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장소는 유쾌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중함 따위의 가면은 벗어던지고 오랜만에 맨 얼굴에 바람을 쏘인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가면을 쓴 채 다른 이들의 맨 얼굴을 관찰한다. 훗날 누가 더 유리한 위치에 선다고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자정의 신데렐라
“여긴 언제 와도 좋은 것 같아. 편한 느낌이랄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흔치 않은 보라색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편안하게 풀어진 자세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노랗고 어두운 조명이 그대로 물들어 있는 하얀 남자였다. 그는 상대가 비어가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여기 주인이 너 기억하는 것 같더라.”
“너도 기억하는 것 같던데.”
그야 뭐, 사실 우린 어디가도 잘 기억되니까. 하얀 남자는 속으로 대답하며 말없이 웃었다. 이제는 따로 번거롭게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음료를 대접받을 정도이니 단골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곳 주변에는 술집이 몇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단골은 이 두 남자 외에도 많이 있을 테지만 가게 주인은 용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억해내곤 했다. 특징적인 생김새와 심지어 이름까지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기억력이 좋거나 이런 장사에는 이골이 난 사람 같았다. 남자 한정이긴 했지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이 술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성향이 절대 정중한 사람들은 아니었음에도 주인은 여자의 몸으로 기가 눌리는 법이 없었다. 거친 남자들이 많은 환경에서 그런 여자로 기억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대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카모라에 연루되어 있는 사이퍼라고 하더라도.
“데샹, 바레타, 오늘도 어김없이 같이 오셨네.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어.”
주인 여자가 술병을 얹은 쟁반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젊었을 적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가녀린 몸매에 비해 팔뚝만은 남자들 못지않게 단단해 보였다.
“이런,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말아요. 이곳에서 하는 말은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까.”
데샹이라고 불린 하얀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주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옆에 있던 바레타라는 남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주인은 데샹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둘이 사귄다고 하면 울고 갈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지. 나를 포함해서.”
“바로 그거예요.”
주인과 데샹은 기분 좋게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데샹과 바레타 앞에 놓여있던 빈 술병을 가져온 쟁반 위로 올리고 그 자리에 새 술병을 내려놓았다. 막 저장고에서 꺼낸 듯 보이는 와인은 아직 물방울이 병에서 채 흘러내리지 못했다. 별달리 주문한 것도 아닌데 내오는 것으로 보아 서비스인 모양이었다.
“주문할 거 있으면 또 불러요.”
“기다리고 있어줘요. 내가 그 쪽으로 갈 테니까.”
“오, 데샹 이런 쓸데없이 정중한 남자 같으니.”
주인은 손님이 떠난 그들의 옆자리를 빠르게 치우더니 뒤로 돌아서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총총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레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샹과 한창 염문을 뿌리던 그녀는 이제 다른 남자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사귀는 것처럼 보이나?”
바레타는 그녀가 빠르게 내뱉었던 말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에 관해 물었다. 데샹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농담이지.”
“그, 그렇겠지?”
바레타는 가차 없이 대답하는 데샹의 말에 입가를 쓰다듬고는 양복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더워보였지만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다거나 끼고 있는 장갑을 벗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데샹은 술잔에 든 술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각도에 따라 바뀌는 와인의 색깔을 감상했다. 바레타는 다시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는 주인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려 다시 술잔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 비었지만 데샹이 따라줄 생각은 없어보여서 자작하기로 하고 남은 술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 잔을 들고 죽 들이켰다.
“왜, 아쉬워?”
풉. 바레타는 상대의 말에 마시던 술을 반쯤 뿜어냈다. 데샹이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니……. 호, 혹시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바레타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술을 셔츠 소매로 슥 훔치고는 서둘러 말을 정리했다. 아직 그렇게 취할 만큼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말을 더듬게 되었다.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얼굴도 뜨거웠다. 혹시 평소 주량을 착각해서 더 마셔버린 건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데샹은 그런 바레타의 가슴팍 앞으로 손을 뻗었다. 뭐 하려는 건가 싶어 바레타는 몸을 굳혔지만 데샹의 손은 그의 가슴을 지나서 옆에 있던 술병을 집었다. 데샹은 능숙하게 병을 따고 이제 완전히 비어버린 바레타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바레타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대의 친절에 어색하게 잔을 잡았다.
“아, 고마워.”
“너 상태가 이상해보여서 왠지 따라줘야 할 것 같다.”
데샹은 적당히 따른 다음 술병을 내려놓았다. 막 따라서 출렁거리는 수면이 점점 잔잔하게, 요동치는 것을 멈추는 것을 보며 바레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괜히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다시 술잔에 입을 갖다 대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도 상대의 숨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오늘은 어땠어?”
데샹이 가볍게 물어왔다. 바레타는 그의 물음에 잠시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는 게 결국 결론이 되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왕이면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었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별반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시답잖은 기억을 구석에서 끌어왔다.
“오늘따라 벌레들이 더 기운찬 것 같아. 이상하게 평소보다 기어 다녀서 몸이 근질근질한걸.”
“몸이 근질거린다라……. 그건 약의 부작용인데.”
“나, 나는 약 같은 건 안 해.”
바레타는 당황해서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세계에서 약, 혹은 마약이라는 것은 돈벌이 수단으로 추앙받고 있었지만 그 마약을 소비하는 대상들은 나약한 존재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약쟁이라는 말은 상대를 경멸하는 의도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데샹은 그런 그를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알아.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염려하지 마.”
“어…아니면 다른 약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최근에 무슨 약을 먹은 기억은 없는데.”
데샹은 가게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계 침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정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벗겨지고 요정의 마법이 풀릴 시간, 어서 도망치지 않는다면 왕자에게 아름답지 못한 정체를 들킬 시간. 하지만 데샹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정체에 관한 것은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절대 벗겨지지 않을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왕자의 맨 얼굴을 즐기며 그의 허리춤을 장식하고 있던 보석을 가지고 사뿐하게 떠날 것이다. 유리 구두 같은 쓸데없는 것은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그가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농담은 농담으로 알아들어, 리키. 다가왔던 여자도 다 떨궈버리겠다.”
“아, 그런가. 떨어져나가도…별로, 뭐 상관은 없지만…….”
데샹은 바레타의 솔직한 답변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쪽 팔을 가슴에 얹고 다른 팔로 정중하게 길을 텄다.
“자, 그럼 이만 가실까요. 바레타씨, 출구까지 안내해드리죠.”
“뭐야 그 이상한 말투는.”
바레타는 장난스럽게 응대하는 데샹을 보고는 어느덧 긴장이 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벗어두었던 웃옷을 다시 입고 마신 술값을 테이블 위에 놔두고 나서 앞서 가는 데샹을 뒤따랐다.
“어머, 벌써 가는 거야 정중한 신사씨? 하여간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자정만 되면 칼 같다니까.”
뒤에서 주인 여자가 형식적으로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데샹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기다리고 있어줘요. 곧 다시 그 쪽으로 갈 테니까.”
“나한테 유리 구두나 하나 좀 남겨두고 가요. 이왕이면 비싼 걸로.”
새침하게 쏘아붙이는 주인 여자와, 둘의 대화를 주워듣고 웃어젖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바레타와 데샹은 시끌벅적한 술집을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두 남자는 아무도 없는 술집 앞에서 잠시 서로 담배를 나눠 피고는 이내 가로등 없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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