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은 서신
“흠, 정말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구나.”
서서는 붓을 든 채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꽤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감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어갈 즈음에 쓰기 시작한 서신이 해가 저문 뒤에도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문장도 제대로 맺지 못했다. 서서는 붓 끝으로 탁자를 두드렸지만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초조함은 스멀스멀 몸집을 키우기 시작해서 어느덧 가슴 한편이 답답해졌다.
서서는 예전부터 말로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한 아름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려고 하면 망설이게 되었다. 과연 이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전하면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말문을 막았다. 말솜씨가 뛰어났다면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을 테지만 서서는 누군가의 앞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미리 정리해간다면 모를까, 이상하게 말로 설득하려면 긴장해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직접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 그에게는 더 편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오해하거나 오해받을 여지는 충분했지만 서서는 보다 직접적인 것이 좋았다. 사실은 말로 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그런 믿음도 깨져버렸다. 행동으로 보여주려면 일단 상대방이 봐주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는데 그 전제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와 상대할 때는 행동보다는 말로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사사건건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조금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하는 말은 들어주어도 될 텐데.’
서서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서신을 쓰는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와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서가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투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비에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비는 그를 만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물론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서서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고, 유비의 곁으로는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서서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법정 효직이었다.
“넌가? 조조에게 투항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변절자가.”
“예?”
뭐랄까, 그는 처음부터 서서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초면에 반말이 믿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데다가 공격적인 어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설적이었다. 다들 서서가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온 뒤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일은 있어도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강했다. 면전에서, 그것도 변절자라고 말했다. 서서는 당황해서 엉겁결에 말을 꺼냈다.
“그건…이야기가 깁니다만, 저는 변절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니, 변절자가 맞는데. 그것도 두 번.”
“윽.”
법정은 말을 자르는 데 능숙했다. 말을 자르는데 능숙하다는 것은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반박할 패기를 꺾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변절자라는 소문에 대해서는 서서도 딱히 정면으로 맞서고 싶은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말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피하고 행동으로 유비에 대한 충성을 보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격해 들어오면 결국 설전으로 격파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서서가 제일 자신 없어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에게는 횡설수설 설명을 해보기는 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서서 자신도 자신이 변절자가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설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남을 설득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법정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주눅이 들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결국 할 말이 없어진 서서는 그냥 묵묵히 상대가 할 말을 듣기로 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받아들이자고 반쯤은 포기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법정은 서서가 말을 그치자 입을 열었다.
“뭐, 근데 그건 별로 상관없고. 당신, 팔문금쇄진을 격파했다고 하는데 그럼 생각보다 실력은 있나보군.”
“예?”
“기대하지.”
“예...에?”
“그럼 이만.”
뭔가 서두에, 가슴이 따뜻해지려는 말만 남기고 가버리는 법정을 서서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딱 그런 식이었다.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지금도 조금 더 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불평을 하고 있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게 신기했다. 상대방의 말을 잘라도 싫지는 않은 사람. 많은 사람을 만나온 서서였지만 법정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유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편지를 써도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을지도. 그렇다면, 여태까지 했던 대로 그냥 행동으로 맞부딪혀보는 것이다. 말로 설득하는 것도 행동이다. 그 사실을 깨우치고 나니 예전보다 사람들에게 말로 하는 것에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은 과연 법정의 덕분인 걸까? 인정하고 싶기도 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아-내일은 좀 더 잘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
서서는 어느덧 어두운 밤하늘에 휘영청 뜬 보름달을 바라보며 붓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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