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처음에는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온통 새하얀 사람이 앞에 있었다. 하얗고 어딘가 보송보송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하얀 가운을 입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눈으로 들어오는 광경이 강렬해서 잠시 동안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히카르도 바레타라고 내 이름을 불러 다시 주의를 환기시켜주지 않았더라면 한참동안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의 부름을 받고도 한동안은 망설였다. 과연 눈이 안 보인다는 사람이 제대로 진료를 볼 수 있을까. 괜히 잘못 건드려서 상처만 도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흔한 의구심들이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가 인도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부품이 낡았는지 똑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는 탁자 위의 시계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유일한 것이었다. 환자의 증상을 기록하는 종이라든가 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 음…좀 다쳤습니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이며 말을 꺼냈다. 이것은 내 습관이었다. 말을 시작할 때 약간의 뜸을 들이는 것. 왜 그런 습관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그랬었던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의식하게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긴 했지만.
“흠, 어디를?”
의사는 선글라스같이 알이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외형만 보면 진짜 선글라스같이 생겼다. 만약 그가 시각 장애인인 줄 몰랐더라면 왜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것인지 의아했을 것이다. 뒤에 있을 눈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까만 안경알이 신기해서 죽 응시했다. 그는 지금 눈을 뜨고 있을까, 감고 있을까 괜히 안경을 벗겨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엇.”
그가 갑자기 의자를 끌어당겨 앞으로 확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무심코 작게 소리를 질렀다. 절대 그럴 리는 없었지만 혹시 부적절한 내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자기 얼굴에 확 열기가 쏠렸다. 내가 뭐라도 잘못했나 싶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몸을 뒤로 빼다가 책상 모서리에 그만 팔꿈치를 세게 박고 말았다. 찌르르 전해져오는 아픔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이 다가온 채 이쪽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뭐…하시는-”
“다친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좀 보려고.”
“아, 예.”
나는 겸연쩍어져서 짧게 대답했다. 그런 이유로 다가온 것이었구나 알고 나니 괜히 놀라서 책상에 팔꿈치를 박았다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상대가 눈이 안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본인에게는 불행 중 불행인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금방 떠올라서 괜히 미안해졌다. 나는 그에게 다친 부분은 복부라고 말해주었다. 어제 근처의 다른 조직과 싸우는 도중에 입은 상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몸으로 맞붙는 싸움에서는 나이프가 자주 사용된다. 평소였다면 잘 피했을 텐데 그 날은 아침부터 몸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좀 깊게 찔린 것이 놔두면 자연히 치유될 줄 알았는데 어제부터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카모라에 소속된 몸으로 정상적인 의료 시설은 방문하기 어려웠다. 치료한 뒤에는 곧바로 감방행일 테니까. 그래서 보통은 조직 전속의 의사를 병원에 심어두거나 정식 의사 면허 없이 불법적으로 영업을 하는 뒷골목의 의사들을 찾아간다. 지금 속해있는 카모라의 경우에는 규모가 있어서 병원에 전속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운이 나쁘게도 지금 잠시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의사를 찾아보는데 다들 불법으로 영업하는 주제에 치료값은 높게 불렀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 아니면 치료받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인데 그게 또 사실이라 입맛이 썼다. 하지만 나는 카모라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버티자니 밤에 식은땀이 날만큼 상처가 욱신거려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의사를 물색해본 결과 다른 조직이 관장하는 구역에 아주 싼 값으로 치료를 해주는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잘 됐다 싶었는데 충격적인 소식은 그가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의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괜히 갔다가 죽어서나 돌아오지 마라.”
같은 조에 속해있는 피에르가 반은 농담 반은 진담 식으로 말을 던졌다. 하지만 상처는 정말 아팠고 의사는 돌아올 줄 모르고 돈은 없었다. 눈 먼 의사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 이상한 짓을 하면 그냥 나오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그나마 편해졌다.
“흠, 어디 한 번 보죠. 제 손을 잡아보실까요.”
나는 눈이 안 보이는 그가 상처를 어떻게 본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그 의문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아서 상처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면 그는 촉감으로 상처를 볼 생각인 것 같았다.
‘부드럽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손을 잡자마자 그렇게 느꼈다. 내 주변의 남자들은 대부분 손이 거칠었기 때문에 더욱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여자 손은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보다 부드러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 잡아보던 손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게다가 그 손으로 복부를 슬슬 쓸어보기 시작하니까 더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괜히 의식하고 나니 순전히 치료를 위한 과정이라는 걸 아는데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의 손이 닿는 부분마다 간질간질해서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가 앞을 못 봐서 참 다행이야. 그 생각을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며 그의 진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몇 분 정도 상처를 계속 쓰다듬던 그는 곧 손을 떼더니 싱긋 웃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예?”
아니 뭘 했다고. 피에르의 말대로 정말 사기를 당한 건가 싶어서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기를 치기에는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무방비해보여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하는 것인지 망설여졌다. 그 즈음에 나는 문득 상처에서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상처를 입었던 부분을 보니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이게 무슨…….”
나는 신기해서 그에게 무심코 질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웃으며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조용히 갖다 댔다.
“그건 영업 비밀. 되도록 밖에는 제가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는 건 알리지 말아요. 그럼 오실 때마다 싼 값으로 해드리지. 괜찮은 거래 아닐까? 히카르도 바레타.”
갑자기 그가 반말을 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망설였다. 사실 아까부터 하대와 존대가 섞인 미묘한 말투가 신경쓰이긴 했었다. 환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함인 걸까? 확실친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 나이차는 별로 나는 것 같지 않았고 그 쪽에서 반말을 한다면 나도 반말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진 않았다. 그가 워낙 나긋하게 말해서 별로 공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가 컸을 것 같지만. 다만 매번 내 이름과 성을 같이 부르는 게 어색하게 들렸다. 내가 처음에 말에 뜸을 들이는 것처럼 그의 말버릇인가 싶었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나쁜 거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처가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깨끗하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에게는 부당한 거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 쪽이 이득을 보는 거래여서 미심쩍은 의심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의 한없이 선해 보이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눈은 여전히 까만 안경알에 가려진 채 입만 웃고 있을 뿐인데 곡선을 그리는 그의 입술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좋아. 거래는 받아들이지. 근데 그 쪽 이름은 뭐야? 명색의 거래 상대인데 이름 정돈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까미유, 데샹.”
상대의 이름은 생각보다 여성스러워서 픽 웃을 뻔했다.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듯 미묘한 느낌의 이름이었다. 그의 존재자체가 아주 미묘했다.
상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읊조리며 병원 문을 나섰다. 그의 진료실 문 옆에 걸려있는 풍경이 문을 여닫는 미풍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마치 무언가의 경종처럼 울리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어쩌면 나는 알아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부당한 거래는 언젠가 그 값을 치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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