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진삼에 정욱은 참전하지 않았지만...흐흐후

정욱의 계책, 서서의 계책

 

 

"이건 몇 해 만인지 모르겠군."
정욱은 여유로운 폼새로 서복을 맞았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달려온 그는 수척해보였다. 하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인상깊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예전에 만났을 때와 상당히 달랐지만 그 두 눈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무사하신 거겠지요?"
정욱은 묻는 사람의 호흡 편하지 않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복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간절할수록 사람은 조급해지기 마련이었다. 다급해보이는 질문에 대해 정욱은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여유로웠다. 당황하는 일이 많지 않아 주변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정욱은 그 이유에 관해서 고찰해본 적은 없었다. 딱히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적은 없었기 때문일까. 그는 단지 눈 앞에 놓인 상황과 마주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서복은 항상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었다.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꿈 또는 이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따금씩 길잡이로서 미숙했다.
"그 편지는 내가 쓴 것이네."
정욱은 뚜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서복과 정욱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기의 흐름이 오히려 더 와닿을 정도로. 그리고 날카로운 바람이 그 흐름을 갈랐다. 정욱은 뒤늦게야 서복의 칼이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전히 특이하게 생긴 그의 칼은 정욱이 앉아있던 의자 등받이에 꽂혔다. 힘이 들어가서 미세하게 떨리는 검날은 단단한 목재를 간단히 꿰뚫었다.
"설마, 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당신이란 사람은..!"
"자네가 그 말을 할 줄 알았네."
정욱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황이 그에게는 유쾌하기 그지 없었다. 옆에 꽂힌 칼은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빗나간 그 칼은 정욱을 해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내가 편지를 썼지만 그 편지가 가짜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네, 원직."
정욱은 손짓으로 넌지시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했지만 서복은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등받이에 꽂혀있던 칼을 뽑아들어 상대의 목에 들이댔다.
"돌려 말하지 말고 대답하시죠. 어머니는, 무사합니까?"
정욱은 싸늘한 감각이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 사내의 검은 이렇게나 차가웠던가. 옛날에는 사방에서 부딪히는 날붙이들 때문에 식을 새가 없었던 그의 칼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열기가 식고 차가워져서 서늘하게 노려보는 서복은 확실히 예전만큼 사나워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중압감이 있었다. 바람같던 남자가 드디어 무게감을 익힌 것인가. 정욱은 속으로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야. 자네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 여인의 안위를 보장할 수도 있고."
정욱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목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복을 바라보았다.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네."



글쎄-정욱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세부적인 사항은 적을수록 좋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서복의 어머니를 데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욱은 편지가 거짓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긴 했지만 그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여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행방도 모르는 여인을 담보로 서복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서복 역시 그 여인의 행방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복과 그의 생모는 복이 아직 젊었던 시절, 전란 통에 서로 헤어졌다고 들었다. 서복은 아직까지도 어머니의 행방을 모른 채 떠도는 소문만 붙잡으며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 때도 있었지만 서복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혼란에 휩싸여 망아지처럼 날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사냥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쳤을 때 상황이 어땠는지, 그 상황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있었는지 서복은 따져보려고 했지만 결론은 알 수 없었다.


결국, 서복은 계속 어머니의 환상을 좇아왔다. 어머니를 찾아 영천을 떠났고, 형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수경 선생을 만났고, 동문들을 만났으며 유비를 만났다. 어머니를 좇아온 것이 서복에게는 삶에 이정표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정표는 결국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남아있는 것은 오직 가능성뿐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꿈이나 이상보다 훨씬 미숙한 길잡이였다. 결국에는 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소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고 정욱은 그런 방법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되네. 그럼 자네는 어머니만 데리고 가버릴 것이 아닌가.”
“그럼 전 이 부름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과연 자네가 그럴 수 있을까?”


정욱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어머니의 존재가 여기 없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는 한 그는 정욱이 제시한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다. 말로만 있다하고 보여주지 않는다면 정말 어머니가 있는 것인지 당연히 의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정욱이 노린 것은 이것이었다. 확신할 수 없음. 그것에서 오는 불안감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가능성이 안 좋은 점은 그것이었다. 오직 가능성이 존재할 뿐이라 확실한 것은 없었다. 이 가능성은 여기서는 희망이라는 바람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에 의지하는 것, 스스로 옭아매는 방식으로 이보다 더 손쉬운 함정이 있을까. 서복은 완전히 그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서복은 낮게 웃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웃음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해버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정욱은 그 웃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의도하는 바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복은 차분해졌다.
아니, 원래부터 차분했었다. 비록 칼을 뽑아들긴 했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것은 변함없었다. 차가웠던 검날에서 느껴졌던 미묘한 침착함이 있었다. 정욱은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서일까?
“당신이 목적했던 것은 유비님으로부터 절 떼어놓는 것이었겠죠, 중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비님으로부터 책사라는 존재를 앗아가는 것이 원하는 바였을 겁니다. 지금 유비님이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은 바로 그것이니까. 그것만 채워진다면,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 당신과, 그리고 당신의 주군 앞을 가로막을지 모르니까. 절 떼어놓는 방법으로 어머니를 이용한 건 정말 훌륭합니다. 결국 어머니가 있든 없든 저는 편지를 받는 순간 이미 위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책사라는 존재를 유비님으로부터 앗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정욱은 서복에게 물었다. 서복은 여전히 서글픈 표정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이정표로 삼아왔기 때문에 결국 어머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존재과 실제로 있는 것이든 환상이든, 그는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떠나도, 자리를 매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정욱의 목적은 좌절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매워줄 사람이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이라면 더욱 더.


“유비님께는 새로운 군사가 생길 겁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그리고 더 걸맞은 사람이. 당신의 계획은 결국 실패한 겁니다.”


서복은 그렇게 말하더니 정욱이 권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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