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계란
2014. 10. 28. 11:41
2014. 10. 28. 11:41
Fortune: 운 혹은 돈
어릴 적에는 모든 것이 운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돈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까미유 데샹-
“오늘은 그다지 운이 없었어.”
리키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한 마디 내뱉었다. 나는 그의 옆에서 같은 박자로 숨을 쉬며 걸음걸이를 늦췄다. 지나가던 행인에게서 지갑을 훔쳐보려고 했다. 우리들의 벌레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다음 주머니를 뒤지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이 없었던 것인지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가 손목을 잡히는 바람에 빠져나오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이렇게 운이 없었던 날도 오래간만이어서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버렸다.
“괜찮아, 다음번엔 성공할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리키의 말에 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모든 것이 운이라면 사실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운이란 건 그런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제할 방법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남발하는 것도, 그렇다고 비관으로 일관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내 머릿속을 리키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은 그의 반응이 궁금했고 이왕이면 동조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조금 말을 돌려보기로 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리키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질문한 의도를 알아챘던 것일까? 하지만 그가 그럴 정도로 이해력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그가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알 수 없는 것이 답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확실히 그랬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할지는 우리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만 운이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리키도 같이 웃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네는 참 운이 좋군. 하는 일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니. 그 정도면 하늘이 도왔다고 해도 믿겠어.”
“과찬이십니다.”
병원장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나는 그냥 웃었다. 겉으로는 칭찬하고 웃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았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될지 몰랐고 나 역시도 그랬다. 나도 생각과 다르게 웃고 있었으니까, 피차일반인 셈이다. 그렇게 서로를 속이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사실 운이라는 건 간단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돈이라는 수단으로.
병원장은 내 연구가 생각보다 잘 진행돼서 불안한 모양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연구가 잘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후원금을 충분히 끌어모을 수 있었고 그 돈을 가지고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부분의 외부 및 내부 요인들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돈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통제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인지도 몰라서, 사실상 이 세상에서 돈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과 수완이 있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운이라는 것은 어차피 인생을 살면서 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서 일궈낸 결과였고 돈과 수완은 그 선택지를 풍부하게 해주기 때문에.
‘조금만 더 돈이 있었다면 그와도 이렇게 결별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
문득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어렸던 시절을 함께 보냈고 바로 얼마 전까지도 옆에 있었던 인물. 지금도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 나와 리키가 돈이 충분히 있었더라면 굳이 지나가던 행인의 지갑을 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후에 뒤쫓아 온 경찰들에게 잡혀서 호된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부패한 이탈리아 경찰들이 우리를 카모라와의 뒷거래로 빼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카모라에 들어가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돈이 없었다. 그래서 운이 없었다.
카모라는 정말 복잡하고 거대한 조직이었다. 말단으로 들어간 자들은 대부분 간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평생을 끄나풀로 이용당하며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들은 운이 없는 사람들, 혹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난 그렇게 살진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죽진 않을 것이다. 카모라에 강제로 들어가게 된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이용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이미 방향 지워진 인생을 어떻게든 다른 길로 이끌어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내 능력의 가치를 그들에게 충분히 어필하기 위해 분발했다. 나를 이용하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알렸다. 이 하찮아 보이는 벌레가 얼마나 눈부신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 설득하는 것은 잇속에 밝은 카모라 간부들을 꼬아내기에 적절했다. 그들은 나를 이용해 돈을 벌 궁리를 했고 나는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 궁리를 했다. 그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언젠가 자립해나갈 날을 꿈꾸었다. 이왕이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오랜 친구와 함께.
“나는, 조직은 모르겠지만 동료들을 버릴 순 없어.”
그래서였을까? 리키가 그렇게 말하며 내 제안을 처음으로 거부했을 때 그토록 배신감을 느꼈던 이유는. 그 동료들이 나보다 더 소중했던 것일까, 너에게는. 더 소중한 게 아니라고 네가 소리쳤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저 선택할 수 없을 뿐이라고. 언제부터 너에게 나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생긴 것일까. 아아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허망했는지 너는 알까. 결국 너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네 이해같은 건.”
하지만 언젠가 내가 돈을 모아서, 한 때 너와 그렇게 꿈꾸었던 그런 세상을 만들게 된다면 그 땐 비로소 네가 날 이해하기를. 오랜 시간동안, 어쩌면 나의 평생의 대부분의 시간이 지날 동안 너를 비롯해 모두가 날 오해해도 마지막에 너만은 나를 이해하기를. 그것조차 운에 맡겨야 한다면 얼마나 나는 허망한 삶을 사는 것일까. 그러니까 나는 모든 운은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라고, 그렇게 믿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