바로 포기할 건가요?"
그 말에 레너드가 수송선이 출발한 뒤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침착했을 것 같은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 극심하게 시달렸던 불안감 때문인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흘린 땀 때문에 이마와 뺨에 눌어붙어 있었다. 제임스는 그를 보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긴 뭘요. 지금 이렇게 안 토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 제임스는 레너드가 짧게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음성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눈썹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느린 동작이긴 했지만 기어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임스가 벨트를 푸느라 고생했던 것과 다르게 그의 벨트는 부드럽게 풀렸다. 레너드는 잠시 서서 심호흡을 하더니 느리게 걸어나갔다. 제임스도 그의 뒤를 따라가며 혹시라도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할 경우 받쳐줄 준비를 했다.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고, 못마땅하지만 걱정되는 표정을 한 승무원이 그에게 안부를 묻자 레너드는 괜찮다며 지면에 발을 디뎠다. 그러더니 아직 수송선 입구에서 내리지 않은 제임스를 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가 꼴찌야."
"앗, 치사하게."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제임스는 황급히 수송선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레너드는 빠르게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빨라졌고 표정도 여유로워졌다. 제임스는 그가 보지 못하는 뒤에서 따라가면서 웃고 있었다. 지금 레너드를 보니, 혼자 남사스럽게 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겁에 질려 불안해하던 사람을 안정시키는 건 색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제임스가 스타플릿에 지원한 동기는 이 도전이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패한다면 재미없을 테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것이다. 재미로 스타플릿에 지원한 그는 아직 후보생이었지만 첫 임무를 배당받은 느낌이었다. 레너드가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졌다. 사실은 그가 포기할 거라고 단정 짓는 것 같았던 다른 생도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이건 그가 스타플릿에 지원하는 시험을 쳐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프랭크 삼촌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시험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성적을 보고 그가 했던 말 때문에 제임스는 차라리 스타플릿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이크 함장이 찾아와서 지원해보라는 말을 할 때까지도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 실패한다면 프랭크가 얼마나 좋아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떨어졌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꼴사납게 실패하고 돌아올 거야. 알았냐, 이 문제덩어리야. 너 같은 정신머리로 가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니가 그렇게 대단한 놈인 줄 아냐? 너보다 잘난 놈들이 널리고 널렸어! 알았으면 가서 내가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해.”
프랭크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에게 제임스는 미친 것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문제아였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제임스가 자신감이 과잉되어 있으며 오만불손하고 제멋대로라고 시시때때로 폭언을 퍼부었다. 제임스를 통제하고 기를 꺾기위해 그가 항상 꺼내는 말은 넌 실패할 거라는 말이었다. 어쩌다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면 그는 이때라는 듯 조롱과 멸시가 섞인 말을 몇 달 동안 해댔다. 제임스는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당연히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처럼 싫었다.
제임스는 레너드의 등을 바라보며 걸었다. 이상하게 그와는 한 배를 탄 것처럼 동질감이 들었다. 과연 그는 비행공포증을 이겨내고 스타플릿에 남을 수 있을까? 그게 단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진심이 되어버렸다. 그가 당연히 실패하는 게 보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위로를 건네어버렸다.
*레너드 호레이쇼 맥코이
수송선이 출발하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심혈관 질환은 병력이 없었고 지금 같은 조건에서 심근이 터질 리 없다는 사실은 레너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불안감이 치솟았다. 비이성적인 공포심이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속으로 몇 번이나 비논리적이라고 외쳤지만 마구 날뛰기 시작한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레너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차라리 차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웅웅거리는 낮은 엔진소리를 지면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로 세뇌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평화롭고 싱그러운 들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의 두 발은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 운전석 아래에서 페달을 밟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지금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니까 차라리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상정하는 게 나을지도. 그게 현재 상태와 일치해서 몰입하기 더 쉬웠다. 레너드는 다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광경을 바꾸려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금속끼리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고 가까스로 진정시켰던 레너드의 경고등을 다시 점등시켰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화들짝 몸을 떨면서 감고 있던 눈을 떠버렸다. 레너드는 그제야 수송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송선은 멈춰있었고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 휑한 공간에 단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 꼴사납게 놀라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제임스라는 사람이 손으로 무언가를 거칠게 흔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너드는 상대가 손에 쥐고 있는 물체가 풀리지 않는 안전벨트 버클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도 예전에 클립 부분이 빠지지 않아서 비슷한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었고 해결방법도 알고 있었다. 스타플릿에서 쓰이는 벨트에도 먹힐지 몰랐지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그는 나지막하게 제임스를 불렀다.
“이봐.”
레너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제임스는 결국 허공에 대고 몸을 이리저리 치고받기 시작했다. 애초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열중해서 주변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레너드가 다시 말을 걸려고 목을 가다듬었을 때 안전벨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풀렸다. 가슴팍을 잡아주던 끈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임스는 앞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훌륭한 동작으로 다시 중심을 잡았다.
"스타플릿도 장비 손 좀 봐야겠는걸. 안전장치는 조금 과한 정도가 좋지만 제 때 분리되지 않는 것도 문제니까.“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주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인지 방금 전과 똑같은 음성으로 말했는데도 제임스가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마치 옆에 사람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람처럼 그는 다그치듯 물었다.
“아직도 안 내리고 뭐해요?”
“속이 안 좋아서 일어서면 토할 것 같아. 좀 있다 내리려고.”
과도하게 긴장하고 나면 속이 뒤집어졌다. 수송선이 멈췄단 사실을 깨달은 뒤로 두근거리는 증상은 잦아들고 있었지만 아직도 식은땀이 흘렀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제임스가 말하자마자 밖에서 승무원이 큰 소리로 하선을 독촉했다. 빌어먹을, 조금만 기다려주면 덧나나. 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레너드는 너무 밀어붙이는 것 같은 승무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리지 않는 후보생을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권한이 밖에 서 있는 승무원에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일어서면 정말 토할지도 몰랐다. 그는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옆에 계속 서있던 제임스가 소리를 질렀다.
“곧 내려요!”
난 아직 내릴 생각이 없는데. 레너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제임스가 배려해준 것을 쓸데없는 참견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제임스는 대신 대답해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장 일어서기 힘들면 부축이라도 해줄까요?“
레너드는 제임스가 정이 많은 성격이라고 짐작했다. 아직 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단지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사람일 뿐인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 싫어하지 않는다. 그게 과도할지라도 최소한 냉혈한보단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친절에 섬세하게 화답할 만한 여유가 그에게 없었다.
"관둬. 그러다 정말 네 옷에 토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내려."
"그래도. 빨리 안 내리면 정말 돌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그냥 하는 말이야.”
레너드는 제임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혹시라도 그 승무원이 귀환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해버렸다. 만약 그 승무원이 당신은 힘들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았다. 적어도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기 일처럼 곤혹스러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레너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다음처럼 말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잠시 미쳤던 걸지도 몰라. 내가 우주라니. 고작 지상에서 몇 피트 떨어지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데-“
“그래도.”
중간에 제임스가 말을 잘랐다. 레너드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제임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하고 싶은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거의 초면인 사람이 하던 말을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기도 전에 자를 정도로 무엇이 그렇게 듣기 싫었던 것일까. 제임스는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나가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우주에. 이렇게 바로 포기할 건가요?”
제임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하나도 맞는 말이 없었다. 레너드는 재밌을 것 같아서 스타플릿에 지원한 것도 아니었고 우주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웬만하면 중력이 잡아주는 땅에 붙어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구의 지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의료적인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고 싶었던 레너드였다. 하지만 그는 곧잘 한계에 부딪혔다. 인류가 앓던 질병은 현대 의료기술로 대부분 완치될 수 있었지만,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은 항상 새로 발견됐다. 언젠가 치료법이 생기긴 했지만 일부 질환은 기약이 없었다. 그에 비해 우주는 새로운 치료제와 치료법이 발견되어 미래를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올 수 있는 기회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굳이 그가 우주에 나가서 새로운 치료법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스타플릿에는 레너드 말고도 재능과 신념이 있고 비행공포증은 없는 의사가 많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치료하던 환자가 끝내 세상을 떠났고 배우자도 그의 곁을 떠났다. 지구에서 그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만약 지구에 머무는 데 집착하지 않고 우주에 나가서, 지구에 있는 것들로 치료할 수 없었던 환자에 대한 특정 치료법을 찾는데 애썼다면 그 환자는 죽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게 지나치게 몰입하며 부부생활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자주 다투었던 배우자도 곁에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레너드는 가지 못했던 길을 탓하다가 충동적으로 스타플릿에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추락사고 때문에 생긴 비행공포증은 지원서를 낸다고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위로하는데 실패한 제임스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레너드는 화풀이로 그에게 짜증이라도 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느라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속도 모른다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쉬웠지만 이제 막 통성명을 한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긴 뭘요. 지금 이렇게 안 토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 역시 저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레너드는 그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왜 이 남자는 이렇게까지 그에게 용기를 보채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포기하는 게 나을 때도 있는데. 하지만 생각해보니 맞았다. 여태까지 그는 비행하는 물체에 탔을 때 매번 토했지만 이번에는 토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구토감을 참는데 성공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나아져서 안전벨트를 풀 힘이 생겼다. 지면에 내리고 나니까 기분은 훨씬 좋아졌다. 승무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안부를 위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고, 계속 옆에서 서성거리던 남자에게 농담을 할 기운도 생겼다. 레너드는 제임스에게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눈짓을 보냈다.
"네가 꼴찌야."
"앗, 치사하게.“
치사하긴. 그래, 치사하긴 하지. 끝까지 들러붙어서 완강하게 포기하지 못하게 하고 기어코 날 내리게 한 네가. 레너드는 문득 떠오른 반론에 속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제임스가 뒤에서 급하게 쫓아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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