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 흡혈귀 AU
"이봐 에릭, 흡혈귀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
"흡혈귀?"
에릭은 식사를 하다가 던진 까미유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맥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에릭이 알고 있는 까미유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 했지만 그와는 대부분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사적인 이야기는, 에릭은 그런 화제도 상관없었고 오히려 오랜 동료로서 이 쯤이면 언급할 때도 됐다 싶었지만 까미유는 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구에 관한 것이 아닌 것 같은 화제를 까미유 쪽에서 먼저 얘기하는 게 신기했다. 아니면 그런 쪽으로 어떤 발상을 하려는건가 싶기도 했다. 에릭은 호기심이 동해서 좀 더 질문의 의도를 파헤쳐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까미유는 머리가 좋았고 그만큼 눈치도 빨랐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모처럼 꺼낸 재밌는 이야기가 무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에릭은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설책에 나오는 흡혈귀같은 거라면 별로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 새로운 능력이라면 모를까."
"그렇군."
까미유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동료가 다른 떡밥을 던져주지 않자 에릭은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왜,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이라도 떠오른거야?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에릭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그런 그에게 까미유는 평상시처럼 가볍게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정해진 레퍼토리로 대화를 끝냈다. 에릭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물어보았다는 깨닫고 후회했다.
'또 입을 닫아버리는군. 아마 당분간은 얘기하지 않겠지. 아아 에릭 이 바보같은 놈.'
에릭은 빵을 입에 문 채 신음했다. 까미유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웃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급하게 먹다 체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 오후 실험이랑 진료도 있는데."
"그래서 물어본거야."
에릭은 까미유의 매정한 말에 그저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그의 동료에 관해 파헤쳐보는 건 실패한 것 같았다. 까미유는 그런 에릭을 무시하고 조용히 식사를 하며 어제 일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늦게까지 수고해줘요."
"앗, 네! 선생님께서도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까미유는 유달리 붉게 달아오르는 간호사의 귓불을 눈치챘지만 별달리 언급하진 않았다. 그는 진료와 실험을 병행하며 지친 몸을 어서 뉘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이 와중에 차를 가지러 갔더니 이상하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딘가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벌레로는 차는 고칠 수 없는 게 한이로군.'
에릭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할까 고민해보았다. 얼마전에 그거 새로 산 차에 관해 자랑하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까미유는 그냥 오늘은 걸어서 집에 가기로 했다. 에릭은 유달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게 순수한 의도라면 괜찮겠지만 그것보다는 좀 다른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괜히 그에게 빚을 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몸은 피곤할테지만 오랜만에 밤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까미유는 생각했다. 물론,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럼에도 퇴근하던 와중에 평소 다니던 길을 냅두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선 것은 누군가가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행이 붙었다면 인파들 사이로 섞이는 게 좋았지만 늦은 시각이라 대로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복잡한 골목길에서 따돌리려고 생각을 한 것인데 까미유는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큿-"
까미유는 시야가 차단되는 것을 인지했다. 무언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행동을 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갑자기 확 허리를 끌어안고 제 품으로 당기는 바람에 까미유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상대에게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밤 중에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고 떠도는 변태인건가.'
까미유는 능력을 써서 상대를 제압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능력은 벌레로 사람을 치유하는 것.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벌레들은 치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의사라는 위치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런 사실은 되도록이면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 이것 저것 고민하다가 막 반딧불로 상대를 떨어뜨리려던 찰나 까미유는 목 언저리에서 간지러움을 느꼈다.
'지금...목을 핥는거야?'
까미유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냥 술에 취해 껴안기라도 한 거라면 반죽음 정도로 좋게 넘어갈까 했더니. 게다가 혀가 유난히 까끌까끌해서 느낌이 더 좋지 않았다. 다른 이와 닿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미유였고 이런 식의 스킨십이라면 누구라도 싫어할 것이었다.
“아.”
까미유는 순간 놀라서 소리를 냈다. 마치 맛이라도 보는 것처럼 목덜미를 핥던 정체불명의 괴한이 갑자기 목을 세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시큰한 통증이 번지면서 무언가 쭉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피부를 물어서 빨아낼 것이라고는 피가 전부일 것인데, 대체 상대가 어떤 종류의 변태인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변태가 아니라 좀 더 위험한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까미유는 더 이상 행동하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다.
곧 그의 손과 몸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덩어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빛은 눈앞의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공격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피를 빨던 상대가 황급히 나가 떨어졌다. 까미유는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물린 곳에서 익숙하게 미끈거리는 액체가 만져졌다. 생각보다 출혈이 많은지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그는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뭐하는 미친놈이지?”
까미유는 소리쳐도 여전히 상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반딧불의 불빛을 더욱 밝혔다. 덕분에 초록색으로 아른거리는 음영 속에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의외로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다소 괴상해 보이는 형태의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변태 같은 짓을 하는군.”
겉모습과 그 사람의 내면은 사실 그다지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에 까미유는 평소에는 좋아하지 않는 상투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다음 순간 청년이 보인 행동이었다.
“뭐, 뭐야. 너, 남자였어?”
“뭐?”
까미유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대체 당연한 사실을 왜 묻는 건지 모르겠고 질문의 의도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실 예전에도 종종 여자로 오인 받은 적은 몇 번 있었다. 성별의 구분이 성인보다 애매할 수 있는 소년기 때는 더 자주 그랬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지긴 했지만 익숙해졌다고 해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여자 같은 혹은 그런 분위기의 외모라는 것은 까미유에게 그렇게 콤플렉스는 아니었다. 잘 이용하면 나름대로 이득도 있었고. 하지만 거슬리는 것은 그런 것에서 비롯되는 편견과 놀림들이었다. 그래서 까미유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 남자다. 보면 몰라?"
"말도 안돼. 난 완전히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까미유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청년을 진심으로 때려눕히고 싶어졌다. 물론, 쓸데없이 소란스러운 일은 하지 않을테지만 벌레들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놈을 계속 상대하고 있는거지.'
어딘지 이해력이 모자라 보여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눈 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을 불시에 기습해서 피를 빤 놈이었다. 긴장하고 있던 상태에서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어쩌면 직접 붙으면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밀릴지도 몰랐다. 상대가 능력자인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아까부터 느꼈던, 누군가 계속 미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저 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정신이든 어떤 착란 상태든 간에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이런 곳에서는 어서 벗어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까미유는 혼란에 빠진 청년을 뒤로하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상대는 쫓아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시큰하게 아려오는 그의 목덜미에는 마치 소설 속 흡혈귀에라도 물린 것처럼 선명한 송곳니 자국이 남아있었다.
2. 호기심
오늘 까미유가 지각을 했다. 에릭은 그 사실에 주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출근 시각에 딱 맞춰서 도착했지만 진료실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오늘 예약되어 있는 환자들의 차트를 훑어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자면 지각이었다.
‘대학 다녔던 때까지 합해서 처음인 것 같은데.’
에릭은 까미유가 늦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기억나는 한에서는 그랬다. 에릭은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마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까미유는 머리도 좋았지만 남보다 배는 노력했다. 그래서 항상 교실에 도착하면 그가 제일 먼저 와 있었다. 적어도 에릭이 보는 한에서는. 에릭은 자꾸 까미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적어도 자신이 관찰한 한에서는, 이라는 단서가 붙는 것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가 보여주기로 한 것만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왜 이러는 거냐, 나.’
에릭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수재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사립학교에 들어가서도 수석은 항상 그의 것이었다. 일등이 받는 찬사와 명예는 모두 그의 차지였다. 대학에서 까미유와 만나기 전 까지는. 의대에 들어와서 처음 에릭은 자신보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등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을 추월해서 달려가는 누군가의 등을 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까미유를 두 번 다시 잊을 수가 없었다.
“별일이네. 너가 지각을 다하고.”
에릭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급히 진료실에서 나오는 까미유에게 말했다. 까미유는 말없이 웃기만 하고 지나갔다. 에릭은 또 다시 마주한 까미유의 등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섞이는 것을 느꼈다.
“차트는 다 봤어?”
빠르게 걷는 친구의 보폭과 맞춰 걸어가면서 에릭이 물었다. 까미유는 자신을 따라오는 에릭을 돌아보았다. 딱히 그가 자신을 쫓아올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아니, 이유를 대자면 아마 궁금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릭은 항상 그랬지만 호기심이 많았다. 까미유의 입장에서는 별로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건 이미 다 봤지. 근데 에릭.”
“어?”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야? 화장실까지 같이 갈 거야?”
“아.”
까미유가 화장실 앞에서 멈춰 서자 에릭은 겸연쩍게 웃었다. 궁금한 것이 있긴 했지만 화장실까지 따라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었던 에릭은 잠시 물러서기로 했다. 뒤돌아서 멀어지는 에릭을 보며 까미유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했다. 오늘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몸은 무거웠고 정신은 나른했다. 어제 출혈이 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기분은 마치 마취에서 막 깨어난 상태와도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모기들은 물 때 희생양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마취 성분이 있는 침을 같이 흘려 넣는다고 했던가.
‘그 놈은 모기 치고는 컸지.’
까미유는 코웃음을 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동여맨 넥타이를 조금 풀고 옷깃을 내려 목 부분을 비추어 보았다. 군데군데 빨갛게 부어올라서 만지면 간지럽고 쓰라렸다. 마치 모기에 물린 것 같았다. 모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유난히 선명하게 남은 두 개의 송곳니 자국 정도. 잇자국이 난 주변부가 조금 파랗게 변한 것으로 보아 아마 완전히 자국이 없어지기 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한번만 물라고 했더니. 까미유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다시 옷깃으로 목을 싸맸다. 당분간은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넥타이를 동여맸다.
한밤중에 불쾌한 습격을 받은 지 보름 가까이 지난 어젯밤에 다시 청년을 만났다. 이번에는 집 앞에서 마주쳤다. 어쩐지 상태는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 안 좋아 보였다. 마치 반 정도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보여서 조금은 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명 자신을 한번 습격했던 상대인데. 그런 모습 때문에 위기의식이 흐려졌던 것인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물음을 던졌다.
"꼴은 왜 그 모양이야?"
누군가의 안부를 물어본 게 얼마 만이었을까. 까미유는 스스로도 어색한 느낌에 휩싸여 복잡한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비척비척 다가온 청년은 까미유 앞에 섰다.
"책임져라……."
"뭐?"
"날 책임지라고!"
까미유는 이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자기더러 책임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설사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날 습격해서 흡혈이라는 야만적인 행위를 한 피의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저렇게 당위적으로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인지.
"대체 뭘, 책임지라는 거야?"
까미유는 다시 물었다. 마치 하룻밤 놀고 바람맞힌 여자를 집 앞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금 눈앞의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지만. 청년의 자초지종을 듣자하니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그저께 까미유를 여자로 착각하고 습격한 뒤 청년은 한동안 충격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굳이 여자의 피만 빨라는 법은 없었지만 흡혈을 할 때 상대의 머리를 받치고 목을 깨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는 자신에게도 상당히 욕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남자보다는 항상 여자를 택해서 목을 물었다. 여리고 부드러운 살결을 파고드는 송곳니가 따뜻한 혈액과 닿을 때면 머릿속이 희열에 가득 찼다. 그런데 문 상대가 알고 보니 남자였다니. 청년은 올라오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 남자를 문 뒤로 다른 여자를 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니, 물 수는 있었고 피도 빨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맛보았던 까미유의 피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과일주만큼이나 달콤함이 짙게 배어있는 피는 그가 처음이었다. 여기서 청년이 말하는 달콤함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달콤함과는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아무리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봐도, 심지어 다른 남자의 피를 빨아보아도 그런 맛은 나지 않았다. 오직 까미유의 피에서만 그런 맛이 났다. 순식간에 다른 피에 대한 식욕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큽.”
청년은 단호하게 말을 끊는 까미유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었다. 단번에 제압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상대에게 왜 이렇게 약하게 나가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청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 지금 덮쳐버리자. 그래서 그 피를 먹는 것이다. 열흘을 넘게 그리워했던 그의 피를.
하지만 이번에는 전세가 역전되어서 달려들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새 모여든 초록색 반딧불이들이 까미유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호위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해도 돌연 사납게 달려드는 벌레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 벌레들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어서 몇 번 정면으로 날아드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몸으로 받아내자 곳곳에서 피부가 터지고 안 그래도 흡혈을 못해서 모자란 피가 흘러내리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여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남자는 강했다. 저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단호하고 강한,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까미유의 주변을 밝히는 반딧불이들을 보며 청년은 뜬금없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심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흰 머리의 남자조차,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죽으려나보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청년은 실소하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운 채 까만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꽁무니에서 밝게 빛을 뿜어내는 벌레들이 아직도 윙윙 거리며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 남자 능력자였군. 청년은 인지하고 있던 사실을 다시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처음 기습했었을 때 이미 깨달았던 사실이었지만 지금 공격을 받고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그렇다면 저 쪽도 그렇게 고운 환경에서 자라진 못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올곧은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봐.”
온 몸에 힘이 빠져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그대로 누워있는 청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까미유였다.
“이름이 뭐야?”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것일까? 못 가르쳐줄 것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히카르도, 바레타.”
스스로 입에 담은 이름이 낯설었다. 히카르도는 어느덧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까미유를 볼 수 있었다. 역광이 비치는 소름끼치도록 무심한 표정. 저번에 보니까 웃는 표정이 참 잘 어울리던데, 그 웃음을 거두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히카르도는 왠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바레타, 내가 만약 너한테 피를 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을까?”
글쎄, 히카르도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은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영원히 허락된 시간을 낭비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그런 존재였다. 인간들의 사회는 자신의 존재를 거부했고 여태까지 다른 흡혈귀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자신을 받아줄 존재는 없을지도. 떠올리면 몸서리쳐질 정도로 허무해서 항상 잊고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히카르도가 까미유에게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너의 피를 다시 맛볼 수만 있다면.”
그 때서야 히카르도는 다시 미소 짓는 까미유를 볼 수 있었다. 다가와서 손을 내미는 것을 엉겁결에 붙잡았다. 무슨 속셈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몸에 남아있는 피가 거의 없어서 본능적으로 상대를 붙잡았다. 까미유의 몸이 순식간에 품으로 들어왔다. 저항감 없이 안겨오는 것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히카르도는 정신없이 까미유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피를 빨았다.
그 뒤로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일단 집에 들였다. 피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그에게는 연구에 협력해달라고 요구했다. 까미유는 다시 만난 그 날 밤 사실 히카르도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으로 자신의 치유능력을 그대로 살상능력으로 전환했다. 사실, 치유능력이라는 것은 곧 살상능력과 같다는 것을 까미유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그 방법을 그대로 역이용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까미유가 가진 능력의 역설이었다. 까미유 이외의 사람들은 아마 아무도 모르고 있을 사실이었고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죽일 생각으로 한 공격을 상대는 몇 번이나 맞아도 죽지 않았다. 빈사상태도 유지할 수 없을 텐데 상대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마치 불멸의 존재처럼, 상대는 몇 번이고 다시 되살아났다.
그것을 본 까미유는 문득 에릭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히카르도를 처음 만났던 다음 날 물었던 어떤 물음이 있었다.
‘흡혈귀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
에릭은 그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소설 속의 흡혈귀 같은 존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가 만약 정말 흡혈귀처럼 죽지 않는 몸을 가졌다면, 그것은 정말 연구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까미유가 생각했던 계획을 이루는 데도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었다.
'재밌는 연구대상이 될 것 같아.'
까미유는 거울에서 어딘지 묘한 희열감에 들 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것은 오랜만에 호기심이라는 감정에 들뜬 자신의 모습이었다.
3. 미행자
에릭은 최근 한 달 동안에 까미유가 부쩍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출퇴근도 정시에 맞춰서 했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연구실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경우도 줄었다. 업무처리속도는 줄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일거리는 집에 가져가는 것 같았지만.
‘이건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의 증상인데.’
에릭은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까미유에 대한 진단서를 머릿속으로 작성해보았다. 하지만 까미유가 연애라는 것을 할까 싶었다. 학교에 다닐 때 몇 번 여자와 어울리는 것은 본 적이 있었다. 그 중 몇 명과는 어느 정도 진도도 나간 것 같았고. 하지만 그가 그렇게 연애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를 오래 지속하는 일은 없었다. 길어봐야 한두 달이었고 그 뒤에는 미련 없이 관계를 끝냈다. 연애 때문에 자신의 스케줄을 번복하는 일도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낸 적이 많은데도 아무도 그에 관해 헐뜯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잠시 사귀었던 여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떠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그와 함께였다는 추억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여자들을 만나면서 에릭은 마치 신에게 매혹당한 광신도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그럴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을 바치는 사람들이 까미유의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과연 이번에 새로 만난 그 신기한, 까미유의 말마따나 흡혈귀같이 보이는 그 청년의 경우에도 그런 관계로 발전하게 될까? 에릭의 입장에서는 궁금증을 자극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가볼게.”
“어, 그래. 푹 쉬고 내일 보자고.”
에릭은 까미유가 퇴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주차해놓은 차로 다가가 문을 여는 것까지 본 에릭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까미유가 출발하고 나서 조금 여유를 두고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차를 사용해서 뒤를 쫓아보기로 했다. 평상시와 같은 에릭의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과 달리 그를 지켜보는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을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너를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더군.”
“그건 너잖아.”
막 히카르도의 팔뚝에서 혈액 샘플을 채취한 까미유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종 병원에서 아무도 주변에 없을 때면 까미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처음에는 놀라서 다시 그런 짓을 하면 피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더니 요즘은 그냥 쫓아다니기만 했다.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는 불만에 가득한 표정이었다.
“집 안은 답답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 눈에만 안 띄면 되는 거잖아. 그건 자신 있다.”
웬만하면 피를 준다는 말에 다 고분고분 따랐지만 이것만은 양보를 하지 않기에 이번에는 까미유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덧 그런 미행 아닌 미행에 익숙해져버려서 요즘은 출근하면서 뒤따라오는 익숙한 존재감을, 조금은 즐기게 되었다.
까미유는 피가 굳지 않도록 적절한 처리를 한 후 샘플을 보관함에 넣었다. 나머지 실험은 내일 병원에 가서 할 것이니 지금은 샘플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이 중요했다. 알 수 없는 단어를 휘갈기고 있는 까미유를 지켜보며 히카르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나 말고 다른 녀석. 항상 너한테 질문하면서 따라오는 녀석.”
“……에릭?”
까미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미행까지 하고 있었을지는 몰랐다. 호기심이 유달리 강한 녀석이긴 했지만 이성적인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글쎄, 적어도 꽤 오래 전부터 매일매일. 내가 널 처음 만났던 날에도 널 따라가다가 갑자기 다른 길로 사라지니까 당황하는 눈치더군.”
설마, 그 때 미행하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은 히카르도 때문이 아니라 에릭 때문이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까미유는 여태까지 히카르도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없었다. 그가 기척을 숨기는 방법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니 미행을 눈치 챘다면 아마 그것은 그가 아닌 다른 존재였을 것이라는 것을, 어째서 미리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 나에 관해서도 알거고. 내가 너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날에도 봤었으니까.”
“……성가시군.”
까미유는 생각보다 빈틈이 많았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에릭에 관해서 미리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열정적인 호기심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그 날 밤 히카르도를 공격한 것까지 목격했다면 이미 자신의 능력이 살상용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에릭처럼 똑똑한 녀석이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고 아마 여태까지 떠돌아다니던 자신에 대한 소문들까지 종합해서 대충 현재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까미유 자신이 이 능력에 관해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에 관해서도 곧 궁금해 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더 파고들어간다면 현재 진행 중인 계획이 들킬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거기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만한 상상력이 그에게 있을까?
까미유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마 에릭의 미행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 때부터 유난히 까미유에게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왜인지 몰랐지만 에릭이 예전부터 항상 일등을 차지하는 것에 익숙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까미유는 그의 그런 호기심이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라고 단정 지었다. 호기심의 형태로 발산되는 지극히 순진한 라이벌 의식. 에릭은 학구열에 비해 권력욕이 강한 편은 아니었고 세상 물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까미유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깨끗한 흙으로만 살짝 더럽혀진 그런 상대였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알아낸 사실을 약점 잡아 어떤 식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까미유는, 마치 천사처럼 순진하고 무구했던 인간이 어떤 식으로 타락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생각하는 동안,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설사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앞날에 방해가 된다면 일찍이 제거하는 것이 좋으리라.
‘아아 에릭. 그래서 지나친 호기심은 자제하라고 말했는걸.’
까미유는 피식 웃었다. 웬만하면 그는 항상 밝은 쪽에 있고 싶었다. 그것이 원했던 것이기도 했고. 세상을 밝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빛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단연 어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히카르도, 부탁이 있어.”
“뭐지?”
“에릭을 죽여줘.”
히카르도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까미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와 만난 지는 이제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아마 그 정도 된 것 같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만큼, 시간 감각이 둔해져서 그다지 자신은 없었지만 까미유와 지내게 되면서부터는 가끔이나마 시간을 느끼게 되었다.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흐름이 아니라 시계에서 돌아가고 있는 바늘을 오랜만에 지각했을 때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평소에 자신보다 배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까미유의 스케줄에 맞춰서 그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감각이 돌아온 것일까. 어찌됐든 히카르도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자신 역시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게 외면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 연대감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그저 한 명의 인간을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는데, 이따금씩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느꼈던 고독함이 사라졌다.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자신을 받아들여준 사람은 까미유가 처음이었다. 히카르도 스스로 인간에게 접근한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 그것은 애초에 받아들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혐오감을 분출했다. 까미유의 경우에는, 비록 실험이라는 어떤 필요성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위해 인간의 피를 빨고 죽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는다. 까미유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많은 것을 보았다. 그는 추악한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 히카르도가 봐왔던 많은 사람들은 불가능 했던 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여자처럼 가녀려 보이는 저 남자를 독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대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저 추악한 존재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일까? 까미유와 같이 있으면서 점차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해져갔다.
“좋아 그는 죽여주지. 대신.”
히카르도는 조용히 까미유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빛이 자신을 마주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여겨봤던 그 눈빛이었다.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턱에서 손을 떼고 그의 목에 고개를 파묻었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혈액이 흐르는 피부의 온기가 와 닿았다.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오늘은 너에 관해 좀 더 가르쳐 줘.”
4. 배신
에릭은 늦은 밤을 실험실에서 맞이했다. 미리 짜놓은 실험 일정이 뒤로 밀리는 것은 샘플의 상태에 따라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아마 새벽에야 퇴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낮에는 교수 밑에서 환자의 진료를 보며 의사로서 경험을 쌓고 밤에는 실험실에서 낮에 미처 못 끝낸 연구를 한다. 힘든 일정이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가끔 정말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르면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선에서 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가끔은 그게 집착이나 쓸데없는 자부심으로 비춰질 때도 있었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조용하군.’
이 시간대의 실험실은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항상 고요했다. 가끔 남는 사람이 있으면 반가운 일이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혼자 밤을 버텨야할 것 같았다. 적막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졸음이 몰려올 땐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으면 문장이 더 잘 읽히는 느낌이었다. 고요함 속에서 오감이 예민해져서 모든 것이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책을 읽는 와중에 에릭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어떤 인영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둠 속에 있어서 잘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곧 불빛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에릭은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알고 있었다. 까미유가 데리고 다니던 실험체, 혹은 흡혈귀 청년. 정말 흡혈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지에 관해서는 짚이는 바가 없었다.
“고통은 없게 해주지.”
에릭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뭔가 아릿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더니 눈앞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에릭은 의자에서 일어선 자세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무언가 털썩 소리가 나더니 연구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에릭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히카르도는 방금 죽인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미처 눈을 감지 못해 죽을 당시의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히카르도는 잠시 무릎을 꿇고 앉아 상대의 눈을 감겨주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대였고 단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의 부탁을 받아 죽인 상대였다. 죄책감을 품을 만한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히카르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고했어.”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까미유? 왜 여기에…….”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자신을 시켜서 상대를 죽인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예상을 깨고 현장에 나타났고 히카르도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움도 곧 다른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당혹감이라는 감정과 그에 이어지는 날카로운 고통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큭.”
히카르도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왔다. 너무 아파서, 신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겨우 숨을 몰아쉬며 멀어져가는 정신을 붙잡는 것이 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히카르도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어 겨우 중심을 유지했다. 흔들리는 시야에 까미유가 보였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프지? 아마 그럴 거야.”
“대체……무슨…짓…을…….”
까미유가 다가왔다. 단정한 구두소리가 조용한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겨우 쓰러지지 않고 앉아 있는 히카르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시야가 흔들려서일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그의 눈빛이 흔들려 보였다. 까미유가 익숙한 자세로 히카르도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안으면 언제나처럼 까미유의 목에 고개를 얹고 피를 빨 수 있었다. 격심한 고통만 아니었다면 아마 전해져오는 온기에 기분이 좋아졌을 것이다. 목 언저리는 항상 따뜻한 부분이었다. 까미유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난 한달 간 너에 대한 연구는 많은 진전이 있었어. 네가 제공해준 피와 세포 조각으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지. 그래서 네 능력의 비밀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었어. 그리고 널 죽이는 방법도 알게 되었지.”
“까미유…….”
히카르도는 고통을 참으며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그냥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히카르도는 까미유를 세게 끌어안았다. 눈물이 나왔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 때문에.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시간과 유리된 채 방황하는 자신을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이 고마웠다. 태어나서 아마도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을 그의 존재가 히카르도는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곧 편해질 거야. 기분이 좋아질 거고 곧 감각이 무뎌지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너에게도 죽음을 대비한 시스템은 갖춰져 있더군. 그렇게 보면 너도 처음부터 그런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봐. 내겐 정말…희망적인 사실이었지. 역시 능력이라는 건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줬어. 고마워 히카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평소였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머리가 온통 멍했다. 히카르도는 격렬한 고통이 점점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몸이 가볍게 느껴졌고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것이 죽음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생각보다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어째서…어젯밤에는, 그렇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으면서-”
히카르도는 뭔가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그 때 오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에릭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 시점에서부터 그는 이미 이런 결말을 정해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일까. 어차피 내일이면 죽일 존재였으니까. 잔인한 남자였다. 겨우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해 준 주제에 이렇게 배신을 하다니. 차라리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을 때 그랬더라면 오히려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응. 아마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은 너가 처음일거야. 누군가에게 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쏟아내는 건-생각보다 유쾌하더라. 가벼워지는 느낌. 위로받는 느낌. 다 처음 느껴보는 것들이었어.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지. 이대로 너를 살려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어.”
히카르도는 점점 잠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소리가 아득해지고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까미유의 말에 따르면 죽음에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그런 상태와 같았다. 이대로 그의 목을 물어서 피를 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의 달콤한 피를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까미유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져가는 온기를 붙잡고 싶었지만 단호하게 멀어져갔다.
“하지만 난 비밀은,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아.”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어보였다. 이대로 조금씩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직 히카르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연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너무 성급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에릭의 일도,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 해결이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지도. 오랜만에 실수를 해서 불안했던 것일까.
“예전에, 날 위해서 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겠다고 했지.”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후회를 할 바에는 차라리 해결법을 모색하는 것이 나으리라. 까미유는 연구실 창문을 통해 조금씩 동이 터오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까미유는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 이상의 감정은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 걸어잠그기로 했다. 그렇게 이미 오랜 세월 했던 맹세를 다시 떠올리며 까미유는 눈을 감았다. 눈부시게 밝아오는 태양빛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까미유는 웃었다.
“부디 날 위해 내 비밀을 간직한 채, 죽어줘. 히카르도.”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고 사방이 밝아졌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오늘은 히카르도와 까미유가 만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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