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계란
2014. 10. 28. 11:45
2014. 10. 28. 11:45
잠시 동안의 휴식
“리키, 쉬는 중이야?”“어? 응, 어……. 왜? 무슨 일 있어?”
소파에 드러누워서 반쯤 졸고 있었나 보군. 까미유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종이더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도 읽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 이런 상황에 히카르도는 소파에 누워서 뒹구는 중. 왠지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어 오른 까미유는 펜대를 내려놓았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펜대가 책상과 닿으면서 탁, 하고 짧게 울부짖었다. 그에 따라 히카르도도 움찔. 별다른 의도는 없었는데, 이왕 이렇게 소리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니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까미유였다.
“목이 좀 마른데.”“그래? 물 떠올까?”“어.”
그런 건 묻지 말고 그냥 바로 떠다주면 안 되는 건가.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무엇을 하든 자신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을 문득 느꼈다. 그게 편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부작용도 있었다. 그래도 자신의 동의를 구하거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까미유는 잠자코 있었다. 부엌 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더니 곧 히카르도가 찰랑이는 수면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하면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 흘리지 않고 무사히 책상에 내려놓는데 성공시키는 그를 보면서 까미유는 한껏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청소 언제 했지? 좀 목이 아픈 것 같아.”“어……. 아마 이틀 정도 전에 했던 것 같은데-”“저런, 그렇게 오래 됐었나? 먼지가 꽤 쌓였겠는걸.”“처, 청소를 그럼 할까?”“그러는 게 좋겠다.”
까미유는 히카르도가 빗자루를 가져와 바닥을 쓸어내는 것을 본 뒤에야 보고 있던 책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등 뒤로 들리는 빗질 소리와 히카르도가 부산스럽게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느라 일으키는 미풍이 기분 좋게 등과 귀를 간질였다. 사르륵 조심스럽게 스치는 그의 옷자락 소리, 빗자루가 부드럽게 바닥 사이의 틈을 긁는 소리, 밖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새들이 지저귀면서 평화로운 교향곡이 완성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만 같은 음색의 교향곡이 귓가를 노니는데 까미유는 왠지 조금, 아주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러질 음색들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우아하다니. 아니, 오히려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답고 우아할 수 있는 것인가.
“까미유.”“…….”“까미유!”“응?”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생각에 잠겨있던 까미유는 뒤늦게 히카르도의 부름에 대답했다. 뒤를 돌아보니 히카르도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괜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잖아. 까미유는 오랫동안 글자를 보느라 피로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왜 부른 거냐고 물어보니 청소를 다 했다고 보고를 한다. 빠르네. 까미유는 웃으면서, 허리를 굽힌 채 의자에 팔을 걸치고 있는 히카르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쑥스러워하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그의 눈동자를 가득히 메우고 있는 익숙한 흰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그를 대하고 있는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까? 아마 당분간은 모를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미유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까미유는 눈을 감았다.
“이것저것 시키는데 불만 같은 건 없어?”“아니, 별로.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니까.”“그래. 하지만 혹시 불만이 있거나 원하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 네가 불편한 건 나도 싫으니까.”
히카르도가 절대 불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내뱉는 위선적인 한 마디. 까미유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히카르도를 보고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어색하게 미소를 되돌려주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는 문득 긴 팔을 뻗어 까미유를 안았다.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행동에 까미유는 덜컹, 하고 의자를 움직였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리키?”
따뜻한 가슴께와 반대로 이미 식어버린 듯 차가운 팔이 피부에 닿았다. 시린 감각에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까미유를 놓아주지 않고 싶은 듯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이렇게 있어도 될까? 갑자기 피곤해져서.”
그렇게 피곤했었나? 아니면 단순히 안고 있기 위한 거짓말일까?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체온이 너무 낮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가슴은 여전히 따뜻하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서서히 한기가 그의 몸을 잠식해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마치 동면에 드는 동물처럼 체온이 낮아지는 시기가 히카르도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익숙하긴 했지만 여전히 원인은 확실히 알지 못했다. 능력의 부작용인가 싶기도 했다. 동면에 드는 동물들은 다시 깨어날 수 있었지만 글쎄, 그의 경우에도 해당이 될까? 아직 한 번도 실험해본 적은 없었다. 과연 차갑게 잠들어버린 그가 다시 깨어날 수 있는지는.
“일어나봐 리키. 자지 마.”“음-”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은 듯 늘어지는 그의 무게가 꽤나 무거웠다. 까미유는 그런 그를 부축하고 소파의 낮은 등에 걸쳐 앉혔다. 급격하게 차가워지고 있는 체온이 느껴졌다. 까미유는 기면증 환자처럼 졸기 시작한 히카르도를, 계속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오는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직은 잠들지 않았으면. 아직 그렇게 쉬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우리, 오랜만에 산책 좀 다녀올까? 오늘 날씨가 아주 좋아.”“너랑……둘이?”“그래. 우리 둘이서.”“……좋아. 가자.”
몸을 억지로라도 움직여야 열이라도 돌 것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움직이고 있긴 했는데. 나가서 따뜻한 것이라도 당장 사 먹이는 편이 나을까? 까미유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코트를 걸쳤다. 히카르도에게도 코트를 건네고 열기를 보존해 줄, 보온성 좋은 천 조각을 목에 둘러주었다. 날씨가 좋았지만 가을바람은 쌀쌀하니까. 그렇게 단단히 무장을 시키고 집을 나섰다.
“아 날씨 좋네.”“그렇군.”“나오길 잘 했지?”“근데, 할 게 많았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그런 눈치는 또 있구나. 까미유는 웃었다. 어차피 내용의 중요한 줄기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으니 산책을 조금 갔다 와서 다시 살펴봐도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까미유는 장갑을 꼈지만 여전히 차갑게 식어있는 히카르도의 손을 잡았다.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이렇게 단 둘이 가지는 휴식 시간은.
“나는 괜찮아.”
나는 항상 괜찮아. 그런데 너는 과연 괜찮을까? 나도 그건 잘 모르겠다, 리키. 까미유는 속으로 읊조리며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깊어진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